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코크림 May 02. 2023

김보성의 의리와 다른 의리 사이의 거리

이글루스의 지난 글들

 원래 그 사람의 이름은 허석이었다. 꽤 오래 전에 이름을 바꿨던 걸로 기억한다. '의리'의 대명사, 김보성 말이다. (20년 정도 된 일인데도 TV에서 그 사람을 볼 때 마다 난 예전 이름이 떠오르곤 한다)  요즘 유튜브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동영상 중의 하나는 그가  주인공인 '식혜'광고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김보성에 대해 깨알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적은 한 TV 칼럼리스트의 칼럼에서였다. 'TV 칼럼리스트가 되려면 연예인 내부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구나'라는 사실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김보성의 '의리'에 대한 그럴듯한 분석과 함께 항상 불안이 내재된 현대인들에게 '의리'라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전근대적 가치가 일종의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글의 요지였다.



  그 칼럼에서 촉발된 것이기는 하지만 내 생각의 방향은 조금 다르다. 먼저 나의 흥미를 자극한 것은 '왜 지금 의리인가'하는 일종의 타이밍에 관련된 부분이다. 그 칼럼리스트가 말한 것처럼 김보성이 의리를 외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십수 년 전부터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 그의 '의리'가 새삼 부각되는가 말이다. 세월호 합동분향소에서 대출까지 받아 성금을 내는 김보성의 모습이 클로즈업되고 무한도전 차세대 리더를 뽑는 선거 유세장에 갑자기 나타나 찬조 연설을 하기도 하고 게다가 '의리로 먹는' 식혜 광고에 등장하는 시점이 공교롭게도 겹친다. 게다가 요즘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다른 남자 배우와 같이 화장품 광고도 찍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그간 '김보성의 의리'는 사실 일회적 예능 콘텐츠로서 소비되었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최근 한밤의 TV연예에 비친 그의 모습 역시 그러하다) 세상의 모든 일을 '의리'라는 하나의 단어로 모조리 수렴시키는 김보성의 발화 방식은 그 자체로 논리성을 소거해버린다. 논리성이 소거된, 즉 밑도 끝도 없는 발화방식은 예능에서만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의리'를 열변하는 그의 모습은 늘 진지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의리'를 '항상' 예능적 관점에서만 '즐긴다'.(사실 웃음의 강도는 둘 사이의 낙차가 클수록 더 커진다) 논리가 소거되고 감각만 남은 어휘가 된 '의리'는 무협이나 홍콩느와르에서 말하는 '강호의 도'와 비슷한 말로 기의는 없고 기표만 남는다. 기표만 남은 단어는 무엇과도 접합될 수 있다. 때때로 '의리'라는 단어는 쉽게 복고적 분위기와 접합되어 키치적 감성을 띠기도 한다.(김보성의 식혜 광고를 보라



 복고적 분위기와 쉽게 접합될 수 있는 이유는 '의리'가 전근대적인 느낌을 지닌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의 '정'과 '인간적 도리'를 바탕으로 하는 '의리'는 흔히 합리적인 영역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우리 사회에서 '정'과 '인간적 도리'는 일반적으로 '합리적인 '계약'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 관계와는 거리가 있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앞의 칼럼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근대적 합리성에 지친 우리사회가 인간적인 '의리'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는 해석을 내세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면 난 이렇게 묻고 싶다. 그간 우리사회가 '과연' 합리적이었는가. 또 우리사회의 근간이 과연 엄격한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세월호와 같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가. 작금처럼 언론 보도의 불공정 시비가 끊이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가 그간 '합리적인 계약'이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의 대부분은 사실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정글같은 경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우리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태도를 '근대적 합리성'으로 치환하여 스스로를 기반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말이다. 나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불법이 횡행하고 자신의 불법을 은폐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불법에 대해서도 관대해진다. 그간 우리사회에서 '의리'는 이런 구조를 보다 견고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던 것은 아닐까.   



 '의리'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칼럼리스트의 말대로 3개의 의미가 있다. '의리는 사랑과 연결된다'는 김보성의 의리는 첫 번째와 두번째 의미인 '사람으로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간 우리가 소위 '의리'라고 여겨왔던 것은 세 번째 의미인 '남남끼리 혈족의 관계를 맺는 일'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혈족'은 아니더라도 '혈족과 같은'사이로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이를 통해 생존력을 높이는 그런 '의리'말이다. 



 



  합리성에 기반한 계약은 기본적으로 '상호 이익'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으면 쌍방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계약은 성립될 수 없 다. 또한 계약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과정의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계약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동안 근대적 합리성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실 가장 전근대적인 인습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좋은게 좋은' 그리고 '인간적인' '의리'는 이러한 인습들이 기생하도록 만든 숙주였던 것이다. 아닌 말로 음료가 맛있어야 먹는 것이지 '의리'로 먹을 수는 없다. '의리'에 의한 구매는 오래가지 못한다.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근대적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계약 관계를 우리 사회의 근간으로 삼아야 할 때라고 본다. 일각에서는 이런 관계가 비인간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계약이 '비인간적'인가 아니면 모호한 '의리'를 지키다 수많은 희생을 불러일으킨 이번 참사가 비인간적인가.     




덧붙임 :    기표만 남아 쉽게 상업화되는 '모호한' 의리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우리는 그간 '의리'의 본 의미를 잊은 채 너무나 많이 가짜 '의리'를 지켜온 것은 아닐까. '의리'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이 도리를 지키는 것은 결국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순리를 따른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한 사회가 인정하는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주체와 타자, 둘 사이의 이해는 가능한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