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라이프# 극악무도한 덴마크 날씨 - 비
만일 당신이 코펜하겐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면, 캐리어에서 우산 혹은 우비를 빼놓는 실수는 절대로 하지 않길 바란다. 덴마크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비가 많이 온다. 일 년 내내 사실상 건기라고 할 수 있을만한 달이 없고, 시시각각 변하는 기상상황 때문에 날씨 앱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확인을 한다 해도 때때로 예상치 못하게 비가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코펜하겐의 전체가 거의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산을 찾아보기 힘들고 바다를 끼고 있는 위치적 조건 때문에, 늘 바람이 많이 불고 구름이 많이 끼며 잦은 비가 온다.
내성이 생겼다고 해야 하는 건지 이골이 났다고 해야 하는 건지,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를 그냥 맞으며 활동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자전거를 몰고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내게 이런 변덕스럽고, 온전히 해가 뜨는 날보다 비 내리는 날이 더 많은 날씨는 너무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분명히 해가 쨍하다고 해서 피크닉을 떠나기 위해 준비를 다 마쳤는데 느닷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강제로 방콕을 하게 되기도 하고, 방수용품을 안 챙겼는데 비가 퍼부어 꼼짝없이 그 자리에 발이 묶였던 날들도 있었다. 덴마크인 친구들에게 푸념조로 "도대체 여기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거야...? 나 해좀 보고 싶어" 하면 그들은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말한다. "웰컴 투 덴마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은 여전히 자전거로 움직이는 걸 포기하지 않고, 때문에 코펜하겐에서는 우비와 장화를 적어도 하나, 혹은 그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우비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쓰레기 종량제 봉투와 같은 비닐을 뒤집어쓰고 가는 진정한 비닐우비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길에서 주로 많이 보이는 색은 베이지색, 검은색, 카키색과 네이비 정도이고, 종류로는 단순한 비닐우비도 있지만 도톰하고 안감에 기모가 붙은 우비도 있다. 패션 아이템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거의 생활필수품에 가깝다. 비가 오면 사무실 입구 옆 옷장에는 50여 개의 비슷하게 생긴 우비들이 쪼르륵 차례로 걸려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우비 왕국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우비가 방수 제품이라고 해서 당신을 완전히 뽀송뽀송하게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우비와 레인부츠를 갖춰 입고 빗 속을 걸으면 무적이 된 것 같아 신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레인코트는 어디까지나 코트일 뿐 아이언맨 슈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날 아침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길래 별 의심 없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하다가, 순식간에 보슬비가 폭우로 바뀌는 바람에 머리와 바지가 홀랑 젖어버린 채 회사에 들어간 날도 있었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에서 몸을 털고 있는데, (삭발한 사람을 제외한)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머리와 몸의 물을 닦아내고 있는 광경을 보고 웃음이 터진 적도 있었다. 회의실에서 갖 샤워한 듯 촉촉해 보이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따뜻한 차로 몸을 데우며 비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것으로 아침시간을 다 보냈다.
이런 날씨에 걸맞게 우비와 레인부츠 시장은 늘 문전성시다. 방수용품 전문 브랜드 RAIN을 보며 비오는 날 막걸리에 빈대떡을 부쳐먹는 정서가 이 곳에 수출된다면 정말 대박일 텐데... 하는 생각도 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비 내리는 도시의 풍경은 이제 코펜하겐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되었다. 구름 낀 하늘, 비에 젖은 길과 건물들이 도심의 채도를 한 톤 낮춰 훨씬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곳에서 하도 비를 맞아서 그런지 나는 이제 한국에 와서도 '이 정도 비는 비도 아니지' 하며 쿨하게 보슬비를 맞는다. 덴마크 사람들처럼 비에 대한 내성이 높아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