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수한량 Oct 31. 2018

회사여 안녕, 나를 찾지 마세요. 당당한 나의 휴가

덴마크 라이프 8#  인턴의 행복한 월차 




덴마크에서의 내 인턴생활은 대체적으로 여타 건축계 인턴생활에 비해 초식동물의 삶처럼 여유롭고 평화로운 축에 속했지만, 개중에는 아주 바쁜 날도 있었다. 한 번은 상하이에 있던 협력업체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결과물 체크를 해야 하는 상황을 주말 내내 맞이하고, 새벽 4시에도 깨서 이메일을 확인해서 보내고 하는 일을 했다(덴마크와 중국의 시차 때문에). 나 인턴인데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진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인턴인데 팀장급이 하는 일을 왜 하고 있었냐면, 나의 상사가... 일주일 동안 모로코로 아프리카 댄스 동호회 여행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마감을 코앞에 두고서.  


월요일, 잠을 많이 못 자 다크서클과 몽롱한 눈을 장착하고 출근했는데, 이게 웬걸! 프로젝트 매니저가 내 자리로 먼저 오더니 다정하게 "새벽에 이메일 보낸 거 봤어(나는 일부러 굳이 CC를 걸어서 보냈다, 보아라 내 업무시간을). 이거 다 맡아서 해줘서 너무 고마워, 피곤할 텐데 데이 오프 언제든 써도 좋아!"라고 하는 게 아닌가. 음? 따지고 보면, 날밤을 샌 것도 아니고 계속 협력사에 피드백만 넣었을 뿐인데 내가 엄청난 무리를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쿨하게 알겠다고 말했지만 웃음이 배실배실 새어 나오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신이 나서 발을 한번 구르고 계속 일을 했다. 


그런데 바쁜 일은 늘 한꺼번에 몰린다고 했던가, 휴무 요구를 하기 이전에 팀에서 선수를 쳤다. 마침 그 주에는 인터내셔널 팀의 프로젝트 마감이 두 개나 더 몰려 있었던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다른 팀장이 자신의 모국 이탈리아로 일주일 동안 휴가를 떠났다(정식 휴가가 아님). 아 진짜 제발... 나는 세 팀의 마무리 작업을 다 도왔고, 하루에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씩의 추가 근무를 했다. 이래선 안 되겠어. 쭈구리 근성이 때문인지 쉬라고 장려를 하는 상황에서도 이를 얘기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참고로 말하자면 그 매니저의 인상착의는, 키 190에 다부진 체격, 삭발을 하고 두꺼운 검은 뿔테를 썼다. 왜 쉽지 않았는지 대충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상황을 주욱 지켜보다가 프로젝트 매니저에게 이메일을 써 내려갔다. 정중하면서도 내 권리를 똑 부러지게 요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손하되 비굴하게 들리지는 않도록 고쳐 썼다. 

딸칵! 전송.


두근두근. 내 우려와는 달리 그는 즉각적으로 답장을 보냈고, 마감 몇 개나 하느라 고생했고, 안 그래도 자기도 이틀 정도 쉬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박! 나는 곧장 화장실로가 문을 걸어 잠그고 승자의 세리머니를 취했다. 나는 지금까지 총 네 번의 인턴생활을 했었지만, 단기직의 특성상 계약서에 명시된 휴가일이 없고 정말 너무 아파서 하루를 쉬거나 한 달가량의 마감 러시 이후에 하루정도 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9시간 정도 추가 근무를 했다고 이틀을 쉬다니. 이 월차 허가 이메일 덕분에 나는 곧장 티켓을 끊어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랜 친구의 집으로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회사를 쉬고 땡땡이 치러 떠나는 길이 사람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를 이렇게까지 단박에 날려준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무리해서 일하면 쉬어야 한다는 건 당연한 것인데도, 한국에서 일을 할 때에는(내 짧은 경험과 친구들의 경험담을 조합하면) 계약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여름휴가 고작 며칠을 내는 것도 쉽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추가로 일해서 내는 휴무 말고도, 조금만 피곤해도 병가를 내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회사를 빼고, 주중에 등록한 자격증 수업을 듣기 위해 또 빠지고, 아까 등장한 나의 상사처럼 밑도 끝도 없이 마감 직전에 아프리카 댄스 동호회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휴가 찬스를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덴마크처럼 그 도가 지나친 경우에는 때로 단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나처럼 팀의 아랫사람이 윗사람이 해야만 하는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 경우도 있고, 팀에 인력을 배분하는 프로젝트 매니저 또한 그 빈자리들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골머리를 썩기 때문이다. 실제로 덴마크인들의 안일하고 여유 있는 태도와 잦은 휴가 요구 때문에 나라의 전체적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전문가 의견도 있다.        


일과 휴식은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할 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휴가가 많지 않은 나라에서 온 내가 가장 휴가가 많은 나라의 문화를 겪다 보니 그 격차가 더 극심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어찌 됐건, 그들의 너그러운 휴가문화로 인해 인턴이었던 나도 주말을 끼고 3박 4일이나 독일로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혜택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직무로부터의 해방이 주는 일탈 감은 늘 삶에 에너지를 되돌려 준다. 여행 내내 단 한 번도 늘어지게 쉰 적은 없고 오히려 몸은 더 피곤했지만 수요일에 회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 없이 가볍기만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한동안 더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던 것 같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인근의 소도시, 튀빙겐




이전 08화 코펜하겐에서 스물여덟의 나이로 처음 자전거를 배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