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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Sep 12. 2023

피아노,평생 아마추어이고 싶다

피아노와 나


Resolver (Ryo Yoshimata). 연습 중인 곡이다.


지난 곡을 마무리할 즈음 다음 레슨곡을 고르기 위해 악보책을 뒤지고 있을 때였다.

"이 곡도 좋을 것 같아요."

권하며 시범 삼아 보여주신 선생님의 연주를 보고 단번에 반해버렸다. <사랑과 전쟁> 같은 막장 드라마에 깔릴 것 같은 비장한 느낌의 이 곡이, 가을 냄새가 날랑말랑하는 이 얄궂은 날씨에 아줌마를 사로잡은 것이다. 아줌마는 격정적인 게 좋더라?


새 곡에 들어갈 때면 늘 그렇듯, 걸음마하는 양으로 음 하나하나를 읽으며 서투르게 건반을 짚어나갔다. 진도는 한 페이지다.

"반복이 많아서 여기만 연습이 잘 되면 다음 장은 쉬울 거예요."

선생님이 친절하고 심상하게 말하고 레슨을 끝내셨다. 다음 수업까지 파워워킹 정도는 만들어 놓는 것 나의 몫이었다.





 레슨곡을 혼자 연습할 때면 일단 유튜브에서 그 곡을 검색해 원곡 또는 프로 연주자들의 연주 영상을 몇 가지 보며 참고하곤 한다. 그 곡을 완성할 때까지 일상에서 의식적으로 자주 틀어놓고 들으려고 노력한다. 아직 초급 수준이지만 알게 모르게 내 머리와 몸에 스며들어 마치 나의 연주가 그러한 양 도취되게 된다. 과학적인 근거의 존재는 모르겠으나 이것이 연습에 꽤 효과가 좋은 것을 분명히 느낀다.

 

이 곡을 검색하면서 처음 알게 된 정보는 이러했다.

작곡가가 일본 이름이라 왜인지 의아하긴 했었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1억 개의 별>이라는 일본 드라마의 OST였던 것이다. 우리 세대 꽃미남! 기무라 타쿠야 주연인 데다, 슬픈 로맨스란다. 격정적인 막장드라마 삘과는 '약간' 동떨어진 요소들에 아줌마는 머쓱해진다. 작자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서술하지 못했구나.

사이가 조금 어색해진 채로 이번에는 연주 영상을 찾았다.

이 곡은 놀라움과 반전의 연속이구나. (헛다리 짚은 건 죄가 아니나!) 원곡을 접한 순간의 충격은, 작년 가을부터 레슨을 받기 시작한 이래로 처음 맛보는 것이었다. 우리 어머님의 고추장만큼이나 맵고도 극강의 감칠맛이었다. 일단 어마무시한 속도가 매운 맛이었다. '내가 치는 이 곡이 그 곡 맞나?' 정말로 눈을 씻고 다시 확인했다. 요즘 말로 현타가 왔다.

허나 동시에, 이렇게 매력적일 수 없었다. 첫눈에 아니 첫 귀에 반해 택했던 그 순간보다 더욱 끌렸다. 현타를, 그 갭을 극복하고 싶어졌다. 도무지 현실감 없는 연주들을 본 후 스멀스멀 올라오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알아챘다. 나도, 되지 않을까, 연습하면, 언젠가는.


  




거의 매일 한 시간씩은 연습했다. 연습을 마치고도 아예 피아노 뚜껑을 닫지 않고 둔 채, 틈 날 때마다 앉아 뚱땅거렸다. 주말 이틀간은 두 시간씩 했다. 작정한 건 아닌데 치다 보니 그리 되었다. 문득 '고만해야지' 하고 나와 시간을 보면 두 시간이 홀랑 지나 있는 식이었다. 사마씨는 "전공하세요?"라고 놀렸다. 한 곡을 가지고 두 시간을 연습한다고? 질리지도 않고?  

일절의 다른 잡생각 없이 내가 원하는 이것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한다. 인생에서 그런 것을 만날 기회가 내게만 어려웠던 것일까. 사십 년여를 살면서 과연 있긴 있었는지 돌아본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기억력이 확실히 안 좋아지긴 했지만).

몰입하는 나를 발견하는 게 새롭고 벅찬 마음이 들어, 놀림을 받고도 너그러이 웃는다.










요즘은 아마추어의 수준이 너무나 높다. 피아노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느 날 아마추어 콩쿠르를 감상하다, "아마추어 맞아?"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단지 업으로 삼고 있지 않을 뿐 '프로'와의 경계가 희미해 보인다(매 참가자의 연주마다 입 벌리고 보는 초짜인 내게는 더욱 그러하다).

'나도 프로 피아니스트가 아니니 아마추어지 뭐.'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가, 그 콩쿠르 영상을 보면서 커다란 높은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었다. 아마추어이면서 '아마추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사전을 찾았다.

아마추어 : 예술이나 스포츠, 기술 따위를 취미로 삼아 즐겨 하는 사람.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만둔 이후로 무려 삼십 년 만에 다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큰 용기가 필요했다. 너무 오랜 공백이 있은 후라 초심자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피아노를 다시 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지금이어서일까, 나는 아직 어디 가서 "취미요? 피아노입니다."하고 명함을 내밀어 본 적 없다. 취미에 수준이 필요한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나, 장난 아닌데. 이거 무척 즐겨 하는 사람인데?'


피아노 연습 기록을 위한 거라 핑계 삼아 또 새 노트를 장만하며, 나를 기분 좋게 몰입하게 하는 고마운 이것에 나는 당당히 아마추어이며, 평생 '무척 즐겨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긴 연습 후엔 어김없이 팔과 어깨가 아픈 초보 피아노 취미생은, 그리하여 '피아노 칠 때 힘 빼는 방법' 영상을 검색한다. 평생 아마추어이기 위한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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