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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Apr 20. 2023

괌에서 요가를

떨어지는 해, 그만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나.


어제는 우리 집 소녀와 수영장에서 마지막 노을을 즐기다, 해가 떨어지는 것을 나야말로 미련이 뚝뚝 떨어지도록 지켜본 다음에야 들어오는 길이었다. 배가 싸하고 뻐근한 게 왠지 느낌이 싸하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휴. 그래도 선방했지. 떠나는 날 전날까지 나흘을 꽉 차게 놀고 실컷 즐긴 후이니 다행이지 않은가.

내일은 정오 체크아웃이니 오전에 우리 집 맹구들만 물놀이하면 그걸로도 족하다. ‘짐을 싸고 마지막 풍경을 눈에 담으며 글을 써야지’ 시간을 보낼 거리를 구상하며 방으로 들어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처음 보는 안내판이 보였다. 아니 이게, 왜 이제 눈에 띄는 거지? 마지막 밤에서야 말이다.

호텔에서 하는 액티비티 안내였다. 프로그램은 줌바, 요가, 아쿠아로빅이 있는데, 가만...... 어라, 내일 오전! 요가가 있다!

컨시어지에서 미리 등록하라는 문구가 있다. '당장 내일 아침인데, 이미 마감되었을 수도 있겠는데.'

얼른 가서 문의하니 그냥 시간 맞춰 장소에 가면 된단다. 아싸! 아니 Hurray!






아침을 7시 반에 가서 먹고 맹구들과 남편은 수영장으로 직행했다. 나는 요가할 만한 옷으로 갈아입고 고대하던 요가클래스 장소로 시간 맞춰 향했다.     


여행에서 마지막 날의 일정은 숙소 체크아웃에 맞추어 오전 서너 시간만 허락되는 경우가 많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이 시간은 짐 싸느라 분주하지, 그 와중에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돌아간 것도 아닌 어중간한 기분으로 보내기 마련이다.

미련과 아쉬움의 끝자락을 붙잡고, 그 좋아하는 비치에 둥둥 스노클링으로 마지막 일정을 보내도 시원찮을 마당에, 물에조차 못 들어가는 이내몸이 되었다.

하지만 여행은 사람을 긍정적이고 느긋하고 유들유들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안내판을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이었다. ‘괜찮아. 물에 못 들어가면 어때? 선글라스 쓰고 배드에 누워, 가져간 이슬아 책도 마저 읽고, 수첩에다 지금 이 풍경을 끄적끄적 글로 담는 거야. 쫌 멋질 것 같아. 덕분에 나흘 내내 입은 래시가드 수영복 대신 원피스 사진도 남기는 거지, 뭐.'


그런데 계획에 없던 요가를 하러 가는 지금 나는, 자기 위로 말고, 긍정적이라서 말고, 찐으로 신나는 중이다.


  



   

호텔수영장과 해변이 이어져 있는 길 옆으로 몇 걸음 가니 나무 지붕이 있는 넓은 데크가 있다. 요가 클래스가 열리는 곳이다. 이미 십여 명의 사람들이 앞줄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입구에 구비된 매트를 가져다 두 번째 줄 오른쪽 끝에 가서 자리했다. (신참은 어떻게 본능적으로 구석으로 가는가)


사진출처 : 소장




살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면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진작에 앞줄을 차지한 사람들은 왠지 고수의 아우라를 물씬 풍긴다. 가만 보다 보니 매트가 다르다? 오, 자기 장비를 챙겨 왔구나. 나 같은 관광객이 짧은 일정에 단지 한두 번의 클래스에 참여하기 위해 고국에서 매트를 싸들고 오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아까 입구에서 종이 서식에 이름과 방 번호를 적고, 옆에 이 호텔 숙박 여부를 표시하는 칸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우리로 말하면 백화점이나 대형쇼핑몰 문화센터 강좌에 주민들이 수강하는 것 같은 거겠지. 숙박객들은 무료지만 그들은 얼마간의 수강료를 지불하는지도 모르겠다. 정기적으로 자기 장비를 가지고 참여하는 그들, 말하자면 기존회원님들. 내가 신참을 자처하며 가장자리 잡고 흘깃흘깃 분위기 파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여기가 빤한 고참들은 당당히 앞자리를 차지한다. 이 암묵적인 서열은 동서양을 막론한다.     


 




시작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더 촘촘하게 채워지는 걸 지켜보면서 점차 들떴다. 수업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내 안의 만족도 최고다. '선 좋아요 후감상(아니 수강)'

괌은 한국인의 천국이다. 특히 지금 이 시간에도 호텔수영장에는 한국인들이 매우 많고 비중으로 하면 60~70% 정도인데, 불과 한 발치 떨어진 이곳 요가 클래스에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 중 나 말고 저기 저쪽에 동족으로 보이는 여인 한 명, 이렇게 단 둘뿐이다. 외국인들로 둘러싸여 요가하는 기분이 나를 가장 들뜨게 만든다. 괌공항에 도착해서 만난 야자수들 외에 이례적으로 이국적인 환경에 신이 난다.


 

맨 앞에서 투먼 비치를 등지고 우리를 향해 앉은 선생님이 온화한 미소와 잔잔한 음성으로 수업을 이끈다. 그녀의 말씀은 더러는 알아듣고 더러는 그저 흘려보낸다(아니 내 의지로 흘려보는 건 아니니 스쳐 지나가는 것이겠다). 특히 아는 동작을 할 때 그녀의 설명을 듣는 것은, 잘 맞는 수준의 듣기 평가를 하듯 내가 가진 얕은 지식에 매칭해 보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생소하거나 조금 어려운 동작을 할 땐 익숙하게 수행하는 내 앞의 기존회원님을 흘깃거리며 눈치껏 따라 하면 된다. 선생님의 설명은 이미 안중에 없다. 마치 가사 없는 음악처럼 배경음으로 깔린다(한 길 건너 수영장 물소리나 사람들 노는 소리에 묻혀 안 들리는 것이리라).   

  





새해를 맞이하며 응당 일 년 목표와 계획을 세운다. 이걸 안 하면 새해 기분이 안 난다. 바꿔 말하면 무슨 새해 기분 내려고 계획을 세우는 모양으로.

새해계획이란 모름지기 ‘영어 공부, 독서, 운동’ 이 삼대장을 필두로 하는데, 올해 쓸 다이어리를 연말 전부터 고심에 고심을 더해 고른 정성에 비하면 이 계획은 작년, 그 작년과 큰 변화는 없다. 그걸 또 알아채고 만다. 멋쩍게시리.

 

그럼에도 ‘올해는 작년, 그 작년과는 다를 거야.’

'요즘 핫한 미드 쉐도잉으로 쏼라쏼라 블라블라 유창하게 영어말 하는 신여성으로 거듭날 거야, 책 사는 취미는 그만하고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지성인이 되어 보자고, 올해는 바프(바디프로필) 한 번 찍어봐?' 끝은 창대할 내 앞날을 그리며 다이어리 앞면을 꾹꾹 눌러 채운다.


연중행사 같은 새해 계획임에도 그 희망과 기대 덕에 올해는 기구필라테스를 하는 곳에 처음으로 가보았다. 무급휴직 중이므로 비교적 비싼 그 운동을 등록하는 데 큰 마음을 먹어야 했고, 내가 벌어 쓸 때보다 귀한 본전을 들인 덕에 그간 일삼던 작심삼일을 극복하고 성실히 다녔다.

필라테스 한 지 두어 달. 코어 힘이라는 게 미미하게나마 생긴 것을, 이곳에 와서 새삼 느낀다. ‘꼬리뼈를 감추고, 배꼽을 끌어당기세요. 갈비뼈를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흉곽에 바람이 채워지고 나가는 걸 느낍니다.’ 우리 동네 필라테스 선생님의 익숙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코어 힘을 요하는 요가 동작들을 무리 없이 해내는 내가 조금 멋지려고 한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뜬금없이 불붙은 자신감은 아줌마에게 노출을 허했다. 브라탑 위에 굳이 걸쳤던 티셔츠를 훌렁 벗어 매트 옆에 둔다. 이 습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도 차마 브라탑 차림이 되지 못하고 꾸역꾸역 뭔가를 걸쳤었다. 이국에서도 한국에서의 습관을 장착한 채 아무도 내게 관심 없는 주변을 내내 혼자 의식하고 있었다.


여기 나를 아는 이 없거니와, 내 배를 보는 이 단 한 사람 없좌나(쌍둥이를 핏줄이 터지도록 담았던 게 10년이 되어가지만, 노력이 야속하게도 올라붙을 생각 없는 늘어진 내 배. 결코 부끄럽지 않은데, 부끄럽곤 했다).

얄부리한 고거 한 장 벚어제꼈을 뿐인데 이 기분 무엇인지. 이것이 미국의 자유라는 건가(생각도 말도 자유롭게 막 나오고 있고). 앞에 옆에 외쿡 언니들과 하나 된 듯 혼자 내적친밀감 형성하고.  닷새간 햇빛에 그을려 기미 잔뜩 올라온 피부마저 고루고루 예쁘게 태닝 된 몸으로 머릿속에서 이미 합성되었다. 환상 속의 나에게 도취되고 난리다.     



아. 딱 지금인데. 지금쯤 뒤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투먼 비치를 배경으로 멋진 요가 포즈를 정확하고 여유 있게 수행하는 실루엣이 근사하게 그려질 텐데. 이 순간을 박제해서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데.

아까 시작하기 직전 남편에게 황급히 카톡으로 '와서 사진 찍어줘, 슬쩍'하고 보내고 얼른 닫긴 했더랬다.

그림이 제법 괜찮게 나올 것 같은 동작을 할 때면 문득 ‘찍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을 요렇게 돌려 살피곤 했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수영장에서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 그의 상황을 알면서도 한 번쯤 와서 가만히 찍고 가지 않았을까 하며.






막바지로 접어든 동작을 하며 비치를 바라보자니, 살살 불어오는 미풍이 겨드랑이를 오솔오솔 간질인다. 순식간에 흘러간 닷새의 여정이 한 장면씩 지나며 선생님의 음성과 함께 차분하게 정리가 된다. 여행이 끝나간다는 아쉬움과, 세 번째 괌에 이런 뜻밖의 경험을 했다는 짜릿함과 신선함을 동시에 느낀다. 이걸 막판이라도 발견해 내고 기회를 놓지 않은 자신에게 자찬도 해본다. 함께한 가족들, 특히 전우에 대한 고마움도 울컥 올라오고. 일출도 일몰도 아닌 멀건 대낮에 아줌마 몹시 감성적이 되고 말았다.    

 

한 시간여의 클래스가 끝났다. 자리를 정리하며 남편에게 보낸 메시지를 열어보니 오마이, 전송도 안 되었구나. 결국 누구도 본 이 없고 사진 한 장 남지 않았지만 내 머리와 가슴에서 이미 인생샷은 건지고도 남았다. 

만일 남편이 슬금 와서 찍었다 하더라도, 전송이 안된 허무함보다 더한 아쉬움을 맛보았을 터다(그에게는 종종 배우자를 이 등신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렇다, 틀림없다. 그러니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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