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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Sep 11. 2023

소소한 문구의 너무한 행복

세 아이와 종종 다이소에 들른다. 남편은 생활용품,  아들들은 장난감 코너로 직행하고, 요즘 네일이나 쌍꺼풀 만드는 데 관심이 많은 딸은 화장품 코너에서 각종 용품들을 탐방한다. 나는, 단연코 문구다.


엇, 아직 있네, 이 수첩.

지난봄 어느 날 역시 문구 코너를 기웃거리다 딱 마음에 드는 수첩을 발견했었다.


깔끔한 줄무늬의 내지를 갈색 가죽 커버가 감싸고 있는 작은 수첩이었다. 가격으로 미루어 당연히 인조 가죽일,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 그 커버는 단단하지 않고 무척 부드러웠으며 마감이 좋아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 워 갈색을 좋아하지만 다 똑같은 갈색이 아니라고, 딱 맛깔나게 탄 갈색이었는데, 심지어 커버의 가운데 달린 똑딱이도 무광의 까만색이라 촌스럽지 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이어리도 아니고 고작 손바닥만 한 수첩이면서 외피를 여며 고정할 수 있는 똑딱이가 달려있다니. 규모에 비해 과하게 고성능인 요소들이 어이없게 귀여웠다. '아무한테나 안 보여줄 거야. 너만 보여줄 거야' 말하는 듯했다. 이 사물은 나의 선택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될 냥으로 도도함을 풍기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사이즈, 비슷한 가격의 여느 수첩들은 이미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서 어쩔 수 없이(!) 품어왔다.


                                                                           







마침 가족 여행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그동안은 여행을 다녀오면 사진과 기억에 의존한 기록으로 포토북을 만들곤 했었다. 하지만 이 수첩을 보는 순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생각은 <대화의 희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가 한 여행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는데, 여행을 할 때 하나의 여행지에 한 권의 노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여행 준비 과정부터 여행 중의 그림과 에세이 등 그 여행에 관련한 모든 것을 기록하여 한 권의 책으로 남긴다고 했다. 여행과 기록과 김영하라니. 좋아하는 3요소(!)의 조합이니 새기고 있었나 보다. 한참 지났지만 그 방송을 본 후로 첫 여행이었다. 한창 계획하던 중 이 수첩을 만났으니, 운명이라 하련다. 이 수첩은 그리하여 나의 이번 여행노트가 되었다.


첫 장에 항공편과 숙소 예약 내역을 시작으로, 준비물이나 미리 알아본 현지 맛집 등 여행 준비 사항을 기록했다. 떠나고서는 때에 따라 배낭 맨 앞주머니에, 손가방에, 방수파우치로 옮겨 다니면서도 연필 한 자루와 짝꿍이 되어 내 손 닿는 제일 가까운 데에서 여정을 함께 했다.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꾸 끄적이고 싶어 졌고, 끄적이는 게 재밌어지고 그런 내 모습이 좋아서 여행 중 떠오르는 순간들을 함부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수첩에 자꾸만 붙잡았다.







사서 고생하는 여행을 즐기는 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지를 선택함에 있어 많은 부분 고이 접어 넣어둔다. 진종일 걷고 또 걷는 나의 여행 취향을 고수할 수 없다. 그리하여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의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안전하고 이동이 많지 않아야 한다. 물놀이를 할 수 있으면 게임 끝이다. 몇 년 만에 간 이번 여행 역시 아이들이 물놀이를 원 없이 할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아이들은 수영을 배운 적 없음에도 물안경 하나로 금세 자유로워졌다. 물속을 유유히 혹은 휘저으며 놀았다. 거기에서 처음 만난 아이들과 금세 친구가 되어 어울려 놀기도 했다. 아이란 존재는 참으로 유연하고 열려있구나. 하루쯤 미리 예약한 돌고래 투어를 했고, 어느 저녁에는 택시를 타고 나가 맛집 탐방과 소소한 쇼핑을 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물놀이를 만끽했고 부모는 때에 맞추어 식사를 제공(!)하면 되었다. 그 덕에 전에 비하여 조금 더 편하고 여유로운 여행이 되었다.



수영장을 좋아하는 아이들과 달리 나는 호텔 앞바다에서 스노클링을 즐기는 쪽이었다. 우리나라 바라를 생각하면 여기는 거의 없다시피 한 잔잔한 파도와 안전한 깊이 덕에 쫄보인 나도 바다를 만끽할 수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엎드려 둥둥 떠다녔다. 수영을 배웠지만 써먹지 못하는 수줍은 실력 따윈 문제도 되지 않는 스노클링이 나는 정말 좋았다. 둥둥 뜬 채 이리저리 휩쓸리며 다니다 투명하고 고운 색깔의 물고기들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그때만큼은 인어가 된 상상을 했다. 손을 흔들거나, 말이라 할 수 없는 소리를 뱉어 인사를 건넨다. 그들은 나 같은 인간이 익숙한 지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무리 지어 우 하고 재빨리 지나가거나 먹이를 찾는 모양으로 이따금 바닥을 콕콕 찧기도 한다. 무심하고 어여쁜 그 물고기들에 홀려 따라가기도 해 보지만 그러기에 나는 좀 느리다.
                                                                           


수영장을 좋아하는 아이들과 달리 나는 호텔 앞바다에서 스노클링을 즐기는 쪽이었다. 우리나라 바라를 생각하면 여기는 거의 없다시피 한 잔잔한 파도와 안전한 깊이 덕에 쫄보인 나도 바다를 만끽할 수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엎드려 둥둥 떠다녔다. 수영을 배웠지만 써먹지 못하는 수줍은 실력 따윈 문제도 되지 않는 스노클링이 나는 정말 좋았다. 둥둥 뜬 채 이리저리 휩쓸리며 다니다 투명하고 고운 색깔의 물고기들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그때만큼은 인어가 된 상상을 했다. 손을 흔들거나, 말이라 할 수 없는 소리를 뱉어 인사를 건넨다. 그들은 나 같은 인간이 익숙한 지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무리 지어 우 하고 재빨리 지나가거나 먹이를 찾는 모양으로 이따금 바닥을 콕콕 찧기도 한다. 무심하고 어여쁜 그 물고기들에 홀려 따라가기도 해 보지만 그러기에 나는 좀 느리다.


스노클 장비를 입에 물고 입으로만 숨을 쉬고 있다. 물밖에서와 달리 물속에서는 나의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온다. 그것을 인식하면서 숨소리에 집중하는 순간이 있다. 물 밖에서,  저어기 호텔 풀장에서 틀어놓은 경쾌한 음악 소리가 멀게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가 편안했고, 나 혼자만 존재하는 듯한 고독함이 무섭고 좋았다.

해변으로 나오니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한가롭고 시끌벅적하게 즐기고 있다. 내 아이들은 풀장에서 아빠와 배구를 하고 있다. 바로 전의 경험과 대비를 이루는 풍경. 마치 다른 시공간으로부터 돌아온 듯 낯설다. 반갑다.






사실 이곳은 두 번째 방문이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천지삐까리인데 같은 곳을 두 번? 같은 휴양지를 다시 가는 것도 모자라, 그것도 같은 호텔로! 예전의 나의 뇌구조라면 솔직히, 진짜 별로였을 거다. 근데 희한하게 좋다? 뭐가 좋지? 돌아와서 곰곰 생각해 본 결과 세 가지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첫째, 편안함이 있을 거다. 좋은 데는 또 가도 좋다. 좋은 걸 알고 하면, 더 좋기도 하다. 처음에 낯설고,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한 채, 이것저것 파악해 나가는 데 에너지를 쓸 일이 없이 그저 온전히 누리면 된다. 지나치지 않은 익숙함은 행복과 만족감을 주니까

둘째, 우리가 그때와 같지 않다. 5년 전에는 쌍둥이가 너무 어려 딸아이만 데리고 왔었다. 이번엔 다섯 명 완전체다. 다섯이 먹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은 셋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 달라진 상황은 약간의 긴장을 선물(!)했고, 새롭고 재미났다. 그 덕에, 익숙할 뿐 결코 따분할 새 없었다. 

셋째, 아무래도 이 수첩 덕분임이 틀림없다. 여행 준비 중 만난 취향저격 가성비 수첩을 여행노트라 명명하고 내내 지니고 다닌 것은 예상보다, 기대보다 훨씬 힘이 컸다.

 

맛집이나 여정(딱히 여정이랄 것도 없는 헐랭한 여행이었지만) 따위에 대한 것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꼭꼭 주워다 쟁여놓은 영수증이나 사진들만으로도 충분히 사후 기록이 가능했다. 그런 걸 여행지에서 일일이 적는 행위는 생각만 해도 아까운 일이다. 쓰지 않으면서 쌓아둔 물건들로 집 평수를 내어주는 모양이랄까. (아 정작 정리가 필요한 우리 집이여. 눈감아.)



대신 내 여행 노트에 빼곡히 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신기하거나 뭉클하거나 흥미롭거나 어이없는 장면들을 묘사했다. 그림을 잘 그리면 쓱싹쓱싹 그림을 그려 표현하면 참 좋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재주는 없으니 글로 담았다. 또한 세 아이의 기발하고 우스꽝스럽고 감동적이고 놀라운 말들을 기록했다. 특히나 이건 소중한만큼이나 빠르게 휘발된다. 여차저차하는 사이에 정말이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안타까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하며 얼른 수첩을 찾아 암호처럼 날려 적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것은 내 안에 대한 기록이다. 순간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아이디어, 가슴에 찐하게 차오르는 감정 역시 순식간에 사라지곤 하기에 그 어느 때보다 나에게 집중하고 귀 기울였다. 이 모든 게 손 닿는 곳에 이 수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번째 방문인 이곳에서, 여차하면 따분할 수도 있었던 여행이 손바닥만 한 나의 깜찍한 여행 노트로 인해 풍성하고 충만했다는 생각은 그러니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한, 천 원의 행복이다.






새 문방구가 일상으로 들어오는 순간, 온 사고가 그 문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또 다른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셈이다.

문구가 내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펜텔 사인펜을 처음 써보고는 굵기나 필기감이 퍽 마음에 들었다. 20년간 탐험했던 수많은 필기구들을 제치고 드디어 나와 궁합이 맞는 궁극의 무기를 찾은 것만 같았다. 이후로 신나서 여기저기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계속 그리다 보니 어느새 그림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취미가 됐다. 펜 한 자루로 인해 새로운 취미를 얻은 셈이다.

- <아무튼, 문구> 김규림




오랜만에 찾은 다이소 문구코너에서 예의 갈색 수첩을 다시 만났다. 속으로 반갑게 알은 체를 하고는 어슬렁거리며 두루 살피다, 나무색의 두꺼운 종이가 표지인 노트를 집었다. 문구점이라고, 문구코너라고 늘 마음에 드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칭 문구인이라고 모든 문구를 소유하고자 욕심나는 것도 아니다. 마음에 쏙 드는 문구를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 취향에 딱 맞는 문구를 발견하면 집었다 내려놨다 할 것 없이 소비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래야 또 만들고...)


새 노트가 내 책상에 두어진 이후 오래지 않아 어김없이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얻은'건지, 나의 온 사고가 새 문방구의 쓰임을 궁리했는지 헷갈리지만, 아무튼 새 노트에 알맞은 쓰임이 생긴 것이다. 나는 영어공부로 원서 읽기를 시작했고, 노트는 그 원서의 짝꿍으로 활약 중이다.


 



P.S) 지난달 처음 간 부산에서 벅찬 가슴으로 사들고 온 삼색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먼 걸음 한 새 펜을 중심으로 온 사고가 돌아간 끝에, 새해에 열렬하게 쓰다 어느샌가 방치된 다이어리에 정착하였고 그 덕에 나는 다시금 다이어리 작성에 불태우게 되었음을 새삼 상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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