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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Mar 21. 2024

문박사 잘 가. '많은 나들'이 배웅할게.

필명 개명기

저의 현재 필명에 대해서라면 정성 어린 글 한 편으로 이미 피력한 바 있어요.

이렇게요.



https://brunch.co.kr/@msh7682/40




요컨대, '박사'를 사전에서 찾으면 나오는 '대학원의 박사 과정을 마치고 규정된 절차를 밟은 사람에게 수여하는 학위'(헉헉)라는, 나와는 거리가  첫 번째 정의는 가만 넣어두고, 두 번째 정의인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바로 여기에서 나의 필명이 파생되었다는 설명이었죠. 

(이상 빨리 감기 모드였습니다.)



저요, 자타공인 취미 부자죠. 문제는, 내로라할 정도의 호기심과 추진력에 비하면 막상 결과물은 초라하다는 점이에요. 그러니, 무난하고 어중간한 사람, 눈에 띄고 싶지 않기도 한데 정말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이라고 자조 섞인 자평을 했던 거고요. 그런 나를 마흔 초입에서 바라보며, '이제는 집중력을 발휘하여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가자!'라고 다짐했었어요. 그런 바람으로 지은 필명이 문박사. '어떤 일에 정통하고 숙달된' "여~ 000 박사~!"가 되기를 바랐었죠.

바랐었죠.

랐었죠..


그렇습니다. 과거형을 우리는,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닌 것,에 쓰지요.


 




고백하자면 의외로 꽤 되었어요.  필명이 내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 말이에요. 

그런데 왜 '의외'냐고요?

처음 가진 필명이잖아요. 첫사랑, 첫아이, 첫 내 집, 첫 키스..(흠흠 유교결이므로 이 정도로.) 우쨌든 첫 경험은 그 무엇이든 특별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의미 부여하기 대장이 또 얼마나 깊은 의미를 부여하느라 고민고민했겠어요. 그만큼 애착이 깊었죠. 우리 동기 작가님들이 박사님 박사님, 불러주는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더 애틋해졌고요. 아이고, 그렇다고 무슨, 첫 번째 정의는 고사하고 두 번째 정의로라도 만물박사 척척박사가 된  착각해 우쭐한 쪽은 아니랍니다. 그저, 필명이라는 솜이불로 보드랍게 감싸 나라는 사람을 불러주는 목소리라는 것을, 왜 모르겠어요. 그걸 앎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럴수록, 끝없이 양산해 내는 쓸데없는 의미부여 버릇과 자기 검열로 인해 점점 더 편치가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어서, 정확히는 적극적으로 떠올릴 생각도 않은 채로 하세월을 보냈죠. 게다가 이번 겨울 동안 개인적인 일로 글쓰기를 소홀히 했으니 더욱 거리가 생겼고요. 하긴 뭐, 이후 글을 쓰게 되었다고 나아진 것은 아니었어요. 그리 눈이 부시지 않은 하늘을 굳이 양손으로 가려가며 필명에 애써 흐린 눈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아, 짠한 '문박사'여.







지난 주말. 초6이 된 딸아이가 제 휴대폰을 가지고 가서 만지더니 픽픽 웃더라고요?

"뭔데?"

"엄마(끅끅) 이것 좀 봐요."

아이가 내민 것은 인0타 카메라였어요. 스 0우 앱보다 뽀샤시하게 찍힌다나. 귀여운 필터도 많고요. 저는 아직 아이의 인스타 활동을 제한하고 있어요. 그러니 아이는 종종 엄마 폰을 빌려요. 요래 저래 표정을 지어가며 셀카를 찍느라 여념이 없네요.

"엄마, 이거 재밌어요."

그러면서 훅 들이밀어요. 저는 늘 그렇듯 본능적으로 그렇고 그런 표정을 지었답니다아이가 장난을 걸고 싶다면 적절히 받아쳐주는 게 도리이자 모성의 본능이죠.

큭큭거리며 아이가 휴대폰 든 손을 거두어갑니다. 역시나 결과물을 들여다보며 좋아하네요. 흡족함의 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면서 말해요.


"큭큭큭. 많은 문00들이다."


놀라셨다면 사죄드립니다. 작게 올리는 법 알랴주세요...




그 순간. 머릿속에서 전구에 불이 켜졌던가. 아닌가. 머리 위에서 팡팡 불꽃놀이가 열렸던가. 아닌가. 아무 일도 없었던가.

상관없어요. 여하튼 내 기분은 그랬어요. 아이에게서 휴대폰을 받아 확인한 사진 속 내 표정이 바로 내 지금 상태 그대로였죠.

오잉? 와하하하!

딸아이를 붙들고 말했어요.

"맹구, 넌 나에게 영감을 줬어!"


문00가 많다, 도 아니고 '많은 문00들'. 같은 말인데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어요.

많은 문00들. 

많은 '나'들.






'문박사' 탄생 기원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언급했듯이, 이것저것 관심 많고, 시도하고. 하지만 딱히 내밀 명함은 없고. 그러니 이제 그게 무어든 무엇이 좀 되어보자. 뚜렷한 재능이 없는 건 니예 니예 잘 알고 있으니(자기 객관화가 내 재능이던가) 그저 좋아서 시작한 무어라도 꾸준히, 들입다 파서 무슨무슨 박사가 되어 보자.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그거였어요. 그 심오하고 좋은 의미가 어째서 점점 부담으로 변한 건지 말이에요.

뭐가 되려고 했어요. 되어 보자 했어요.

물론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죠.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고, 아마 죽을 때까지 그 바람과 포부 놓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요. 그런데 그 순수한 바람을 필명에 넣은 게 나와 어울리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라는 사람은 조금의 푸시라도 받으면 뒤로 물러나 버리니까요. 뒷걸음질 치다 내쳐 도망갈지 몰라요. 


'되어야 한다'는 의무나 강압이든, '되자'는 다짐이든, '되고 싶다'는 포부든. 인생에서 무슨 수로 이런 것을 비켜갈 수 있겠어요. 아니 오히려 삶의 이유이자 원동력일 수도 있죠. 그러니 내가 자처해서 일을 벌이는 거겠죠. 되고 싶어서 꿈꾸고, 되리라 믿고, 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도 해내고요.


그렇지만, 필명에는 안 되겠어요.





나는 지금 이 부캐가 너무 귀해요. 

다작도 못하고 규칙적으로 발행도 잘 못하지만 절대 놓지 않을 거예요. 글 쓰는 내가 좋아요. 버스에서 여태 안 내리고 먼 길 가고 있잖아요. 길은 먼지 나고 덜컹거리고, 끝이 안 보여 지루한 순간도 있어요. 그런데요. 여정이 흥미로워요. 덜컹거리는 차에서 멀미가 나다가도 리듬이 되어 몸을 흔들게도 되고, 편안한 길을 갈 때는 책도 좀 읽고, 지루하면 잠도 좀 자면 어때요. 외로우면 다른 승객과 수다도 떨고요. 중간중간 정류장이나 휴게소에 들를 수도 있겠지요. 종점에 다다를 때까지는 어떻게든 안 내릴 작정이에요.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부캐에 오래 담으려면 부담스러우면 같아요. 필명에 내가 짐을 느끼면 같아요. 






<젊은 ADHD의 슬픔>이라는 책을 여러 번째 읽고 있어요. 

성인 ADHD 판정을 받은 저자는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그 증상의 일부인 충동성과 중독성 등으로 고통받아요. 세상으로부터는 그보다 더 아프게 상처받죠.

그런데 그녀가 지난날을 고백하고 돌아보는 지금의 태도가 인상적이에요. 자신의 부족하고 지나침을 후회하거나 애써 소거하려 하는 대신 자기 그대로를 인정하는 모습이라서요. 


꽃밭을 복원하고 싶은 생각도 꽃처럼 살고 싶은 생각도 없기에 잡초가 무성한 지금의 내면도 괜찮다. 덧붙여 이왕 잡초라면 클로버가 가득하길 바라게 되었다. 술 없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네 잎클로버를 찾는 여정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 60p.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 책 곳곳에서 묻어나요. 억지 긍정이 아니어서 편해요. 내가 저자처럼 어떤 상처나 아픔이 있음을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ADHD 여부와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해당할 거예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일이 결코 당연하거나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거요. 

어쩌면 나은 내가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어려울 걸요?


'문박사'를 작명하며 부여한 의미에서 '되기를 바람'만 빼보았어요. 필명에 지운 부담을 덜어버려는 작업이었지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거 많은 나

장벽을 먼저 보기보다 일단 부딪쳐보는 나

그래서 이것저것 하는 나

.

.

의심보다 믿음이 더 큰 나

그래서 호구되곤 하는 나

세상이 살 만하다고 생각하는 나

한 번 사는 인생 가치 있게 살고 싶은 나

물욕 없는 나

경제관념도 없는 나

쉽게 만족하는 나

그러나 기호가 확실한 나

날씨의 노예인 나

도덕에 민감한 나

나쁜 사람 못 견디는 나

고소공포증 있는 나

끈기 없는데 끈기 있는 나

잘 우는 나

잘 웃는 나

바보 같은 나

.

.


(지면 관계상 이 정도로 줄이겠습니다.)

나열하다 보니 혼자 신나서 난리부르스네요. 필명 문박사에 부여한 의미에서 '바람'이라는 부담만 덜겠다는처음의 취지는 점점 무색해졌고요. 그나저나 이렇게 많은 나의 모습이 있다는 흥미롭게 느껴져요. 그걸 스스로 찾는 것도 재미가 있네요. 


그래요.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아... 요. 

다만 '너무도 많다' 대신 '무척 많다'라고 말할래요. 많은 내가 내 안에 복닥거리고 있는 게 싫지 않아서요. 못난 나도, 가끔은 괜찮은 나도, 한데 모여 있으니 그런대로 봐줄 만해지지 않을까요. 이런 나도 저런 나도, 나니까, 그대로 바라봐주고 싶어요.

많은 '나'들을요.


후.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아요. 



p.s. 놀라지 마세요. 문박사 어디 안 갔어요. 많은 나들 중 어디에 있겠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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