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장사치들의 상술인 줄 알면서도 이맘때쯤 거리에 널려있는 빼빼로를 보면 마음이 뭉근해지곤 한다. 상술이라도 주고받는 이의 마음에 행복을 심어줄 수 있다면 상관없지 않을까. 한편 기왕 상술로 탄생한 기념일, 소비자들이 조금 더 긍정적인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동월 동일을 농업인의 날, 일명 가래떡 데이로 명명하고 홍보한 지 오래지만 아직 갈 길이 요원해 보인다. 크리스마스나 다른 기타 기념일도 그렇지만 역시 연인 간의 사랑만큼 직관적인 무기는 없다. 그러나 사랑에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다. 누구나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영원한 건 없다는 사실만이 영원할 뿐이다. 얼마 전 내게서도 또 한 번의 사랑이 갔으니 진심을 가득 담아 사랑과 이별, 술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 요량이다.
사랑과 이별에 관한 대중가요를 찾기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와 비슷하다. 아니, 그보다 수 배는 수월하니 누워서 떡 먹기라고 표현해야 할까. 대중가요, 특히 발라드의 문법 자체가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말하는데 탁월하기에 사랑과 이별은 단골 소재였다.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클래식 넘버는 역시 the carpenters의 ‘close to you‘, 한국에서라면 변진섭의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이 적절하다. close to you는 하늘의 새들과 별들, 어린 소녀들이 ‘나처럼’ 늘 당신 가까이 머물고 싶어 한다라는 수줍지만 직설적인 고백이 카렌 카펜터의 미려한 목소리와 잘 어우러진다. 신승훈-성시경으로 이어지는 발라드의 계보에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변진섭의 노랫 속의 화자도 줄 수 있는 게 사랑뿐이 없으니 얼마나 아쉬웠을까. 노래의 전체적이 분위기를 보면 아직 이루어진 사랑이 분명 아니다. 짝사랑 중인데 줄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러기에 아쉬움이 더욱 절절하여 괜히 날아가는 새들과 불어오는 바람에 ‘왜’라며 딴지 걸고 있는 모습이 심히 공감이 간다. 그 외에도 모던쥬스의 ‘사랑을 시작해도 될까요’나 옥상달빛이 부르고 하상욱이 쓴 ‘좋은 생각이 났어. 니 생각’도 사랑에 빠졌을 때 들으면 좋을 트랙들이다. 단, 아련한 짝사랑엔 해당 안 하니 주의할 것! 혹시 자신이 아련한 짝사랑 중이라면 이소라의 ‘tears’를 권한다. 다시 돌아와서 아직 연인은 되지 못했지만 사랑에 빠져서 행복한 설렘을 느낄 이맘때쯤 두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술은 운곡도가의 ‘토끼구름’ 막걸리와 두루미 양조장의 ‘대관람차’ 막걸리다. 두 술 모두 호불호 없이 좋아할 만한 맛으로 결코 자극적이지 않으며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단 맛의 술이다. 비슷한 맛의 술은 많지만 운곡도가의 ‘토끼구름’은 라벨이 가장 이쁘고, 두루미양조장의 대관람차는 컨셉부터가 소중한 사람과의 행복한 추억이니 시의적절하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 모두에게 사랑의 행복이 찾아왔다면 사실 노래나 술은 아무 상관이 없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이 곧 노래고 사랑에 취할 테니까 말이다. 김현철의 ‘연애’도 유치 찬란한 사랑의 행복을 직설적으로 노래하는 명곡이지만, 그래도 이 분야에서 권위자는 볼빨간사춘기가 아닐까. ‘우주를 줄게’, ‘처음부터 너와 나’, ‘초콜릿’, ‘심술’, ‘별 보러 갈래’ 등 듣기만 해도 연애하는 기분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달달한 노래들을 많이 남겼다.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가사도 가사지만 보컬 안지영의 기교 없이 담백하고 귀여운 목소리와 단순한 멜로디의 어우러짐이 대단하다. 두 사람이 연애할 때 마시면 좋은 술이란 건 사실 없다. 상기했던 대로 사랑에 취한 상태니까, 그래도 11일 같은 기념일에 마시면 좋은 술을 몇 개 꼽아본다면 충북 영동 오드린의 ‘설레임’이나 ‘아내를 위한’이 이름도 그렇고 가벼우면서도 산뜻하고 향기까지 적절하다. 구름아 양조장의 ‘유자가’나 녹동 양조장의 ‘고유’ 역시 달달 상큼한 유자의 맛과 향을 잘 살린 명주인 데다가 두 술 모두 라벨까지 이쁘다. 단 ‘유자가’의 경우 구하기 쉽지 않으니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물론 우리 술이 아니더라도 샴페인이나 스푸만테, 귀부와인 등 역시 기호와 가격대에 맞춰 고르는 것을 추천한다.
달콤한 사랑의 순간이 지나가면 결국 이별이 오기 마련이다. 정인의 ‘미워요’나 알리의 ‘365일’처럼 격정적인 이별노래들도 순간 듣기 좋으나 사랑의 비극을 논하면서 역시 이소라를 빼놓을 수 없다. 데뷔 앨범의 ‘난 행복해’, 2집의 ‘너무 다른 널 보면서’, ‘기억해줘’, 3집의 ‘믿음’과 빛과소금의 곡을 다시 부른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김태원이 곡을 써주고 이소라가 섬뜩한 노랫말을 붙여서 유명한 ‘curse’, 4집의 ‘제발’과 ‘amen’, 5집의 ‘안녕’과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6집의 ‘바람이 분다’와 ‘이제 그만’, ‘봄’과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초기의 이별노래들에 비한다면 ‘바람이 분다’를 통해 이소라는 이별의 처절한 슬픔에서 한 걸음 떨어져 관조적으로 감정을 바라본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있다’라는 담담한 현실 인식은 이소라가 오른 경지이며 이는 공감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감정을 꾹꾹 담아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부르던 이소라의 사색과 삶의 성찰은 제목도 없이 트랙 넘버로 명명된 7집에서 마침내 개화했다. 그녀의 7집은 대중가요가 철학의 경지에 오른 순간의 포착이다. 지금까지 팬심이 가득 들어가긴 했지만 한국 이별 노래의 전당에 왕좌가 있다면 ‘바람이 분다’ 한 곡만으로도 왕좌는 그녀의 차지다.
글을 쓰며 돌이켜보니 내 사랑의 역사는 볼빨간사춘기보다는 이소라로 가득했다. 아니, 사랑은 볼빨간사춘기로 시작해서 이소라로 끝났다. 얼마나 나이를 먹어야 사랑이 쉬워질지, 쉬워지긴 할지 모르겠다. 쉬워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게 될까. 숱한 이별을 하고도 얼마 전 또 한 번의 사랑을 보낸 내 경우에 비추어 볼 때 이별에 어울리는 노래는 많다. 하지만 이별에 어울리는 술은 없다. 마시고 취할 수만 있다면 제 아무리 조악한 독주라도 마다할까. 단 취하고 다음 날 이불킥할만한 실수는 반드시 조심하자. 내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