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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경훈 Oct 06. 2022

문경훈의 음주동행(音酒同行) 17

꽃이라 술잔이라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T.S. 엘리엇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황무지’라는 시제는 더더욱 몰라도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첫 구절만큼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기운이 만연한 4월이 왜 잔인한 달인지, 한국에서 왜 이리 많이 회자되는지 시를 지은 엘리엇도 몰랐겠지만 4·3부터 4·16까지 한국 현대사의 비극들은 4월을 정말로 잔인한 달로 만들었다. 꼭 특정 사건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4월은 서글픈 계절이다. 나른한 햇살은 옛날부터 나를 슬프게 했다. 지는 해를 바라볼 때의 기분을 나는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보며 느낀다. 4월은 항상 그런 햇빛이 비추는 계절이다. 피어나는 꽃과 새싹들, 거리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속에 슬퍼지는 나를 보며 스스로 비극의 주인공이 된 듯이 여기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사람이 나뿐은 아니었는지 밴드 브로콜리너마저는 ‘잔인한 사월’에서 4월에 느끼는 슬픔을 특유의 담담함으로 풀어냈다. 봄빛은 푸른 데 갈 곳이 없는 아이들, 그치만 가슴 설레기엔 나이를 먹은 나,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지금의 나에겐 잔인한 계절, 4월이 깊어만 가는 것이다. 4월의 슬픔을 찾기 위해 조금 더 시계를 뒤로 돌린다면 이문세 5집 수록곡인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 있다. 이영훈 작사·작곡의 이 노래는 노랫말을 통해 직접적으로 계절을 말하진 않지만 ‘라일락 꽃 향기를’ 맡아야 하기에 4월에서 5월을 배경으로 쓰였다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다. 또 전주의 경쾌한 멜로디는 누구에게나 쉽게 생명이 기지개를 켜는 봄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발라드의 문법을 충실히 따라가는 가사 속에는 떠나간 사랑에 대한 슬픔이 아련히 더해진다. 이윽고 노랫말은 봄의 설렘과 대비되어 더욱더 나른한 슬픔으로 청자에게 다가온다.


  4월이면 아직 오지 않은 봄이지만 그래도 봄날을 보내는 동명의 두 곡이 떠오른다. 제목은 ‘봄날은 간다’니까 봄의 끝자락에 어울릴 듯 하지만 봄의 끝은 곧 여름이라 오히려 초봄에 들어야 더 맛(?)이 난다. 박시춘이 곡을 쓰고 손로원이 가사를 붙였으며 백설희가 54년 발표한 ‘봄날은 간다’는 봄의 슬픔을 표현한 클래식이다.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장사익 등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음악 방송이나 드라마에서 심심찮게 불리는 노래다. 2009년에는 현역 시인 100인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 1위에도 랭크되었던 이 노래는 이별, 어쩌면 속절없는 세월의 흘러감을 절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시간이 흐른  2001년에는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가 세상에 나왔고 역시나 동명의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이 영화의 엔딩곡으로 가수 김윤아에 의해 불려졌다. 일본의 마츠토야 유미가 곡을 쓰고 김윤아가 노랫말을 붙인 이 노래는 김윤아의 청아한, 서정적인 보컬과 나른하면서도 슬픈 멜로디. 그리고 ‘아름다와서 너무나 슬픈’ 봄날의 역설을 잘 표현했다.


  김지하의 시에 황난주가 곡을 붙이고, 김광석의 목소리로 세상에 알려진 ‘회귀’는 김광석의 노래 중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필자가 가장 애청하는 노래다. 가장 아름답게 피었다가 가장 추하게 지기에 아름다운 목련의 모습을 세월의 덧없음으로 그려냈다. 누구보다 추하게 져버린 목련꽃을 보며 느끼는 비장미를 시인 복효근은 ‘목련후기’에서 우리의 사랑도 그렇지 않냐며 변명해주었다. 아니, 사랑을 목련의 모습으로 감싸주었는지도 모른다. 


  ‘봄이라 바람이라, 이 내 몸에는 꽃이라 술잔이라 하며 우노라.’ 김소월은 시 ‘바람과 봄’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술꾼들에게 술 마시기 좋지 않은 계절이 어딨겠느냐만 봄은 따듯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화사한 아름다움과 나른한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으니 술과 함께하기 좋은 최고의 계절이다. 원래 술꾼들은 기쁘면 기뻐서 술을 마시고 슬프면 슬퍼서 술을 마시는데, 봄엔 그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진달래를 이용한 두견주는 진달래의 향이 특별히 강하거나 맛이 느껴지진 않지만 달콤함과 무엇보다 그 정취가 각별한 것이고, 쑥을 이용한 애주는 쑥의 씁쓰레함과 술의 단맛이 합쳐져 봄의 흥취를 물씬 느끼게 해 준다. 하지만 특별한 술을 마시기보다는 김소월의 노래처럼 술잔에 술 찰랑 받아놓고 꽃잎 하나 띄워놓고 마시기를 나는 더 사랑했다. 봄꽃을 이용한 술이 생각보다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역시 그만한 낭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설명할 수 없는 슬픔에 술을 한 잔, 두 잔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술에 취하고 봄기운에 취하고 그야말로 ‘이 내 몸에 꽃이라 술잔이라하며’ 울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봄에 관한 노래도, 술에 관한 노래도, 꽃에 관한 노래도 아니다.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뿐’을 조용히 불러본다. 2016년 4월 세상을 떠난 대학 동기를 생각해본다.



브로콜리너마저의 ‘잔인한 사월’은 2009년 4월에 발표된 데모앨범 수록곡이며, 이후 2012년 히트 앨범을 통해 다시 소개되었다. 가사도 분위기도 잔인한 달에 가장 걸맞은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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