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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경훈 Oct 03. 2022

문경훈의 음주동행(音酒同行) 16

비와 술잔 사이

  술 마시기 가장 좋은 계절은 언제일까. 주당에게 사계절 어느 달이 술 마시기 안 좋겠냐마는 선호하는 계절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엘라 피츠제럴드와 옐로우 테일’ 편에도 이야기한 바 있는 그 사람은 술 마시기엔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해가 떠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8시까지 마셔도 아직 해가 안 진다는 이유였다. 개인적으로는 겨울을 가장 좋아한다. 겨울엔 얼굴이 불콰해질 때까지 잔뜩 술을 들이켜고 밖에 나왔을 때 피부에 와닿는 차가운 공기가 주는 기쁨이 있고, 추위에 잔뜩 움츠러든 몸을 이끌고 주점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취객들의 훈기 그리고 데운 사케 한 모금이 주는 따스함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꽃 피는 봄에 살랑이는 봄바람을 맞으며 야외에서 마시는 탁주는 꿀맛이고 낙엽 지는 가을 우수에 젖어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은 천금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치맥의 계절이라고 찬양하는 여름은 좀 힘들다. 땀 흘리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너무 더워 쉽게 열감이 오르기 때문에 오히려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질 정도다.


  다만 비 오는 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비가 오는 날엔 내 의지완 상관없이 그 어떤 날보다 술 생각이 간절해진다. 실내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술도 좋지만 밖에 나가 파라솔 밑이나 처마 밑에서 마실 때 술맛을 따라오지 못한다. 갓 스물이 됐던 여름 장마였다. 편의점 벤치에 앉아 굳이 비를 맞아가며 술을 마셨다. 비록 캔맥주와 과자 몇 개가 전부였지만 즐거웠다. 멀리서 찾아온 친구와 온수역 앞 고깃집 야외테이블에 앉아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느끼며 마셨던 소주의 맛은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단지 비가 내린다는 이유로 마신 술이 몇 잔이던가. ‘비도 오는데 오늘 한잔...?’은 단언컨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는 야장에 소주 한 병과 계란후라이, 구운 스팸이 놓여있고 친구가 날 기다리고 있다면, 난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처럼 두 세시간 전부터는 행복할 것이다. 때마침 사장님의 선곡 센스가 십분 발휘되어 스피커에서 지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빛과 소금의 ‘그대 떠난 뒤’라도 흘러나온다면, 그날은 멀쩡하게 집에 돌아가기는 그른 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피커가 조금 지지직거리며 좋지 않아야 한다는 데 있다. 생각해보라. 비 내리는 오후 세시쯤, 허름한 가게 야외테이블에서 조촐한 안주와 술 한병 그리고 빗소리와 어우러지는 음악을. 이럴 때 좋은 스피커에서 선명하고 깔끔하게 음악이 흘러나온다면 소위 그 ‘맛’이 안 난다. 물론 선곡 센스도 중요하다. 가령 좀 전에 이야기한 빛과 소금의 ‘그대 떠난 뒤’는 평소에도 이론의 여지없이 훌륭한 노래지만 비가 오는 날엔 멋이 배가 된다. 윤형주의 ‘어제 내린 비’나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가려진 미성 사이로 저며오는 절절한 아픔이 있어 좋고, 송창식, 윤형주, 이수미, 정훈희 등이 불렀던 이장희의 ‘비의 나그네’는 묵직하면서도 처연한 아픔이 있어 좋다. 박인수의 ‘봄비’도 훌륭하지만 지금은 여름비에 관한 이야기니까 일단 논외로 하고, 78년 제2회 대학가요제에서 직접 피아노를 치며 트로트를 불러 충격을 주었던 심민경, 그러니까 심수봉의 ‘그 때 그 사람’은 당시 입상엔 실패했지만 그 가사대로 ‘비가 오면 생각나는’ 노래가 되었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구슬프면서도 애절한 그녀의 목소리는 트롯의 고급진 차별화를 이뤄냈으며 요즘 범람하는 소위 뽕짝과는 결이 다르다. 


  요즘 젊은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프로젝트 그룹 배따라기의 ‘비와 찻잔 사이’나 ‘그대 작은 화분에 비가 내리네’는 필자가 비 오는 날이면 꼭 재생하는 음악으로 말이 필요 없는 포크의 명곡들이다. 아직 배따라기를 모르는 젊은 친구들에게 필청을 권하고 싶다. 젊은 세대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전설의 그룹사운드 산울림의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도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곡으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김창완의 창법은 말로 표현하기 참 어려운데, 감정에 초연하여 무심한 듯하면서도 감정적이고 아이같이 마냥 밝으면서도 성인의 희로애락이 공존해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마냥 사람 좋은 아저씨 역을 맡거나 정반대로 악역 역시 자주 맡는 것도 같은 맥락인 듯하다. 들국화와 산울림의 계보를 이어 80년대 중반 락의 열풍을 이끈 부활의 1집 수록곡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도입부와 간주를 수놓는 김태원 특유의 먹먹한 톤의 기타 사운드, 대중적인 멜로디와 후반부의 절창 그리고 이승철의 미성과 김태원의 그로울링 가득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언제 들어도 가슴을 후벼 파는 훌륭한 곡이다. 명곡들로 수놓아진 이문세 3집의 ‘빗속에서’는 블루지한 발라드 넘버로 그 자체로도 훌륭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후에 신촌블루스가 커버하여 발표한 ‘바람인가, 빗속에서’를 더 좋아하는데, 엄인호의 기타와 김현식의 목소리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또 90년대 레게의 인기를 이어간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도 들어봄직하다. 노랫말이 한 편의 이야기같이 전개되는데 후반부에 이어지는 수화기를 사이에 둔 여자 친구의 목소리, 마침내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남성의 이야기는 누구든 이 노래에 쉽게 빠져들게 만든다.


  연일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몸도 마음도 찌푸둥하고 괜시리 울적하지만 비와 술잔을 사이에 두고 음악으로 귀를 적신다면 지루한 장마도 금방 지나가지 않을까. 본문에서는 90년대 이후의 곡들은 거의 소개하지 않았으니 비 오는 날 나만의 필청 트랙을 상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배따라기 2집. 배따라기의 이혜민은 김흥국의 ‘호랑나비’의 작사, 작곡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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