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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경훈 Dec 13. 2022

[문경훈의 역사이야기] 소현세자는 정말 독살되었나 1

영화 '올빼미'를 보고

  얼마 전 '남한산성' 이후 오랜만에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간 사극에서 주로 미천한(?) 역할을 도맡았던 배우 유해진씨의 첫 왕 연기도 궁금했지만, 인조와 소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다룬-이 미스테리는 역시나 뻔하지만-스릴러 사극이라는 점 역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2010년 드라마 '추노'나 2013년의 '꽃들의 전쟁'이 이 시대를 배경으로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보여주긴 했지만 영화로는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완성도나 만듦새는 제 짧은 식견으로 논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역사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직업병일까요, 이 영화를 보고 '선생님 이게 사실이에요?' '정말 인조가 아들을 독살했나요?'라고 물을 학생들이 그려졌습니다. 사실 인조의 소현세자 독살설은 몇몇 역사학자들의 입에서도 흘러나와 온라인 공간은 물론 대중교양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에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실려있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저조차도 수업시간에 소현세자에 관한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소현세자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글이자 그간 제 역할을 못 했던 게으름에 대한 질책입니다. 모자란 지식으로 쓴 졸렬한 글이지만 부디 우리 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1. 반정을 통한 인조의 즉위


  아버지인 인조의 이야기부터 한 번 살펴 볼까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 시대 특수한 상황으로 왕위가 교체된 경우는 세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영화 '관상'으로도 유명한 1453년의 계유정난입니다. 세종의 차남이었던 수양대군이 당시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단종이 바로 폐위되지는 않았지만 2년 뒤에 '선양'이라는 형식을 통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니 이가 바로 세조입니다. 이때 단종은 상왕이 되었지만 곧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결국은 사사되고 말았습니다. 계유정난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1506년의 중종반정과 오늘 다룰 1623년의 인조반정입니다.  반정(反正)은 바르게 되돌린다는 의미죠. 새 왕조를 개창하는 역성혁명의 경우 선양이나 추대, 방벌(放伐) 등의 형식이 가능했습니다만(조선왕조의 개창 과정을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왕조를 유지한 채 새 국왕을 세울 때에는 새로운 논리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이유를 들어 현 왕을 '폐출'하고 새 국왕을 세우는 것으로 '바르게 되돌리는(반정)' 형식이 등장한 것이죠. 뒤에 서술하겠지만 반정이라는 사건 자체가 국왕들, 특히 반정으로 왕이 된 당사자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일단 인조반정의 전개과정부터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국왕을 바꿀만한 이유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아니 무슨 이유를 들어야 국왕을 교체하는 데 그럴듯한 명분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이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명분과 지지라는 문제도 있지만 저 멀리 명국의 고명·인신이라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명·인신이란 쉽게 말해서 조공국이었던 조선이 사대국이었던 명국에게 왕을 교체한 이유를 말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때 명분이 약하면 명국이 트집을 잡아 국왕의 즉위를 인정 안 해줄 수가 있죠.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여러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왕을 교체할 만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바로 '망국(亡國)'입니다. 국왕이 보통 자리도 아니고 나라가 망할 정도는 되어야 교체할 수 있었습니다. 중종반정 당시 가장 큰 명분은 '연산군이 어둡고 포악하여 종묘 사직이 위태롭게 됐다'는 것이며 인조반정 때도 신하들이 '종묘 사직의 위망을 걱정하고 인륜의 무너짐을 두려워하여'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송시열도 '사람의 도가 망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는데 하늘의 명령을 받을 사람이 있을까'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새롭게 찾을 것도 없는 게 조선을 개창할 때의 명분 역시 비슷했고 결국 역성혁명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즉, 왕들은 언제나 반정·역성혁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됐다는 말입니다. 인조반정 10년 후 사헌부 장령 강학년은 다음과 같이 고했는데요.


전하께서는 스스로 총명한 척하며 한결같이 간언 막기만을 힘쓰시니, 이것이 덕이 많은 일이 아님은 전하 스스로 아실 것입니다. 옛날 혼란함으로 엎어진 자들과 거의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인데, 신은 그 종말이 어떨지 모를 따름입니다. -인조실록 12년 11월 을묘조-


  당시 이 상소를 읽고 인조가 느꼈을 감정이 조금은 짐작이 될런지요. 조선의 선비들은 평시에는 왕실을 위해 목숨을 다할 충의지사들이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충의가 '망국'을 명분으로 한 역성혁명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습니다.


 - 다음에 계속. 참고문헌은 말미에 한 번에 적어두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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