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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비 Oct 31. 2020

성적 트라우마가 현재까지 미치는 영향

201030 정신과 내원 기록



이리저리 병원을 옮겨 다닌 이후로 이번에 정착한 병원에서 처음으로 길게 진료를 받은 날이었다. 여태 다녔던 병원에서 10분 이상 진료를 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친절하진 않지만 툭툭 뱉는 말투로 여러 가지 물어보시느라 15분이라는 진료 시간이 걸렸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책을 보고 나서 내원 기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은 다닌 지 3년이 되었고 (중간에 쉬긴 했지만), 심리 상담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받았는데 중간에 에세이로 기록한 건 있지만 자세한 내용들이 휘발되기 마련이었다. 이제는 기록하면서 나를 위해 되새기기도 하고, 남을 위해 나눠주기도 하려고 한다.




사람들에게 '정신과'는 좋은 인식은 아니다. 나처럼 지독히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다닌다는 것. 우리가 모르는 사이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도 각 개인만의 상처가 있고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 정신과는 이상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모두의 상처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곳이라는 것. 나의 글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인식이 바뀌었으면 한다.




진료나 상담 자체가 아주 개인적이고 비밀스럽지만 이 과정이 나의 자산이 되리라고 믿으며.







이번 진료는 매우 아프고도 슬픈 시간이었다. 아픈 과거를 되새긴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으니. 선생님은 진료 전 심리검사 결과를 보고 아주 민망하고 조심스러운 이야기들도 툭툭 물어보셨다. 오히려 감정을 섞어서 말하면 내가 요동칠까 봐 그러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진료를 마치고 집에 와서 녹취록을 작성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 일 아니란 듯이 묻는 선생님도, 그렇게 대답하는 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하도 과거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다 보니 이렇게 됐나 싶기도 했다. 아직 나의 감정에 대해 충분한 공감과 애도를 해주지 못한 것 같으면서도 괜찮아져서 이랬던 건가 싶어서 혼란스러웠다.








심리 검사지에 다양한 내용을 작성했지만 선생님은 성적 트라우마에 초점을 맞추셨다. 가족의 이야기도 있고 남편과의 문제도 있고 내 삶에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왜 꼭 그것을 짚어서 질문을 하셨을까 의문도 들었다. 어쩌면 들키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짚어서 물어보시는 게 불편한 마음이 들어 이런 의구심을 가졌나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현재까지 이어지는 불안의 증상이 예전의 트라우마 때문이라 생각하셔서 그것에 집중하신 것 같다. 계속 진료받다 보면 알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자 한다.








나 : 선생님, 진료 내용을 정리하고 싶은데 녹취를 해도 괜찮을까요?


선생님 : 네, 괜찮습니다. 어땠어요?


나 : 3주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선생님 : 어떤 것 때문에?


나 :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약을 먹기 전에 한창 다이어트 중이었거든요. 그러면서 식욕 조절도 아님 막 일상 패턴 같은 것도 조절을 되게 잘했었는데 잠도 관리가 안 되고 식욕이 완전 폭발했어요. 그래서 폭식하고 싶은 마음도 계속 들었고 스트레스도 자주 차올라서 자해 욕구도 좀 들었었고 우울감도 심하고 무기력감도 되게 심하고 정좌불능이라고 하죠? 그 증상이 되게 심해서 일에 집중하기가 되게 힘들었어요.


선생님 : 본인이 이전 선생님한테 다닌 것은 공황장애 때문에 다녔던 건가요?


나 : 공황장애, 불안장애가 다 있어서 다녔었죠.


선생님 : 이 약을 먹으셨을 때 좀 편하셨어요?


나 : 아니요, 그때도 정좌불능이 너무 심하긴 했었는데 그때 약간 약을 제가 술 먹는 날은 안 먹었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큰 효과를 못 봤던 것 같아요.




선생님 : 성적 트라우마 겪은 건 언제예요?


나 : 어, 중학교 때부터요.


선생님 : 한 번 여러 번?


나 : 여러 번이요.


선생님 : 그럼 이런 반복적인 경험이 나에게 준 영향은? 성에 대해서 극도의 거부감이 생겼어요? 아니면 더 하게 됐어요?


나 : 왜곡되게, 좀 나를 망치는 수단으로 썼었었죠.




선생님 : 그런 부분에 대해서 상담할 때 선생님이 뭐라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나 : 그게 제가 저를 자책하고 자기혐오하는 성향이 너무 심했던지라 그걸 없애는데 주력을 했었어요.


선생님 : 그럼 어떻게 자책을 안 하고 어떻게 자기혐오를 안 하게 됐죠?


나 : 제가 선택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그 자라온 환경과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하고 좀 많이, 그 말 자체만으로도 되게 좀 많이 나아졌어요.


선생님 : 그러니까 옛날에 이런 강간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지금은 성폭행이라고만 바꿨잖아요. 가장 큰 거는 이게 내가 잘못해서 그 일이 벌어진 건 아니다. 가해자가 잘못한 거다. 이거는 이게 내가 이 그 경험이 나의 어떤 성 정체성이라든지 순결이라든지 더럽혀졌다든지 이런 게 아니고 난 폭행의 피해자다 이 두 가지가 가장 핵심이거든요.


근데 문제는 거기에 그런 걸 트라우마를 경험을 했었을 때 나를 품어주거나 나를 다독거려주거나 나를 지켜줄 사람이 있었냐, 나를 혼자서 계속 해왔냐. 이걸 혼자서 해왔기 때문에 거기서 생기는 좌절감, 공포, 내 인생의 이런 걸 포기 이런 감정들이 나를 하게 되고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런 감정들이 조절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자해라든지, 뭐 폭식이라든지, 나를 망가뜨리는 수단으로써, 그런 식으로 본인이 적응을 해왔을 거예요. 근데 아직까지 폭식이라든지 자해라든지 등은 남아있는 거죠. 그 부분을 뭘로 극복할 거냐는 거죠. 그 극복에 가장 많이 종교적인 힘. 그 힘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그만큼 힘이…




선생님 : 몸을 조금 많이 움직여서 생각을 덜하게 하는 것. 이게 내 부정적 감정이기 때문에 활동하기 좀 어렵거든요. 그런데 운동을 하게 되면 이게 몸이 힘들어지면 생각이 줄어들어요. 그러니까 그냥 내가 기운이 없어도 있는 상태에서 과거의 잡념이 자꾸 떠오르는데 내가 활동을 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게 그 순간은 그 생각들이 걸러져요. 그런 게 있고 운동은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 돼요. 구기운동이 좋으면 구기운동을 하면 되고, 헬스가 좋으면 헬스, 에어로빅이면 에어로빅, 스트레칭이면 스트레칭, 요가면 요가.


두 번째는 내가 몰입할 수 있는 거. 뭘 그리거나 만들거나 조립하거나 이런 것들 이런 활동 조금. 내가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는 쪽으로. 나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감정의 힘이 워낙 세기 때문에 그걸 내가 완전히 품고 다독거려서 조절하기가 쉽지 않아요. 근데 내가 다른 활동하면 얘가 나의 시선 쓸게 뒤로 물러나요. 이런 게 다른 활동하는 게 커지거든요. 요기에서 나한테 주는 영향이 좀 덜하는. 그런 과정이 있을 수 있죠.


그리고 폭식이나 이런 건 처음에는 스트레스 때문에 시작됐는데 지금은 습관 아니겠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진료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약을 좀 바꾸죠. 우리가 지금 공황보다는 폭식 좀 줄이고 불안 좀 줄이고 마음의 안정을 시키는 게 우선일 것 같으니까 마음은 점심 저녁 자기 전 3번 하면서 약간 졸리더라도 약을 좀 보도록 할게요.




선생님 : 잠은 잘 자요?


나 : 어, 약을 먹고 자니까 잘 자고요. 약을 안 먹으면 좀 잘 자기 힘들어요.


선생님 : 앞으로 약은 계속해서 조금씩 올려 나갈 겁니다.


나 : 네, 장기적으로 먹어야 될까요? 제 상태가?


선생님 : 장기적으로 약을 먹는 것보다는 어 선생님 이제는 많이 좀 좋아져서 줄여도 될 것 같아요.


나 : 그게 딱 느낌이 와요?


선생님 : 그럼요. 좋아졌으니까. 아직은 그 트라우마에서 있는데 본인 트라우마에서 좀 봐야 될 것 중에 하나가 성적 트라우마도 트라우마지만 이제 그 사춘기 때 그거를 어떻게 극복했느냐. 엄마 없이 또래의 친구 관계에서 어떻게 반복했느냐. 이런 부분에 훨씬 더 보면. 어쩌면 그거를 본인이 이제 채우기 위해서 주변에 많이 의지를 했던 거죠. 그러면서 결과는 또 안 좋은 결과가 발생하고. 당분간은 꼭 일주일에 한 번씩 오세요.




나 : 그러면 제가 사실 이번 동안 힘들었던 게 꼭 약의 영향만은 아니고 그냥 잠재되어 있던 불안들 때문에 일어났던 걸까요? 특히 너무 힘들었어가지고.


선생님 : 그거를 좌불안증이랑 우울증에 의해서 생긴 안절부절이랑 정확하게 구분하긴 힘든데 좌불안증 생기는 약들은 있어요. 본인 먹었던 약에서 약 하나 좌불안증 생길 수 있는 약이 있는데 거의 또 안 생기는 약이에요. 좌불안증보다 안절부절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좀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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