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차 유학생의 중국 적응기
나의 고3 시절은 정말로 지옥스러웠다. 고3 시절이 힘들고 고된 시간인 것이 물론 나뿐만 이겠냐만은 고3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절대 돌아가기 싫다. 나의 고3 시절의 하루 일과는 이랬다. 아침 7시 기상, 8시 등교, 6시 하교, 8시부터 12시 과외, 12시부터 자습 3시 취침 , 이런 패턴으로 고3 시절 내내 보냈다. 가끔은 과거의 힘든 시절을 떠올리면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었구나 하는 과거에 대한 미화 때문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나의 고3 삼 시절은 다시는 나에게 없었으면 하는 시간이다.
나의 이런 일과는 홈스테이에 있는 학교 고문겸 원장 혹은 이모라고 불리는 원장 이모가 짜 놓았다. 원장 이모는 원대한 꿈이 있었는데 나를 3대 학교에 보내고 싶어 했다. 그동안 자신의 집을 거쳐간 수많은 한국인들을 한해도 빼놓지 않고 북경대 청화대 인민대를 척척 보내어 주위 사람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작년에 아무도 그 학교들에 합격하지 못하여 자존심이 나름 상했던 경우였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계산도 있었다. 물론 나도 그 계산을 이용하여 여기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되는 서로 윈윈 하는 그런 관계였다.
원장 이모는 스파르다식 교육을 추구하는 그런 분이셨는데 자신이 짜 놓은 대로만 잘 맞추어하면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교육법에 나름의 철학이 있었고 자부심이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짜 놓은 스케줄 중 유독 내가 흥미롭게 공부하던 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자습시간과 역사 과외 시간이었다.
왜 이 시간들이 특별했냐고 물어본다면 나와 항상 함께하는 '꾸이'라고 불리는 27세 조선족 선생님 겸 나의 공부 메이트가 있었다. 꾸이를 소개하자면 실제 이름은 따로 있지만 그녀의 성(姓)이 꾸이(桂)라고 중국어로 불려서 기존 아이들이 그 성을 따서 그렇게 부르길래 나 역시 그렇게 불렀다.
꾸이는 이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아이들의 학습 선생님을 맡고 있었으며 원장 이모의 통역과 비서일 등 홈스테이 잡 무을 맡고 있었다. 이런 꾸이는 중국어는 물론 유창한 한국말을 할 줄 알았고 특히 역사에 대한 지식이 많아 우리들의 역사 수업 과외까지 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순수하고 바른 성격의 꾸이 , 선생님이라고 존대하기보다는 편한 누나 혹은 친구처럼 편하게 이야기하고 지냈다.
솔직히 나는 처음에 그녀와 친해질지 몰랐다. 하지만 같이 공부하게 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나와 친해지게 됐다. 꾸이는 항상 나와 같이 자습을 하곤 했는데 , 내가 학교 숙제나 문제풀이를 할 때, 모르는 한자나 문제가 나오면 별표를 쳐서 학교 선생님이나 과외 선생님께 물어보지 않고 바로 꾸이한테 물어보면 바로 해결이 되었다. 즉 스카이 캐슬에서나 존재할 만한 비서 학습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물론 사전도 찾을 필요 가 없었다 , 영어 콤플렉스가 있어서 영어를 빼고는 있는 모든 과목을 꾸이가 옆에서 도와줬다. 꾸이는 정말이지 모든 걸 할 수 있는 만능형 인간이었다.
어느 날 한창 자습 중에 있었는데 보통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고3이라는 시간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불안하고 초초해진다. 그나마 있었던 자신에 대한 일말의 자신감이 없어지기도 한다. 나 자신에게 왜 공부를 하는가? 중국까지 와서 공부하는 게 맞는가? 나 자신에게 여러 번 질문을 하다가 내 옆에서 공부를 같이 도와주던 꾸이한테 물었다.
나:꾸이, 꾸이는 여기서 몇 년 동안 고3 들이랑 공부하고 같이 밤새고 그러는데 힘들지 않아? 어차피 꾸이가 대학 가는 것도 아니잖아
꾸이:힘들지 힘든데 너네 대학 가는데 보템이 되어야지
나:꾸이 뭐야, 그런 말 말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해줘 , 돈을 많이 주나 이모가?
꾸이:돈은 다른 데랑 비슷한데, 여긴 숙식이 공짜로 되잖아, 베이징이 방값이 얼마나 비싼데, 그리고 나 한국 가는 게 꿈이야, 여기서 몇 년 버티면 이모가 한국으로 초청장 써준다고 했어 그럼 나 한국에 가서 살 수 있어
나: 아 정말? 꾸이는 그냥 한국 가서 살고 싶으면 그냥 가면 안돼? 그냥 돈 모아서 가면 안 돼?
꾸이: 에고 조선족들은 쉽게 갈 수 없어요, 가서 불법체류나 아예 허가 없이 눌러살까 봐 국가에서 허가가 떨어져야 가, 난 한국에 가게 된다면 정말 한국 남자랑 결혼해서 살고 싶어,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 또 경복궁을 제일가고 싶어
나: 경복궁 볼 것도 없는대 모,,,
꾸이:가본 사람이랑 안 가본 사람이랑 어떻게 같아!
요즘은 쉽게 조선족들이 한국을 온다지만 내가 고3이었던 2000년대 후반에는 그게 쉽지 않았나 보다, 꾸이 말로는 조선족들이 중개인을 통해 한국에 오는 경로를 찾는다고 나에게 말한 것을 보면 그렇다. 또 꾸이가 이 힘든 고3의 시간을 별다른 큰 대가 없이 몇 년이나 지도하는 거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 꾸이에겐 그런 꿈이 있다. 중국 길림성 출신의 꾸이... 그녀는 조선족이며 어쩌면 당시 조선족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당시엔 항상 내 곁에서 우리들과 섞여 있어 잘 몰랐지만 꾸이는 중국 소수민족의 역경과 곤경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시대의 사회상과도 같았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어릴 때부터 한족과는 다르게 지낸다고 한다. 일단 언어적인 부분이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인데 밖에서는 중국어를 쓰며 집에 와서는 한국어를 쓴다. 학교에서는 조선족 자치 학교를 다니며 한국어로 수업을 하지만 학교 수업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수능시험에서는 중국 교과서 위주로 출제되는 중국어로 된 시험지로 시험을 친다. 즉 언어부터 이중적인 정체성을 지내며 살아간다.
또한 소수 민족이기 때문에 한족 위주 문화의 중국에서 차별 아닌 차별을 받아 나름의 고충들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밖에서 중국어를 할 때 한족인 몇 명의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듣자마자 “어 조선족 억향이 들려” 하곤 색안경을 낀다. 즉 우리 한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과 같다.
또한 가장 슬픈 현실은 경제적인 부분이다. 조선족들의 집성촌인 길림성이나 흑룡강성에는 경제적 인프라가 별다르게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벌어 고향에 붙이는 것처럼 자신들의 자치구에서 나와 대도시에서 일을 한다. 고향을 떠나 살아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 줄 알기 때문에 나는 이 부분이 가슴이 아프다.
꾸이 역시 베이징으로 와서 우리의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었고 마지막 최종의 꿈은 한국에 입성하는 것이었다. TV매체에서 보이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움,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교육받던 한국에 대한 그리움 등이 하나의 향수가 되어서 조선족들에게 코리안 드림이라는 하나의 구호를 붙여주곤 한다.
또 한편으론 이런 꾸이의 삶이 어느 부분에선 나와 비슷하고 생각했다. 나도 부모님과 한국을 떠나 중국 전문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위해서 이곳에서 버티고 있다. 물론 내 욕심이었지만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고3 때 학교까지 바꿔 텃세까지 당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불안감...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한국에 가서 대접받을 수 있을까? 정말 중국이 세계 1등 국가로 발돋움하여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 대우받는 세상이 올까? 이러한 막역한 불안감이 중국에서 생활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스트레스 잡았다.
꾸이 역시도 그랬을 것이다. 한국에 가면 행복해지겠지? 여기서 몇 년 버티면 한국에 입성할 수 있겠지? 이러한 생각들이 꾸이를 지배했다. 이러한 막연한 기대와 불안이 서로의 감정의 공감이라는 교집합으로 구성되어 나와 꾸이는 점점 친해졌다.
꾸이의 역사수업은 참으로 재밌었다. 중국의 역사란 참으로 복잡하고 다양하다. 수천 년부터 시작된 황하문명을 시작으로 수많은 나라가 전쟁과 통일을 하고 나중엔 서양세력까지 침범하여 중국의 새로운 패러디 다임을 제시한다. 이러한 복잡한 중국 역사를 수능으로 본다는 건 정말 보통일이 아니었다. 중국인들이 보는 정식 수능만큼은 아니어도 그 정도에 버금가는 흐름은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출제되었기 때문에 여간 공부하기가 깐깐한 게 아니었다.
나:꾸이 이건 너무 어렵다. 그냥 통으로 다 외워야 하나?
꾸이: 걱정 마세요 학교 다녀오면 내가 알아서 이해시키게 만들어 놓을게
꾸이는 특유의 손가락을 위로 향하는 제스처를 하며 나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왔고 꾸이는 자신만만하게 나를 거실로 불렀다. 그리곤 자신이 중국 드라마를 편집해서 만든 역사의 흐름이 들어 있는 동영상을 보여주며 나에게 설명했다.
항상 책으로만 딱딱하게 들어왔던 중국 역사 수업이 드라마로 쉽게 배경 설명이 되니 왜 이때 이런 일이 생겼고 저런 일이 있어 왔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고, 이 교육법은 나도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꾸이: 영국에서 이러한 일들이 있어서 청나라 왕조에 아편이 들어왔다 이거야, 알만하지?
나: 아아 이래서 중국이 마약에 대해 그렇게 엄하구나
꾸이: 중국은 이때 아편이 들어와서 청나라를 망하게 하는 도화선이 됐다고 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런 영향들이 있지~ 중국사람들은 과거의 상처를 절대 잊지 않아, 자신들이 세계 최고 인지 알았던 자존심을 밣아버린 사건이니까! 이것도 알아둬 중국 문화중 하나니까
나:응 꾸이
꾸이: 나중에 공부하다 보면 중국어 유창한 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무엇을 알아야 정말 중국을 안다고 할 수 있는지 알아?
나: 중국어랑 중국 인맥?
꾸이: 언어, 인맥, 법 , 부동산, 정치, 역사 , 핫토픽, 인터넷 이 여덟까지를 알아야 진정한 중국통이 되는 거야!!! 넌 아직 멀었어!
꾸이랑 공부를 하다 보면 이러한 잡다한 시사상식까지도 알 수 있는 시간이라 나는 공부를 하면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꾸이는 이런 사람이다. 내가 공부가 하기 좋을 때나 싫을 때 항상 나를 위해 같이 밤을 새워주는 사람, 꾸이가 옆에 있으니 내가 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방학에 한국에 가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대망의 시험날! 시험 당일날 꾸이가 나에게 오이와 삶은 달걀 2개를 건넸다.
꾸이: 한국은 떡이나 엿 먹지? 중국은 오이랑 계란 먹어 오이랑 달걀 두 개면 100점이잖아!!!
나는 불안하고 떨린 마음을 뒤로하고 꾸이와 원장 아줌마 그리고 담임선생님과 함께 시험장으로 향했다. 유학생들의 전용 시험이었기 때문에 직접 그 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았다. 그래서 나를 응원했던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이토록 열심히 공부했던 나는 원하던 대학에 갈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제일가고 싶은 대학엔 가지 못했다. 수학 점수가 너무 나오지 않아서였다. 대체 수학 시간에 자신 있게 풀었는데 시험지가 바뀐 것일까? 아니면 쓸 때 없는 자신감이었나? 그래도 두 번째로 가고 싶었던 대학엔 들어갔다.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의 유학 시간이 끝이 났다. 처음 호그와트로 생각하고 갔던 우시에서의 추억, 거기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 베이징으로 와서 지낸 3년의 시간이 대학교 합격증으로 대체되는 이 씁쓸한 현실이 나에게도 다가온 것이다. 물론 지겨웠던 청소년기가 지났다는 사실에 당시에는 즐거운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또 나에겐 몇 달 후면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사로잡았다.
그리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지겨웠던 중고등학교 때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겠지? 그럼 나는 그 추억을 생각하고 있을 때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대학교 최종 합격소식을 알자마자 그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갔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마지막 청소년 때의 귀국 비행기...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을 만났고 그날 나는 엄마가 만들어준 오디주스를 먹고 새벽에 다 토했다. 긴장이 풀린 건지 일주일 동안을 한국 집에서 들어 누웠다.
추가적으로, 꾸이는 한국에 왔을까? 2014년, 가을 내가 인천 아시안게임 통역을 맡았을 때 나는 세장의 표를 가지고 셀레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향했다. 중국과 어느 팀과의 경기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한국에서 같은 조선족 남자를 만나 예쁜 딸아이를 낳은 꾸이에게 가는 길이였다. 그때 표를 주며 잠시 포옹했던 나와 꾸이... 나의 힘들었던 고3의 기억을 이기게 해 준 중국에서의 또 다른 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