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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떫음 Jul 04. 2023

자아도취

실은 지금 이대로가 제일 좋은 우리

실은 지금 이대로가 제일 좋은 우리.     


“오늘 잠시 다녀간 바닷가에서의 이야기가 이후에도 계속 생각날거야.”

“떫음아 그 얘기를 글로 쓰는 건 어때?”

“무슨 글?”

“그냥 넌 글쓰는 걸 좋아하잖아.”     


가끔은 땅끄진진도 설렁설렁 바람 쐬는 게 필요했다는 걸 그제서야 느낀 둘은 밀물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내 썰물과 함께 각자의 그간 묵힌 여념들을 흘려보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에 묻은 모래들을 털어내며 아마도 그들은 더 단단해져 돌아갔으리라.                    




한창 코로나가 모든 걸 멈춰 세웠을 때 당시, 가장 위태위태하던 나는 자취방을 내버려두고 본가에 잠시 내려와있었다. 그래봤자 별다를건 없었다. 제제는 중학생 시절부터 우리집 바로 아래층에 살던 이웃이었다. 비록 고등학교는 다른 곳으로 진학했지만, 가끔씩 야자를 끝낸 귀갓길에 마주치면 그게 또 그렇게 반가워서 아파트 복도에서 근황을 10분 20분은 떠들다 헤어지곤 했다. 고3 때는 잠깐 마주쳤을 때 서로의 입시 고민과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며칠 후 공모전 대상을 탄 나는 등굣길에 포스트잇에 소식을 짧게 적어 제제네 집 문앞에 붙여두고 가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침 똑같이 본가에 있던 제제와 나는 틈만 나면 만나서 비대면으로 전환된 학교 과제를 하고, 산책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도 해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 당시 나는 외면해오던 내 상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며 공황 발작이 처음으로 왔고,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던 때였다. 코로나가 한창이었지만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원룸에 홀로 지내면서 끊임없이 나와 마주했다. 그래도 최대한 자주 친구들과 연락하고 지냈다. 무더운 여름이 방의 공기를 뜨겁게 달굴 때, 제제와 연락하다 갑자기 바람이나 쐬러 가자, 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우리는 계획을 단번에 짜버리고 잠깐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봤자 21살이었고, 돈도 별로 없었다. 순천과 여수를 2박3일로 갔는데, 커다란 배낭을 메고는 뚜벅이 여행을 시전했다. 당시 바깥 시설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던 상태였으니 집안에서 꾸준히 홈 트레이닝을 따라하는 걸 서로 체크 했었는데, 나는 주로 유튜브 ‘땅끄부부’ 채널을 봤었다. 3일 내내 꽉 채워 하루에 2만보 이상씩 걸어 다니던 우리는 ‘땅끄했다’라고 하며 서로의 이름 끝 글자인 ‘진’을 붙여 우리의 여행을 ‘땅끄진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고향에 도착해서도 기차역에서부터 동네까지 또 걸어서 이동하고, 그렇게 한여름을 뚜벅이로 보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잊혀지질 않는다.

이후로 더 바빠지며 코로나는 완화되어가면서 제제와는 활동하는 지역 차이로 자주 얼굴을 보진 못했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제제가 서울로 놀러 오기도 했고, 최근 봄에도 졸업 후 취준을 하던 중에 서울에 며칠 정도 설명회를 들으러 온 김에 바람도 쐬곤 했다. 그때 기억으로는 나는 막 실연 당한 참이었고, 제제는 취준에 대한 강박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던 때였다. 그래도 우리는 간만에 만났다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땅끄’를 한다며 서울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었다. 제제와 오랜만에 나들이로 시간을 보내니 좀 나아지는 듯했지만, 제제가 내 자취방을 떠나고 얼마 안 있어 홀로 남겨진 나는 우느라 그날 하루를 다 보냈었다. 제제와 함께 정신없이 다니면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던 상처는 그렇게 쉽게 덮을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 자신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만큼 나 또한 제제를 평소처럼 반가워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졸업학년인 4학년 복학과 동시에 재직 중이던 회사 일을 계속 병행하기로 결정했고, 당연하게도 좀처럼 뚝딱 써지지 않는 졸업작품 창작에 대한 고난과 업무 스트레스를 반복했다.

동창이 결혼을 하는 걸 보기도 했고, 난생 처음 용하다는 무당님을 찾아가 신점을 보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들도 사귀고, 그 바쁜 새에 두 달이란 시간 동안 또 많은 걸 경험하며 보냈다.     


6월. 올여름은 7월이 되기도 전에 6월 초부터 한여름 날씨가 훅 다가왔다.

5월 연휴 때도 못 갔었던 본가를 주말에 1박 2일로 엄마가 내려오라며 연락이 왔다. 친언니의 상견례가 있다고 했다.

그 주는 말그대로 살인 스케줄이었다. 워낙에 뭔가를 많이 벌여놓은 나는 약속도 틈만 나면 잡았고, 심지어 다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 전주만 해도 월화수목금토일, 일주일 내내 일정이 있었고(출근하는건 당연했다, 연차를 쓴지도 오래되었다) 4학년 1학기는 틈틈이 과제를 해선 사무실에서 마지막 과제를 제출하며 조용히 종강을 맞이했다. 그래놓고는 또 그 다음 주에 월화수목...일일이 모임에 학원수업에...하루에도 2~3개의 스케줄을 소화하곤 금요일 밤중에 본가에 도착했다.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 상태로 다음날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곤 가족들과 상견례 장소로 이동했다.

빈속에 차를 타고 2시간 정도를 달려서 그런가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웠지만, 중요한 자리이니만큼 밝은 체면을 유지했다.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것까지 끝내고는 본가로 돌아와 언니와 형부의 신혼집 침구를 보느라고 또 백화점을 갔다. 뒤늦은 저녁을 다 같이 먹고 집에 돌아와 쉬었지만 계속 머리에서 맴도는 빈혈은 사라질 줄 몰랐다. 일요일 오전에 엄마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는 낮잠만 자다가 저녁 5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8시 30분에 자취방에 도착하자마자 집앞에 약속이 있어 또 짐만 내려놓고 나섰다.

휴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수준으로 어김없이 출근을 했는데, 영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메롱 상태라고 하던가. 숙취 있는 것처럼 헤롱헤롱 대면서도 밥은 꾸역꾸역 잘 먹었다. 그래서 저녁까지 버틴 듯했다. 그날 또 약속이 이틀 연속으로 있었다.

그날 내 방에서 하룻밤 자던 친구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어투로 나에게 한마디 했다. 네 활동량이 얼마나 되는 줄 알고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고 그렇게 다니냐며. 적어도 너 자신은 챙기는 시간도 가지라고 한 소리 들었다. 친한 직장 동료 언니는 내가 뭔가 잠깐동안 비는 공허한 시간을 참지를 못해서 계속 일을 늘리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 했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그 말이 백번은 맞았다. 하지만 그새 어딘가 단단해진 나는 그 말을 듣고 더 정확한 내 상태를 알아차렸다.     


쭉 둘러보니 그랬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다. 그래, 그때가 전환점이었다.

좋아하던 친구에게 실연당한 시점이었다.     

인생 겨우 24년차이지만, 나는 24년 간 단 한번도 스스로에게 만족을 해본 적이 없다. 아주 어린 내가 봐도 나라는 사람은 너무도 별로였고, 못나 보였다. 내가 어떻게든 악착같이, 꾸준하고 열심히 배를 해내야 남들보다 겨우 한발짝 뛰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여유라는 건 나에게 사치로 여겨졌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며 ‘너는 참 열심히 산다’며 감탄을, 대견하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목이 말랐던 건지 뭔지, 그런 얘기를 듣고도, 정말 크나큰 성취를 해내고 나서도 멈추질 못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만족하는 순간, 나는 안도감을 가지고 더는 ‘간절함’이라는 것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더는 내가 열심히 하지 않고 멈춰서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기엔 내가 원하는 ‘완벽’이란 인간상과 가치관, 욕심들의 기준 발자취에도 가지 못한다. 나는 내가 더 큰 뭔가를 해내며 성장할수록 더더욱 채찍을 가했다. 결국 여러 질병들이 터지며 6년 가까이란 시간 동안 앓았다. 그 사이에서도 끝없이 채찍은 오갔다. 내가 아프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아파하는 나 자신이 너무 허약하고 한심했다.

그런 긴 시간들이 무색할만큼, 작년 가을쯤부터 내가 점차 밝아지고 어딘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사실 그럼에도 나는 나 자신, 그대로였다. 변한 건 없었다. 그런데도 오랜만에 만난 친한 친구들은 별 변함 없는 나의 모습을 보고 어딘가 달라졌다며 기뻐했다. 평소보다 감정적 여유를 되찾기 시작했었던 때였다. 어딘가 여유가 생기더니, 나는 내 부족한 마음에 다른 사람도 넣을 줄 알게 되었고, 그 시기쯤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창 그 친구를 좋아할 때쯤 선생님은 내가 몰라보게 좋아진 상황이라며 앞으로 약을 끊는 단계를 시도해보자는 제안을 하셨다.

내 몸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고, 그 시기쯤 나는 처음으로 고백을 해보곤 대차게 차였다. 미련을 버리려고, 차일 줄 알면서 일부러 고백을 했다.

자존감이라곤 없던 나는 그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에 내 못난 외형을 가꾸려고 또 노력을 시도했다. 하지만 더는 잘 보일 상대도 없어졌고, 실연 당한 자존감은 더 끝없이 내려앉을 판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뜻밖의 변화가 일구어졌다.

다시 우울에 잠길 줄 알았던 내 감정은 상처에 괴로워할뿐, 딱히 뭐랄까...나 자신에 대해서 해코지하진 않았다. 내가 너무 못나서 그 친구가 거절한 느낌이란게 없었다. 물론 정중히 거절해준 그 친구의 고마운 태도에도 지분이 있었겠지만, 정말 온전히 나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서로를 잘 알지 못했고, 성향이 안 맞기 때문에란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보니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이런, 나 되게 괜찮은 놈인데? 좀 아깝지 않나?

이런 감정이 처음이었다. 뭘까 이거. 나쁘지 않은데.     

점차 나를 대견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해내도, 이야, 이거 역시 나라서 이렇게 해냈다, 하고 칭찬하기 일쑤였다. 세상에, 내가 나한테 더없이 만족하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열심히 살았다. 아니, 오히려 더 열심히 사는 것이었다. 대체 왜?


1년 전만 해도 그랬다. 무언가를 해야만 하고, 하고 싶다는 걸 잘 알면서도 겁이 나고 두렵고, 내가 뭐라고, 라는 생각에 결심하는 데만 한 두어달이 걸려 도전했었는데, 지금 당장은 그게 뭐 그럴게 있냐며, 나니까 이 정도 도전해보고 아니면 바로 빼면 되지! 나는 강하니까, 내 기준도 확고하고 경계할줄도 아니까! 라며 서슴없이 무언가를 시작하곤 했다.

그렇게 계속 일을 늘린 게 이 결과였다. 번아웃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미친 듯이 달렸고, 여태 가장 바쁘고 정신없이 지냈던 그 두달이란 시간 동안 나는 심적으로 가장 여유로웠다. 자아도취라는 걸 시작해본 그 두달 동안 일궈진 변화였다.

결국 몸이 못 버티고 잠깐 주저앉은 격이었지만, 사실 그 사이에 그래서 또 운동도 열심히 했다. 체중도 살면서 지금이 가장 뚱뚱한 상태지만, 어찌보니 외형도 지금이 가장 리즈를 찍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마음에 드는 이성이 나타나지 않아 외로운 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참나, 왜 이렇게들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 하며 자아도취하기 마련이었다. 정말 우스우면서도 재밌고,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그 주는 고생한 나에게 선물을 주자며 약속만 가고 운동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오랜만에 연락 온 제제가 1박2일로 강릉에 가자고 제안을 했다.

좋아, 이 기세로 그럼 땅끄 가자, 하며 야심차게 짠 계획     



은 놀랍게도 아무것도 못했다. 취준으로 불안해하던 제제는 이번에 취업에 성공했다. 곧 첫 출근을 앞두고 있었고,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대뜸 혼자서 해외여행을 떠나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서울역으로 온거였다. 다 죽어가는 몸으로 나와 강릉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다고 나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운동만 안 갔지 출근과 약속은 계속 되었으니...


둘만 있으면 ‘땅끄’를 입에 달고 살던 우리는 세세한 계획을 짜지 못하면 여행은 꿈도 못 꿨는데, 반쯤 감긴 눈으로 기차에서 서로에게 고백을 했다.     

“사실 나 강릉 계획...못 짰어.”

“떫음아...미안해 사실 나도 조사 하나도 못했어.”     

...

그...


1분 가까이 우린 빠른 속도로 향하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우리 둘의 거지꼴이 참 가관이었다. 그런 우리 둘의 표정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계획 못 짠거, 너한테 혼날 줄 알고 말 못하고 있었다?

웃음이 빵 터졌다. 너도? 너도? 사실 나 너무 힘들고 피곤했어. 알지, 알지. 너 스케줄만 봐도 연예인이야.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 진짜!

한결 웃음을 쏟아내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무 생각 없이 강릉역에 내려서, 대에충 예약해뒀던 숙소에 짐만 맡겨놓고 털레털레 나왔다.

그냥 숙소 근처에 중앙시장이 있어서 구경 겸 쓰윽 한바퀴 둘러보고,

맛집 탐방을 안하곤 못 베기던 우리는 대충 근처에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땡기는 음식 아무거나 시켜서 배를 채우고, 가장 가까운 안목해변으로 멍하니 버스를 타고 갔다.

엄청 더울 줄 알고 나시원피스까지 사서 입고 왔는데, 아침까지만 해도 비가 내렸어서 선선하기 그지 없는 날씨였다.

모래만 밟아보다가 제제가 대뜸, 갖고 있던 우산을 팽개치며 그 위에 앉았다. 떫음아, 우리 그냥 여기 앉아서 바다나 보자.

저 멀리 스탠드도 있을 텐데. 이 원피스 강릉 와서 예쁘게 사진 찍으려고 이틀 전에 샀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나도 안 들었다. 그래, 하며 접이식 우산을 대충 돗자리 삼아 부서지지 않게 살포시 앉았다. 밀물 썰물 소리를 느끼며 한적하고 하늘은 우중충한 해변에서, 우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좋다.”

“...그러게.”

갑자기 제제가 전날까지 처음으로 떠나본 홀로 해외 여행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를 꺼냈다. 위험한 순간이 참 많았다. 실은 나도 많이 걱정 했지만 왜인지 말리진 않았다. 제제는 사실 많이 겁이 났었다고 했다. 전날까지도 취소할까 말까 고민을 했지만 무작정 떠났다고 했다.

손해보는 일도 많았고, 울고싶고 했지만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에 대해 경이로운 듯 여행 얘기를 펼쳐놓았다. 그 얘기를 듣는 내내 나는 여행을 잘 다녀온 제제의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성장한 제제의 모습이 너무 뭉클해서 울컥했다. 너무 다행이다.


나는 이어서 제제와 마지막으로 본 이후 두달 간의 첫 자아도취 경험에 대해 얘기를 풀어놓았다. 제제 또한 나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얘기에 대해 한 마디씩 건넸다.     

“아주 잠깐이었을 그 여행 경험이, 커서도 계속 생각나면서 너를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 같아.”

그건 정말 아무나 못해보는 일이고, 너는 엄청난 걸 도전하고 해내서 돌아온 거야. 사실 취업이 끝인 것 같지만 이제 또 출근을 하면서 또 다른 관문을 시작하겠지. 또 새로운 고난이 찾아오겠지, 하지만 그 혼자 떠난 여행에서 얻은 것들이 계속 너를 버티게 만들어줄거고, 이후 또 다른 도전들을 하는 발돋움이 되어줄지도 몰라.     

제제는 똑같이 내 자아도취 경험에 대해서 네가 이만큼이나 변하고 성장했다는 게 대단하다며 칭찬을 퍼부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게 이런 이유구나.

우리는 이런저런 그동안의 묵힌 얘기들을 털어내는데만 바닷가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앉아 있었다.

그랬다. 항상 무언가를 갈구하던 우리였지만, 변했다고 해도 나는 나라는 알맹이 그대로였고, 단지 그게 훨씬 더 무언가가 덧입혀지며 단단해졌다.

실은 지금 이대로가 제일 좋은 우리.     


“오늘 잠시 다녀간 바닷가에서의 이야기가 이후에도 계속 생각날거야.”

“떫음아 그 얘기를 글로 쓰는 건 어때?”

“무슨 글?”

“그냥 넌 글쓰는 걸 좋아하잖아.”     


가끔은 땅끄진진도 설렁설렁 바람 쐬는 게 필요했다는 걸 그제서야 느낀 둘은 밀물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내 썰물과 함께 각자의 그간 묵힌 여념들을 흘려보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에 묻은 모래들을 털어내며 아마도 그들은 더 단단해져 돌아갔으리라.     


우리는 정말 간만에 떠난 땅끄진진 1박2일 동안, 기차를 타고 먼 강릉까지 와서 한거라곤 안목해변에 몇시간 동안 앉아서 얘기하고, 숙소 근처 중앙시장에서 닭강정 하나 사먹고 들어와서 tv보다가 잠드는 게 끝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또 기차를 타고, 잠이 덜 깬 채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딱히 땅끄라고 할만한 걸 하지도 않았는데, 땅끄진진은 훨씬 더 튼튼한 땅끄를 경험하고 온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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