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 - 음식 편
예전엔 맛집이라면 지하철만 30분 넘게 타야 하는 장거리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맛집은 가까운 곳에도 있다.'는 신념으로 인근 식당에 가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다. 그는 그런 나보다도 더 맛집에 대한 집착이 덜 해 우리는 자연스레 동네 데이트를 즐기게 됐다.
몇 달 전, 오랜만에 강남에서 점심을 먹을 일이 생겼다. 영화 시간이 애매해 강남으로 다니는 영어학원이 끝나고 바로 근처에서 밥을 먹고 영화를 보기로 한 것이다. 늘 하는 '밥 먹고 영화보기'인데도 장소가 바뀌니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맛있는 걸 먹어야지!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수업이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카톡을 확인하는데 그가 좀 늦을 것 같다고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왠지 기운이 빠졌다. 얼마 후 도착한 그는 시무룩한 내 표정을 보고 미안하다며 나를 꼭 안아주고는 물었다.
"뭐 먹고 싶어?"
괜히 심술이 나서 그에게 맞질문을 했다. "뭐 먹을지 생각 안 해봤어?" 평일 퇴근 후 집 근처에서 저녁을 먹을 때면 매 아무 데나 괜찮다고 해, 내가 고르는 데로 가는 편이라 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런데 웬걸,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음식점 몇 군데를 제안했다. "응? 오면서 검색해봤어?"라고 물으니, 그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다 알아봤지!"
순간 단단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럼 만두전골 집 가자!" 촉촉하게 내리는 보슬비에 뜨끈한 국물이 당겨 그가 오기 전부터 이미 가야겠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그의 새로운 제안을 다 무시하고 항상 가던 곳을 외쳤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오구, 울 애기 얼큰한 게 당겼구나! 나도 그럴 줄 알았지~ 근데 애기가 물어볼까 봐 다른데도 찾아온 거야." 그렇다. 어느새 나보다도 나를 잘 알게 된 남자 친구는 나도 몰랐던 내 반응을 예상하고 미리 후보군을 알아온 것이었다. 살짝 소름이 돋았지만 오돌토돌한 모양을 자세히 보니 그마저도 하트 모양 같았다.
답을 정해놓고 묻는 답정너인데도 그는 내가 언니나 동생에게 하듯 "아, 똑바로 말해~ 나중에 뭐라고 하지 말고."라고 하지 않는다. 애매하게 말해도 최선을 다해 내가 원하는 걸 맞춰주려고 한다. 밥을 먹고 자주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먹는데, 가끔 아이스크림 이름이 생각나지 않거나 대충 어떤 맛을 먹고 싶긴 한데 그중 하나가 콕! 집어 지진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과일이 들어간 상큼한 아이스크림', '우유 맛이 나는 하얗고 달달한 거'라는 식으로 주문을 하는데, 그러면 그는 일부러 아이스크림이 많은 멀지만 큰 편의점을 찾아가 내 취향에 맞을만한 것들을 2-3개씩 사 온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봤어'라는 듯.
혹시나 다시 마트에 가야 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언제나 두 수 이상을 보고 움직이는, 애기의 탈을 쓴 사자 같은 남자다.
*. 표지 사진 : https://unsplash.com/@matheusferr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