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초등학생 때 난 꽤 인싸였다. 친구들과 영턱스클럽의 춤을 연습해 소풍 때 선보이기도 했다.
정말 나를 사랑했다고~ 나 없는 못 살겠다고~
그 뒤론 나조차도 과거의 내가 낯설 만큼 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지만, 저 깊은 곳 한켠엔 언젠가 꼭 춤을 배우리란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취업에 성공해 먹고살만해지자 춤에 대한 열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방송댄스는 한 번 시도해봤지만 단번에 내 길이 아니란 걸 알았다. 예상을 빗나가는 빠른 동작에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그러다 운동을 하려고 등록한 GX에서 줌바를 발견했다. 에어로빅 같긴 하지만 음악에 맞춰 운동을 하니 많이 힘들지 않고 재밌을 것 같아 신청했다.
이윽고 줌바 데이가 왔다. 이미 요가나 필라테스 같은 운동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마찬가지로 브라탑에 레깅스를 입고 수업에 들어갔다. 근데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불은 꺼져있고 GX룸 구석엔 오색빛깔의 미러볼이 미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 옆에서 열심히 스피커를 조절하고 있던 선생님이 시선을 강탈했다. 무늬가 화려한 크롭탑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허리에 체크 셔츠를 질끈 묶어, 마치 금방이라도 <쇼미 더 머니>에서 랩을 할 것만 같은 비주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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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흥겨운 라틴음악이 공간을 가득 메웠고, 홀린 듯 처음 듣는 음악에 맞춰 열심히 몸을 움직이다 보니 금세 50분이 지났다. 나는 금세 줌바와 사랑에 빠졌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을 따라가 물었다. "선생님, 이게 무슨 춤이에요?"
순간 운동임을 잊고 나도 몰래 나온 질문이었다. 선생님도 살짝 당황하다 이내 "줌바는 메렝게, 힙합, 살사 등 여러 춤 동작들을 섞은 '운동'이에요~"라고 말씀해주셨다. 메렝게, 힙합, 살사.....
살사?! 살사!!
알고 보니 유독 그 선생님이 다양한 춤 경험이 있고 또 그루브에 강해 더욱 춤 느낌이 난 거였지만(일반적인 줌바는 확실히 에어로빅에 가까운 운동이다.), 난 그렇게 살사에 입문하게 됐다. 인터넷으로 근처 학원을 찾아 바로 등록했고,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외진 학원을 찾아가 다시 몸을 움직였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깜깜한 골목을 걸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 때 그를 만나게 됐다. 그는 살사를 배우는 나를 응원해줬고, 나는 종종 배운 동작을 그에게 알려줬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고, 기초반 동기들을 따라 초급, 초중급, 중급으로 단계를 높여갔다. 마지막으로 고급 단계인 공연반만이 남았다.
살사는 원래 남녀가 함께 추는 춤이다. 남자끼리 혹은 여자끼리 안무를 맞춰 선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남자의 리드에 맞춰 남녀가 합을 맞춘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쿨하게 나를 학원에 보내줬었다. 춤을 배우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공연반을 앞두자 상황이 달라졌다. 공연반은 아예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가 한 명씩 짝을 맞춰 두 달 동안 매일같이 연습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선로를 전환했다.
"아, 아무래도 그건 안될 것 같아."
당시 집이 멀어 평일엔 거의 못 보고 주말에야 얼굴을 봤는데, 매일같이 외간 남자를 만나 몸을 부대낀다니 싫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동안 살사를 배웠던 세월도 아깝고, 한 곡의 음악에 맞춰 공연을 선보일 기회는 잘 없었기에 꼭 하고 싶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하라고 했었잖아, 왜 이제와 말을 바꿔?"라고 했지만 그는 좀처럼 의사를 꺾지 않았다.
"바꿔 생각해봐, 내가 한다고 하면 허락해줄 거야?"
아, 그의 말이 맞았다. 그가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춤을 춘다고 생각하면... 그저 다른 여자의 손을 잡는단 생각만으로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 그대로 깨끗하게 살사를 포기했다. 공연반은 물론이고 모든 과정을 올 스톱했다. (턴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어려워 그런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다시 살사를 꿈꾼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 바다 건너 쿠바로 가서 거리에 흐르는 생음악에 맞춰, 너 나할 것 없이 리듬에 몸을 맡기는 커플 중 하나가 되고 싶다. 쨍한 컬러의 올드카를 타고 해변을 드라이브하는 건 덤!
꼭 그와 쿠바를 가야지, 그리고 같이 살사를 춰야지.
네이버 영화 어때, 살사 가서 쿠바 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