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hl Jul 18. 2019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 두 번째 이야기

나한테는 션이자 최수종인 애기사자

  지난 1월 말에 썼던 글이 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라는 그 글은 제목 덕분인지, 꼭 하루에 한 두건은 검색으로 들어와 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입된 검색어 '사랑한다는 증거', '남자가 사랑할 때 하는' 등인데, 그만큼 연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의 마음을 의심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지금 손을 잡고 있는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게 맞는지 궁금해한다는 게 재밌다. 그래서 이렇게 또 글을 쓰게 됐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 미쳐 쓰지 못한 그 두 번째 이야기를.



남자의 변신은 무죄


얼마 전 저녁이었다. 그가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난다고 했다. 혼자 집에서 심심하게 있었다면 좀 심술이 났겠지만 야근을 하느라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9시가 훌쩍 넘은 시각. 불행인지 다행인지 일을 더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 퇴근할 준비를 하며 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는 끝!"


그가 약속 장소로 가기 전,  야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나오겠다며 강남역에서 보자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답이 오는데 약간의 텀은 있었지만 그는 약속대로 친구들을 뒤로하고 지하철역에 나타났다. 그리곤 소주인지 맥주인지 모를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니, 내가 여자 친구 보러 간다고 하니까 그 술 잘 마시는 친구가 나보고 왜 그렇게 사냐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원래 이렇게 해야 되는 거라구~" 웃는 얼굴 위로 '나 잘했지?'라는 글이 보이는 듯했다.


항상은 아니지만 술을 마시면 연락이 잘 안 되거나, 집에 늦게 오는 경우가 있어 그걸로 참 많이도 싸웠는데. 그때마다 어쩔 수 없었다며 말로 때우던 그가 이제 자신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친구를 나무라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인가? 나도 그를 따라 씨익 웃어 보였다.



사랑은 기차를 타고


그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항상 나를 마중 나온다. 덕분에 회사에서 야근을 하게 돼도 늦은 시각 집에 혼자 걸어갈 걱정 없이 맘 편히 할 수 있다.(이것은 순기능인가, 역기능인가?!) 그런 그가 마중을 나오는 건 비단 퇴근길 만이 아니다.


광주가 본가라 가끔 기차를 타고 집에 내려가는데 그때마다 기차를 타는 곳까지 데려다준다.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잘 다녀오라며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손을 흔들어준다. 그러면 나는 짐짓 부끄러운 듯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솟아오르는 광대를 감추며 창문 너머로 그에게 손하트를 날린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용산역에 도착하면 언제나 그랬듯 대합실의 많은 사람들 틈에 서서 나를 찾고 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팔을 벌리고 나는 적당한 속도로 달려가 그에게 안긴다. "나 보고 싶었어?"라고 답이 정해진 물음을 건네며.


친구들과 놀러 가는 길에도 예외는 없다. 얼마 전 대전에 사는 친구를 보러 가는 길에도 그는 언제나처럼 역까지 함께 해줬고, 짧은 일정에 아쉬운 마음으로 서울에 돌아올 때는 그 헛헛함을 채워주는 변함없는 미소로 나를 반겨줬다. 연애 초반에 얼핏 이것만은 지켜달라며 데이트 후엔 집까지 바래다달란 얘길 했던 것 같은데, 그것 때문인가? 우리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다 데이트니 그럴 수도 있겠군- 하며 고개를 끄덕여본다.



난 괜찮아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요즘 우린 밖에 나가기보단 집에서 곧잘 배달음식을 시켜먹는다. 다른 사람들 눈을 신경 쓰며 적당히 차려입을 필요도 없고, 식당까지 가는 시간, 웨이팅이 있다면 그걸 기다리는 시간까지 길에서 버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보통은 나나 그의 집에서 만나 어플로 음식을 시켜놓고, 넷플릭스를 티브이에 연결해 보면서 파자마 차림으로 느긋하게 음식을 기다린다. 얼마 전에도 그렇게 피자를 시켜 집에서 편히 피맥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무슨 영화를 보고 있었더라?


그날은 우리 집에서 저녁을 함께 하고 있었는데, 이사를 왔을 때부터 고장 나 있던 에어컨이 문제였다. 정확히는 에어컨의 리모컨이 고장 나 온도 조절 버튼이 안 먹혔다. 덕분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와 에어컨 사이를 열심히 왔다 갔다 하며, 덥다고 에어컨을 켰다가 춥다고 다시 에어컨을 끄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 아뿔싸. 좁은 테이블에 다 담기지 못해 삐져나와있던 피자 상자를 다리로 건드렸고, 상자가 움직이며 그 옆에 있던 맥주 캔을 밀어 넘어뜨렸다. 이에 맥주는 장렬히 거품을 뿜으며 바닥으로 굴렀고 우리는 맥주를 뒤집어썼으며 러그와 소파에도 맥주가 잔뜩 묻었다. 먼저 얼른 몸을 닦은 후 소파를 열심히 물티슈로 문질러봤지만, 패브릭 소파는 이미 맥주를 다 흡수한 듯 아무리 닦아내도 축축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연자실한 상태로 손을 씻고 나오는데 남자 친구가 원래 내 자리였던 소파의 젖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난 괜찮아."라며 그는 그 자리에서 영화를 마저 다 보았고, 영화가 끝난 후 그가 떠난 자리는 따뜻한 온기로 다 말라있었다.





*. 표지 사진 : https://unsplash.com/@heftib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