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heals all
벌써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5월은 더 이상 싱그러운 봄이 아닌 비 냄새를 품은 이른 여름인 것 같다. 지난 일요일은 종로에 어느 스페인 디자이너의 전시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11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씻고 밥을 배달시켜 먹은 후 무료 영화를 찾아보는 게 아닌, 오랜만의 데이트였다.
틈틈이 회사에서 주문한 옷들도 전날 도착해 '뭘 입고 갈까?'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는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안한데, 다음에 가도 될까?" 내가 실망할까 봐 좀처럼 거절도 안 하고 하자는 건 다 해주는 그인데, 미술관 나들이를 취소하고 밥이나 같이 먹자며 나타난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아침저녁에도 더운 탓에 에어컨을 틀고 자다 감기에 걸린 것이었다. 매번 "남~좌~"라며 건강하다고 자부하지만 그는 제법 자주 감기에 걸리고 편도가 붓는다. 게다가 한 번 아프면 낫는데 시간이 꽤 걸려 고생하는 걸 알기에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아프면 그가 언제나 곁을 지켜준다. 내가 감기에 걸리면 "난 건강해서 안 옮아."라며 여느 때와 같이 손을 잡아주고 밥도 한 그릇에 나눠먹는다. 사랑을 한 수저 가득 푸고 장난을 살짝 얹어 "내가 아픈 거 다 가져가 줄게."라며 입을 맞춰준다. 거북목에 어깨가 굽은 나를 위해 목과 어깨, 팔 등을 주물러주고, 그 사이에 혼자 다리를 주무르고 있으면 종아리애 씻지도 않은 발까지 양말만 벗겨 같이 마사지해 준다.
지병으로 자주 가는 병원도 웬만하면 같이 가준다. 직장에 메인 탓에 항상 같이 가주진 못해도 가능하면 휴가를 내 같이 있어준다. 치료 준비를 하느라 식이조절을 할 땐 아무거나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요리를 해주기도 했다. 아픈 나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아 그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직접 관련 요리 책을 사 와 진지한 표정으로 레시피를 정독하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치료를 받은 후엔 당분간 가까이하면 안 되는데도 병원으로 마중을 나와 집에 가는 길을 함께 해주었다. 나란히 걷는 것도 피해야 했던 터라 멀찍이 떨어져 남인 듯 걸어야 했지만, 그래도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에 그가 있다는 사실이 지친 몸과 마음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며칠간은 입맛이 없어 잘 먹질 못했는데 TV에서 이영자가 나와 만두며 과자를 맛있게 먹는 걸 보니 문득 입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때마침 온 그의 연락에 수줍게 꼬깔콘과 바닐라맛 아이스크림을 외쳤고, 그는 곧 꼬깔콘 다섯 봉지와 바닐라맛 아이스크림 4종, 그리고 네모난 카스텔라와 그에 곁들일 하얀 우유를 들고 나타났다. 그렇게 나는 입맛과 기운을 찾아갔고 얼마 안 있어 다시 함께 무엇이든 먹을 수 있게 됐다.
기대했던 데이트는 못했지만 여느 때와 같이 동네 단골집에서 저녁을 함께 하는 것도 좋았다. 다음날의 비를 예고하듯 살짝 습기를 머금은 날씨에 나는 칼칼한 짬뽕을 시켰고, 그는 언제나처럼 밥과 짜장, 그리고 국물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볶음밥을 시켰다.
영 맥없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지만, 뜨끈한 국물과 밥으로 속을 채우며 그는 점점 혈색을 되찾았다(후식으로 1인 1 아이스크림도 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둘만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장난 삼아 그에게 입술을 쭉- 내밀었는데 그의 입이 그대로 와 닿아버렸다.
오는 길에도 감기가 옮을까 잡았던 손을 꼭 깨끗이 씻으라고 당부하더니 뽀뽀를 하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게 이상해 "해버리면 어떡해~"라고 하자, 그는 그제야 깨달은 듯 "아, 맞다!"라며 당황해했다. 그리고 곧 이를 꼭 깨끗이 닦으라는 말을 덧붙이며 다시 나를 지키는 수호자로 돌아왔다.
같이 음식을 나누며 웃었던 그 시간이 잠시 그가 감기에 걸렸단 사실을 잊게 한 것 같았다.
*. 표지 사진 : Photo by Tim Marshall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