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휴가#면생리대#성공적
지난 목요일, 알람이 울리려면 한참 남은 이른 아침에 눈이 절로 떠졌다. 저녁을 먹은 지 수시간이 지났는데도 기분 나쁘게 빵빵한 배와 그 밑 어딘가 깊은 곳에서 전해오는 찌르는 듯한 고통이 나를 깨운 것이다. 복부 팽만감과 복통, 전형적인 생리통 증상이었다. 한동안 괜찮더니 이렇게 아픈 건 오랜만이었다.
죽지도 않고 또 와서 매달 두둑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놈, '생리'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내가 생리 중인 걸 절대 알리지 마라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쩌면 제목을 보자마자 먼저 뒤에 누가 없는지를 확인했을지도 모르겠다. 생리를 생리라고 부르는 것은 때때로 금기시되며, 보통은 진짜 이름 대신 '그 날'이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볼드모트(앗, 불러버렸네.)라도 되는 걸까?
영화 속 여주인공들은 마치 그 세계엔 생리라는 게 없다는 듯 분위기에 휩쓸려 예정에 없던 하룻밤을 보내고, 짓궂은 장난에도 까르르 웃으며 기꺼이 물에 빠진다. 드물게 생리 중인 여자가 나오는 경우엔 예외 없이 아이스크림이나 브라우니를 허겁지겁 먹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생리통은 그처럼 먹는 걸로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무엇보다 식욕 상승은 생리를 할 때가 아니라 생리를 하기 전에 나타나는 현상인데도 말이다. PMS는 월경'전'증후군이라고!
글로리아 스타넘은 저서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하게도 남자가 월경을 하고 여자는 하지 않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되면 분명 월경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월경을 하며, 생리량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며 떠들어댈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번 생엔 여자가 생리라는 짐을 짊어지게 됐고, 매년 80일 가까이 치러지는 중대사는 쉬쉬하는 주제가 되었다. 생리대 광고는 환한 미소를 띠며 하늘을 날듯한 여자의 모습을 비추며, 생리 중에도 생리 중이 아닌 듯 깨끗하고, 맑고, 자신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마치 원래는 생리가 더럽고, 탁하고, 자신감 없는 것이라는 듯.
나도 그랬다. 친구 집에 놀러 갈 날짜를 잡다 "아, 나 그때 그 날일 것 같은데..."라며 머뭇거렸고, 남자 친구에겐 "그냥,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라며 데이트를 미뤘다. 하지만 만남이 길어지며 남자 친구는 컨디션이 안 좋다는 건 종종 생리 중이란 말의 다른 표현이란 걸 알아챘고, 그럴 때면 밖에서 만날 약속을 잡는 대신 먹을거리를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다 그가 생리혈이 묻은 수건을 보고 말았다(분명 안 보이게 잘 구겨둔 것 같았는데). 그리고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는 "윽, 이게 뭐야!"라거나, "아, 이런 건 좀 치워두지~"라고 하는 대신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아고, 많이 아프겠다."는 위로와 함께 나를 조심히 안았다. 그렇게 우리는 부부가 됐고, 그는 배를 움켜쥔 나를 위해 빨래가 끝난 생리대를 해가 잘 드는 곳에 널어둔다.
잊지 말자. 부끄러움은 일 년에도 열두 번 아기집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길에서 담배를 태워 남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사람들의 몫이다.
얼굴이 어둡네요, 혹시 생리를 아십니까?
일전에 어느 동료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생리 휴가 쓰면... 캘린더에 어떻게 보여요?" 회사가 자랑스레 광고하는 복지제도의 일종인 생리 휴가를 실제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어느새 내가 여직원계의 유니콘이 된 모양이었다. "아, 그냥 휴가로 떠요." 그녀가 걱정하는 바(모든 팀원이 보는 달력에 내 생리일을 광고하게 되는 건가?)를 익히 알고 있기에 더 묻지 않고 그녀가 원하는 답을 주었지만, 안도하는 그녀의 반응에도 뿌듯하기보단 씁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들은 생리휴가가 없으니 불공평하다', '생리휴가는 왜 맨날 금요일이냐'라고 말하는 상사 밑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생리휴가가 없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리휴가는 생리를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다음. 생리휴가가 왜 맨날 금요일이냐고? 이 질문에는 할 말이 많다. 가장 먼저 할 말은 물음표로 끝난다. "봤어요?" 인사 담당자 - 그중에서도 근태를 관리하는 - 도 통계를 내봐야 알만한 걸 왜 직접 본 것처럼 말하는 걸까. 그래서 정확히 금요일에만 생리휴가를 쓰는 사람이 몇 명인지, 대체 여직원들이 생리휴가를 쓰긴 쓰는 건지 나도 참 궁금하다.
생리휴가도 휴가다. 휴가를 원할 때마다 쓰는 사람이 있을까? 아침에 절로 눈이 떠질 정도로 아픈 와중에도, 그 날까지 해야 할 일이 있어 휴가를 못 낸 게 바로 얼마 전 일이다. 예정일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이는 일기예보와 같다. 수요일에 비가 올 예정이지만, 안 올 수도 있다. 현재로선 그렇게 정확한 측정이 불가한 것이다. 얼마나 아플지는 또 어떻게 알겠는가? 그럭저럭 참을만할 때도 있고 진통제를 두 알씩 먹어야 일상생활이 가능할 때도 있는데, 이는 생리 예정일보다 더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니 생리통이 심한 날이 자리를 비워도 되는 날과 딱 맞아떨어져 휴가를 쓰는 일은 드물다. 참고 버티다 여유가 생겼을 때 비로소 겨우 눈치를 보며 쓰는 게 바로 생리휴가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생리는 딱 하루만 하는 게 아니라고! (어쩌면 이는 특정한 하루를 지칭하는 '그 날'이라는 언어적 오류에 의해 생긴 2차 오류일지도 모르겠다.) 생리는 아침에 시작해 저녁에 끝나는 게 아니다. 일요일 오후 4시쯤 시작해 토요일 새벽 2시쯤 끝나는 식이다. 그 기간에 금요일이 안 껴있을 확률이 더 낮지 않을까? 그러니 더 이상 "왜 여자들은 하나같이 금요일에 생리가 '터지냐'?"라고 묻지 말아 주길. 리베카 솔닛이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말했듯, '대화가 어긋나는 것은 내가 알고 상대가 모르는 것을 상대가 내게 가르치려 들 때다.'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앞서 말한 그 상사와 함께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짬뽕밥을 앞에 두고 먹지 못하는 걸 보고 그가 왜 그러냐, 어디 아프냐고 물었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생리통 때문에요." 그러자 와이프와 페미니즘에 대해 즐겨 얘기한다던 그는 마치 내가 끔찍한 주문이라도 왼 듯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고 해야 돼?"
면 생리대, 제2의 텀블러 되나...?
2017년 여름, 일부 생리대에서 있어서는 안 될 유해 화학물질이 검출되었다. 해당 생리대 제조회사를 상대로 소송이 제기되었고, 사람들은 기존 생리대의 대체품을 찾았다. 이로 인해 엄격한 인증을 거쳤다는 외국 제품의 직구가 늘었고, 유별난 사람들이나 쓰는 것으로 치부됐던 면생리대와 생리 컵이 대형 마트에 진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커다랗게 쓰인 '유기농', '순면'이란 단어만 믿고 일회용 생리대를 계속 사용했다.
그러다 문득 생리에 넌더리가 났다. 맘에도 없는 임신을 저 혼자 준비한 자궁 탓에 매번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데 화가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 고통이 앞으로도 몇십 년간 지속될 거란 생각이 드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생리통이 일회용 생리대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에 의한 것이란 말이 떠올라 곧장 인터넷에서 면 생리대를 주문했다. 그리고 3개월째 만족하며 쓰고 있다.
애초에 생리통을 없애려던 목적과 달리 고통은 여전하지만(지난 목요일에도 나는 면생리대를 하고 있었다.), 생각지 못한 장점이 여럿 있다. 먼저 감촉이 정말 좋다. 일회용 생리대도 유기농이라느니, 순면이라느니 하면서 그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지만, 예의 그 제품들을 썼던 사람으로서 면생리대의 부드러움은 차원이 다르다. 그냥 두꺼운 면팬티를 입은 느낌이랄까?
생리기간이 짧아졌다. 어떤 사람은 면 생리대를 사용하면서 생리통이 싹 사라졌다지만 난 그렇지 않은 것처럼 이것도 개인차가 있을 듯 하지만 쨌든 난 그랬다. 일주일을 꼬박 채우던 생리가 이젠 닷새면 끝난다. 고통의 지속 시간이 짧아졌으니 결과적으론 고통의 총량도 줄었다고 할 수 있으려나?
무엇보다도 환경 보호에 도움이 된다. 일회용 생리대 대신 면생리대를 쓰는 것은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쓰는 것과 같다. 사용 후 씻어두면 계속 다시 쓸 수 있어 쓰레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텀블러가 환경 보호의 대명사가 됐듯 면 생리대도 곧 그런 존재가 되리라.) 다만 손으로 애벌빨래를 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 특히나 요즘 같은 때라면 더욱.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사용한 생리대는 생리대를 교체할 때 바로 흐르는 찬물에 씻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예쁘기도 하다. 면 생리대를 살 때 뒷면의 패턴을 고를 수 있었는데, 덕분에 남편이 테이블에 널어놓은 면생리대를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오, 이거 귀엽게 생겼다!" 세상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생리대가 귀엽단 말을 듣게 되다니.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에선 '여자가 지시하는 거꾸로 된 세상'이 그려진다. 남편이 아이를 돌보고, 아내는 남편이 구워준 컵케이크를 먹으며 축구(물론 여자들이 하는)를 응원한다. 남자 주인공이 만들자고 했던 성기 측정기는 외음부 측정기로 둔갑하고, 한 여자 상사의 테이블에는 특대형 탐폰이 사탕처럼 유리그릇에 예쁘게 담겨있다.
묘한 해방감에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남편이 컵케이크를 구워주는 것도 외음부 측정기를 만드는 것도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면 생리대를 당당히 들고 다닐 수 있는 세상이라면 좋겠다고. 그런 곳에 살면 참 좋겠다고.
*. 표지 사진 : Photo by Erol Ahmed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