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걸음마
어떤 순간은 그 순간의 감정과 장면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글로 담아내기 힘든 경우가 있다.
초단위로 변화하는 감정의 진폭을 세세하게 글로 기록하기엔 내 글쓰기 실력이 너무 비루히 느껴진다.
단 몇 초의 순간이 슬로우를 건 것처럼 세세하고 느릿하게 지나가는 경험을 했다.
영상으로 급히 담아낸 17초 남짓의 짧은 순간이지만,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카메라 앱을 열고 녹화버튼을 누르는 순간부터 아이를 안아주려 정지 버튼을 누르고 두 팔 벌려 아이를 안는 그 순간까지가 마치 긴 영화를 본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마치 영화와 같다]라는 말은 얼마나 클리셰한 표현인지 잘 알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표현이 참 투박하고 뻔해 보였다.
내가 겪고 나니 알 것 같다.
그 짧은 순간, 과거의 일들이 너무 빨리 재생되면서 찰나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내가 겪은 그 긴 영화의 순간은 바로 ‘우리 아이의 첫걸음’이었다.
겁이 많은 아이는 생각보다 걸음을 떼는 게 쉽지 않았다.
다들 저마다의 속도가 있고 때가 되면 다 할 것이라는 걸 알지만 우리 아이의 첫걸음은 과연 언제 올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물건을 잡고서는 제법 잘 서는데 손을 놓기가 영 무서운지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겁이 많고 조심하는 모습에서 자꾸 겁쟁이인 내가 보여서일까?
‘날 닮았나… 나처럼 서른이 넘어서야 후회하고 조급해하면 어쩌지?’
기어서만 다니다가 우뚝 손을 놓고 선다는 게 내 입장에서야 쉬운 일이지, 인생의 대전환과도 같은 대단한 일이라는 걸 자꾸 잊는다.
그 큰 변화 앞에서 겁내고 주저하는 걸, ‘용기 없는 아이’로 생각해 버리다니, 욕심 앞선 못난 맘을 돌아보게 된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아이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쉽지 않다.
무언갈 잡고 몸을 기대어 의지하면서라도 자꾸자꾸 서보려고 애쓰는 그 마음을 보지 못하고 말이다.
잡고 서는 것이 안정되자 아이는 슬슬 손을 놓고 서기 시작했다.
소파에서 슬며시 손을 떼며 긴장이 가득한 표정으로 콧등이 움찔움찔 거리며 스릴을 느끼는 그 감정이 오롯이 전달된다. 아이는 얼마나 설레고 무서울까.
손을 제 가슴께까지 느리게 조심히 가져오더니 날 바라본다.
‘엄마, 봤어?’
말을 한다면 그 말이 분명할 표정으로.
내가 환호하며 박수치자 그제야 안심한 듯이 같이 박수를 친다.
아니, 박수를 치다니. 손을 놓고 우리 아기가 박수를 치다니.
그 짧은 순간은 결코 찰나가 될 수 없다. 영화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과정을 내가 알기 때문에. 나와 내 아이가 알기 때문에.
그토록 바라던 임신이 되었을 때, 난임병원에서 숱하게 보았던 검은 초음파 속에 아기집이 보였던 그 순간부터의 과정을 나는 기억하니까.
그 콩알 같던 애가 어느새 제 발로 우뚝 서서 내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으니 말이다.
월요일 하원 시간.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어머니, 서현이 집에서 주말에 걸었나요?”
“아뇨, 손 떼고 서긴 했는데 아직이요”
“오 그렇구나! 어머니 서현이 걸었어요. 두 걸음 정도지만 두 번이 나요.”
걱정이 무색하게 그새 해냈다.
내가 직접 그 첫 순간을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는 기특함이 더 컸다.
“우와! 서현이 대단하다. 걸음마도 뗐어?”
집에 데려오는 내내 열성적으로 아이를 칭찬했다.
이제 정말 인생에 새로운 막이 열린 아이가 다시 주저하지 않게 힘을 보탰다.
현관에 아이를 내려놓자마자 아이는 내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애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에게도 할머니게도 당장 보여주고 싶어 하는 그 맘이 닿았다.
천천히 몸을 들어 올려 서고 손을 벌려 중심을 잡더니 천천히 발을 떼고는 하나, 둘, 쿵!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다시 바닥에 손을 짚고 또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하나, 둘, 쿵!
몸을 들어 올리는 순간, 눈썹을 치켜뜨며 할머니와 엄마의 반응을 살피면서 조심히 발을 떼는 순간,
“어머어머!! 그렇지 그렇지!! 오구오구!! ”
내 목소리와 우리 엄마의 목소리가 물기로 젖어가고 눈에 눈물이 고이는 그 순간.
모든 장면이 다 느리게 또 소중히 가슴에 담겼다.
그 짧은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볼 때마다 물기 젖은 목소리와 환희에 찬 아이의 표정이 겹치며 자꾸 가슴이 뻐근해진다.
아이는 그 후로도 몇 번을 걸으려고 애썼다.
제가 할 수 있다는 것에 도취된 듯이 신이 나서 엉망진창인 자세로도 일어나 보려고 애를 썼다.
의욕이 넘치는 겁쟁이가 귀엽고 기특했다.
언제 이렇게 자랐니, 그 콩알이. 손만 움직이고 눈만 떠도 신기하고 경이롭던 네가 어느새 첫 발을 떼다니.
한 발 한 발 움직여 품에 안기던 그 걸음으로 또 언젠간 뚜벅뚜벅 날 벗어나 제 길을 갈 거라 생각하니 또 뭉클하다.
아이의 첫걸음으로 과거- 현재 - 미래를 다 봐버렸다.
그렇게 긴긴 영화 한 편을 찍었다.
마치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첫 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