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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집중력

아이의 등원날 일어난 일

by 날랩

그러니까 월요일인 오늘은 우리 아이가 나 없이 처음으로 혼자 등원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6월의 시작부터 어린이집을 다니기로 한 만 1세 우리 아기.


첫 주는 나와 1시간씩 3일을 함께 했는데, 아이는 생각보다 잘 적응한 것 같아 보였다.


눈이 크고 똥그란 프랑스 혼혈 남자친구가 함께 같은 반이다.


친구는 우리 아이보다 먼저 어린이 집을 다니며 적응해서인지 금세 아이에게 다가왔고, 우리 아가는 잘 놀다가도 친구가 다가오면 빠르게 기어 나에게로 왔다.


'이것이 바로 어린이집의 순기능인가? 나에게 오다니….. (아이는 나보다는 아빠나 할아버지에게 더 많이 안기는 편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이 가까이 있으면 냅다 선생님에게 안겼다.


일 년을 업어 키운 보람도 없이 단 하루 만에 선생님에게 가서 안기다니!!!라는 괘씸함이 들려다가도 ‘살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선생님에게 가는 딸이 내심 기특했다.


그만큼 아이는 잘 적응하는 편이었고, 이번 주부터 나 없이 두 시간을 혼자 지내보기로 했다.


일요일 밤에 아기가 가져갈 물건에 이름을 정성스레 썼다.


숟가락, 포크, 식판, 턱받이, 수건, 양치컵 등등… 아직 도착하지 못한 물품들도 대체할 만한 것들이 없나 꼼꼼히 살피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아기 가방에 예쁜 배지도 달아주었다.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


긴장은 아이 때문에, 설렘은 나 때문에였던 것 같다.


아이 가방 옆에 내 가방도 싸뒀다. 연휴 내 아이와 놀아주느라 못 읽은 두꺼운 소설책과 필통, 지갑.


단 두 시간이지만 오롯이 나 혼자 즐길 수 있는 자유라니!! 너무 신이 나고 들떴다.


어린이집에 가고 나면 할 일도 없는데 아이에게 인사를 하러 온 친정 엄마까지. 온 가족이 다 같이 설레는 순간인가 보다.


아이는 울지 않고 선생님께 잘 가서 안겼고, 나와 인사하며 헤어졌다.


상상한 것처럼 가슴이 미어지고 뻐렁치는 첫 헤어짐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씩씩한 내 딸 덕에 나는 가벼운 맘으로 카페로 향했다.


무슨 카페냐며 돈 쓰지 말고 집에 오라는 ‘내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갔다.


나에겐 ‘의미 부여’가 너무 소중했단 말이다. ‘자유 시간’ ‘아이의 첫 등원’ ‘혼자 카페 그리고 독서’


어느 하나 설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책도 술술 잘 읽혔다.


집에선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는 독서가 이렇게나 잘되다니.


게다가 엄마한테 맡긴 것도 남편한테 맡긴 것도 아닌 [어린이집]에 맡겼다는 사실이 죄책감 없는 순도 200%의 해방감을 주었다.


그전에도 즐겼던 ‘자유 부인 타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었다.


책에 빠져서 한창 글을 읽다가 시계를 보면 30분이 훌쩍 지났다.


‘하… 우리 아기가 벌써 30분을 혼자 그곳에 있다니, 잘하고 있을까? ‘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더 설렜다.


이제 드디어 하원 시간.


‘두근두근’


두 시간을 무사히 버텼을 우리 아기가 나에게 울며 안기진 않을까? 아니면 환하게 웃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가정 어린이집이라 지난주부터 유모차를 공동 현관 앞에 있는 자전거 주차장에 뒀는데


“????????”


유모차가 사라졌다!!!!!!!!!!!!!!!!!!!


심지어, 유모차 바구니에 넣어두었던 담요랑 아기 장난감은 땅에 내팽겨진 채로 유모차만 쏙 사라졌다.


잠시 멍-하다가 생각해 보니, 이건 도난당한 게 틀림없었다.


누가 ‘비싼 디럭스 유모차’ 임을 알아보고 1년도 채 쓰지 않은 우리 아기 자가용을 훔쳐간 것이다.


시간을 살피니 아직 5분 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경비실과 관리실을 갔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경찰에 신고하는 게 가장 빠를 거라는 이야기뿐 아무 대책이 없었다.


심지어 공동 현관 앞엔 cctv도 없었다.


멘탈이 말 그대로 붕괴되었지만 일단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이는 씩씩하게 나에게 다시 안겨왔고, 오히려 내가 아이를 살피는 게 아닌 아이가 나를 살피는 꼴이 되어버렸다.


한껏 상기되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엄마에게 안겨 유모차 없.이. 하원을 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얻은 자유와 집중력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도둑맞았다. 아이 고모가 큰맘 먹고 선물해 준 유모차와 함께.


다녀와서 피곤해하는 아이를 넋 나간 채로 재우고, 경찰에 신고를 하고 진술서를 작성해 신고 접수를 마쳤다.


당근 마켓에 중고로 팔려는 파렴치한 일수도 있으니 모델명과, 유모차를 키워드 알림으로 걸어 놓았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당근!’ 알림음의 노예가 되어 내 모든 집중력을 도둑맞아버렸다.


아이의 등원과 함께 내 자유와 밀도 높은 집중의 시간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2시간 만에 그 모든 걸 도둑맞다니.. 후….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난다.


‘왜 난 거기에 세워뒀을까? 왜 지난주에 어린이집 선생님께 유모차를 거기에 둬도 되냐고 묻지 못했을까? 왜 엄마가 집에나 오라 했는데 굳이 자유를 즐겨보겠다고 유모차를 둔 채로 훨훨 카페로 간 걸까’


도둑에 대한 분노보다 순간순간에 내가 했던 잘못된 선택들이 날 괴롭혔다.


가장 속상한 것은 ‘의미 부여’를 좋아하는 내가 가장 중요하게 살피고 눈에 담았어야 할 아이의 컨디션은 뒷전이고 속만 상해하다가 하루가 다 지났다는 것이다.


도둑맞은 유모차는 경찰관의 손에 넘어갔으니, 나는 어서 빨리 도둑맞은 집중력을 되찾아 우리 아이를 돌봐야 할 텐데...


우리 아기는 잘만 크는 데 여전히 나만 이렇게 우당탕탕 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속상한 첫 등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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