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아기의 발달 과정을 ‘지옥’에 비유한다.
‘뒤집기 지옥’ 그게 지나면 ‘되집기 지옥’ , ‘기기 지옥’, ‘걷기 지옥’
엄마가 되기 전부터 어디서 주워 들어본 말이다.
하나의 지옥을 맞이하면 그 후에 새로운 지옥문이 열리는 식이다.
나 역시 뒤집기와 되집기의 지옥을 지나 이제는 ‘기기 지옥‘ ’잡고서기 지옥‘의 단계이다.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과도 마치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듯 이 시기를 그렇게 불렀고, 육아와 관련된 sns에서도 당연한 듯 쓰이는 말이지만 문득 내가 이 단어 때문에 이 황금같이 예쁜 시기를 단어 그대로 ‘지옥’처럼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이가 처음 뒤집은 날의 뭉클함이 채 가시기 전에 남들 말마따나 정말 지옥처럼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뒤집으니 나는 그 아이를 다시 되짚어주고 붙잡느라 몸도 맘도 바빴다.
‘지옥 시작이로구만…’ 이런 맘으로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데 버둥대고 뒤집는 아기를 다그쳤다.
“서현아! 그만! 아오! 쫌 가만히 좀 있어봐. 엄마 힘들어!”
이 지옥은 언제 까지지? 이다음은 또 뭐지? 하는 걱정이 앞섰고, 힘겹게 돌아눕혀두면 다시 뒤집는 게 약이 올랐다.
그러다 문득 아기의 표정을 보았다.
아이는 애를 쓰면서도 신나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오빠 얘 좀 봐. 얘 알고 우리 놀리는 거라니까.”
아직 ‘지옥’이란 단어의 마수에 갇힌 어리석은 엄마의 시점이다.
그렇게 힘들고 지옥 같은 날들을 나를 놀리려는 딸내미랑 씨름을 하다 우연히 어떤 댓글을 봤다.
[아니 왜 지옥 지옥 거리는 거야. 나는 우리 애가 좀 뒤집었으면 좋겠구먼. 나도 그 지옥 좀 느껴보고 싶다.]
다른 아이들보다 느린 건가 싶어 노심초사하고 애가 탔을 한 엄마가 불만을 담아 쓴 그 글에서 나는 아차 싶었다.
그렇다. 그건 성장의 증거였다. 지옥같이 느껴질 만큼 수 십 번, 수 백 번 다시 뒤집고 되짚고를 반복해야 아이가 큰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는 거였다.
자칭 [성장 덕후] [프로 성장러]라 나를 칭하는 사람으로서 너무 부끄러웠다.
아이는 크는 연습을 홀로 그렇게나 열심히, 실패하면서도 ‘신이 나서’ 한 단계씩 해나가는 중인데 그걸 ‘신나게 엄마를 골려먹는다’로 해석하다니.
그 한 번의 깨달음과 창피함이 후의 육아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아이를 더 잘 관찰하게 됐다.
아이는 이제 나를 지옥으로 데려가는 악동이 아니라, 나에게 영감을 주고 감동을 주는 성장캐로 변해 있었다.
얼굴에 멍이 나도록 쿵- 하고 넘어져서는 엉엉 울다가도 금세 다시 장난감으로 돌아가 일어서려고 용을 쓰고,
한 손만 뻗어 반 정도 일어나서는 겁이 나서 우앵 울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내 아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기가 왜 우는지, 왜 또 하는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니 그 모든 몸짓이 예쁘고 기특하고 감동적으로 변했다.
열심히 용을 써 해낸 것을 ‘휙-’ 일으켜 세우거나 편한 자세로 ‘선심 쓰듯’ 되돌려 놓으려 하는 걸 멈췄다.
그저 옆에서 목청껏 응원하기 시작했다.
“옳지! 할 수 있어. 서현이, 아까도 엄마 도움 없이 했었지? 엄마 여기 있네? 여기 엄마 손까지만 와볼까?”
내 진심 어린 눈과 응원의 목소리에 아기는 엉엉 우는 채로 한 발을 더 디뎌본다.
“그렇지! 조금만 더! 와- 잘한다. 우리 딸. 너무 멋지다. 조그만 더 와볼까?”
기어이 용기를 내어 높은 턱을 넘고서는 울면서도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그 뿌듯하고 행복해하는 미소에 울컥 맘이 동해 나도 같이 울어버렸다.
아이의 눈물은 성공의 기쁨으로 잦아드는데, 나는 그 성공이 기특하고 감격에 겨워 점점 더 울게 된다.
이제는 내 손에 의지해 무릎을 펴고 일어서려 애를 쓴다.
온몸에 힘을 잔뜩 주어 일어나려는 아이의 몸무게와 애씀의 무게가 내 손에 온전히 느껴진다.
묵직하고 단단한 그 힘.
내 팔이 후달릴 정도의 억센 힘이다.
균형을 잡느라 온몸이 휘청휘청거리면서도 잊지 않고 나를 올려다본다.
‘용기를 달라고. 나 잘하고 있지 않냐고.’
왜 그전엔 이 강렬한 성장의 욕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이렇게 매 순간, 매 초마다 실패하면서도 나아가는 내 아이의 애씀을 왜 몰라봤을까.
아이는 ‘지옥에서 온 불사조’ 느낌으로 넘어지자마자 다시 내게 손을 뻗는다.
실패는 시도의 증거라는 것을 내 눈앞에서 똑똑히 온몸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부모도 새로 자란다는 건가 보다.
말로만 [성장 덕후]였지, 시도를 주저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던 나는 아이를 통해 온몸으로 성장을 배운다.
지옥처럼 느껴질 만큼 수도 없이 시도해야만 성장도 있음을.
그 성장은 지옥을 잊게 할 만큼 달콤하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