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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본을 구합니다

날 것의 하루

by 날랩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와 인사를 하며 부족한 잠을 깨운다.


눈이 마주치면 온 얼굴의 근육을 이용해 방긋 웃는 아가를 보며 행복으로 하루를 연다.


무거운 몸을 부지런히 일으켜 기저귀와 손수건을 챙기고 아기를 간단히 닦아주고 로션도 발라주고 기저귀를 갈아입힌다. 기지개를 켜는 아이의 몸을 꾹꾹 눌러주며 스트레칭을 시킨 뒤 아이의 첫 분유를 내린다.


모닝커피의 고소하고 향긋한 맛은 없지만 하루 첫 시작을 배고프다고 우는 아이와 씨름하며 부랴부랴 보내던 시절을 지나 여유롭게 분유를 내리고 창가에 안마의자로 가서 아이에게 수유를 한다.


7시 4,50분쯤. 이젠 해도 빨라져서 햇살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고 아이는 허겁지겁 분유병을 잡는다.


아이가 손에 힘이 생겨 혼자 분유를 쥐고 먹는 덕분에 나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유튜브에 들어가 아침에 듣기 좋은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좋아하는 음악과 여유로운 아침.


상상만으로도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다.


내가 꿈꾸던 육아의 모습과 닮아있는 여유롭고 정돈된 하루의 시작.


이런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 애쓴 지난날, 그리고 현재의 흐린 눈.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집 정리와 늘어진 장난감, 쌓여있는 설거지, 가는 길마다 밟히는 머리카락과 먼지는 모른 체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기려 하면 내 멋진 아침이 성립될 수 없다.


재생한 음악이 나오고 기분이 조금씩 몽글몽글 설레기 시작할 때 강렬하고 또렷한 비트가 치고 들어온다.


[안녕 친구들! 안녕 친구들~ 모두 뛰어놀자, 개구쟁이 뽀로로!! 뽀롱뽀롱 뽀로로로로!]


딸 장난감에 나오는 노래다. 하루에 대략 78번 정도 재생되고 반복된다. 10개의 노래를 미친 듯이 랜덤 하게 돌려 틀고(손바닥으로 쾅쾅 치며 놀다가 눌러지는 것이다) 성질이 급하셔서 리믹스 버전으로도 들려주신다. (그냥 마구 누른다, 노래를 듣기 위함이라기보다 장난감을 두드리는 용도다. 내 귀만 괴롭다.)


그렇다. 나를 감동으로 눈물짓게 했던 아기의 성장은 한 번의 드라마로 끝나지 않는다.


‘최종화’ ‘클라이맥스’로 끝이 나지 않고 계속 반복된다. 그 멋진 장면을 향한 지지부진한 서사가 매일, 매번 반복된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모습을 편집 없이 관찰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날의 카타르시스를 위해선 오늘의 무편집본을 견디고 또 견뎌야 한다.


그럴듯한 ost? 없다. [뽀롱 뽀롱 뽀로로로]가 장면의 맥락과 상관없이 치고 들어오고, 나는 수도 없이 이 성장 드라마에 개입해야 한다.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기어가면 ‘컷’을 외치는 감독처럼 ‘지지지지!! 더러워! 그거 안 돼!’ 하고 그녀의 도전을 훼방 놓는다. 누군가에게 나는 조력자이자 빌런이려나.


성장도 서사도 좋지만 ‘슬리퍼’ ‘전깃줄’ ‘휴대폰‘만 탐하는 아이의 성장 과정을 감동 드라마로만 치부하며 지켜볼 순 없다. 그녀를 훼방 놓을 수밖에…


새삼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다시 보인다. 내가 너무 귀여워하는 은우 (펜싱 전 국가대표 김준호 선수의 아들)도 편집본 속에서 드라마틱하게 귀엽고 예쁜 모습으로 보이지만 실제 24시간 무편집본으로 아이를 돌보는 양육자 입장에선 그 과정이 지난하고 힘겹게 느껴질 때도 있겠지?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무대 뒷모습, 관찰 예능을 기다리며 자연스러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고 “편집본 말고 감독판 좀 내줘요!!” 하던 덕후가 어느새 “편집본만 주세요…. 과정은… 좀 짤라줘요…”를 외치게 될 줄이야.


보고 싶은 모습, 겪고 싶은 상황만 겪고 싶은 마음을 헤아려 자르고 붙여서 내놓은 콘텐츠에도 ’ 보기 불편했다 ‘라는 피드백이 많은 세상인데…


모든 걸 봐야 하는 나는 가끔은 하루가 너무도 길고, 이 지루하고 지난한 반복이 내일 또 온다는 것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감독이고 내가 촬영감독인데.. 우리 집 슈퍼스타의 예쁜 모습을 기대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일가친척들을 위해 편집본만 보내는 건 내 몫이다.


나는 그냥 이 과정을 받아들이고 성장을 도우며 ’ 뽀롱 뽀롱 뽀로로로‘ 와 함께 신나게 노는 수밖에!


편.집.없.이. 하.루.종.일.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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