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태교의 부메랑

남성 편애자 딸 육아 이야기

by 날랩

모두들 아이가 아빠만 좋아한다고 하면 ‘그건 복이지~!’ ‘좋은 거 아니야?’라고 한다.


남편과 함께 있는 내내 아이는 내 품에 오려고 하지를 않는다.


내가 좀 안아보려 다가가면 남편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아서 강력한 거부 의사를 보인다.


몸은 편하지 않냐고?


어찌 보면 편할 수도 있지만 내가 안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아기가 폭- 안겨있지 않고 벗어나고자 힘을 주기 때문에 오히려 더 힘이 많이 든다.


남편이 없는 주중에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이 오셔서 아이를 돌봐주신다.


아이가 자아가 생기고 낯도 가리기 시작하면서 이마저도 뭔가 변화가 생겼다.


남편이 아예 밤에도 오지 않기 때문에 힘들 나를 걱정해서 부모님은 저녁식사까지 함께 하고 가시는데, 아기가 더 어릴 때에는 아빠는 거의 오지 않거나 식사 때만 잠깐 와서 아기를 구경하고 가시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기는 할아버지를 볼 때도 제 아빠를 볼 때에 버금가는 ‘하트 뿅뿅’ 눈빛을 발사하며 할아버지만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나에 이어 우리 엄마도 이 억울하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아니 하루 종일, 밥 해 맥이고 재우고 봐준 나는 무슨 뒷방 노인 취급이고 할비만 오면 저렇게 사랑이 뚝뚝 떨어져 억울하게?!”


드디어…. 내 감정이 애 앞에서 유치하게 경쟁을 한다느니, 엄마가 편하고 좋지 뭐 왜 그렇게 서운해하냐느니 하는 말에 공감해 줄 지원군이 등장한 것이다.


“엄마, 엄마는 그래도 할머니지 아는 배로 낳은 엄마잖아.. 진짜 억울하다니까”


엄마와 내가 억울하거나 말거나 아빠는 오랜만에 ‘효용감’ 뿜뿜한 황금기를 보내고 계시는 중이다.


도대체 얘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내 딸은 도대체 왜. 아빠와 할아버지만 이렇게 좋아할까.


그러다가 생각이 가닿은 것이 바로 태교다.


태교? 내가 태교를 했던가?


남들처럼 태담을 해주지도 않고, 클래식을 듣거나, 문화센터에 가서 아이를 위한 손뜨개를 배운 적도 없다. 내가 한 거라곤 하루 종일 행복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제로베이스원’ 영상을 주야장천 본 것. 그것뿐이다.


거기에 더해서 아이의 귀가 열리고 모든 것을 더 잘 느끼기 시작한다는 임신 후기부터는 “선재 업고 튀어”를 하루 종일 보았다. 방영하는 월요일 화요일이 지나면 그다음부터 비하인드 영상, 메이킹 필름, 명장면 돌려보기, 유튜브에 나오는 리액션 영상까지.


태명이던 ‘우쭈’야 보다 ‘선재’ 야를 더 많이 입 밖으론 내지 않았을까….. 돌이켜보고, 또 반성해 본다.


정말 그것 때문일까?


엄마가 너무 주야장천 남자 아이돌과 남자 배우 영상만 본 거니? 그래서 유독 아빠와 할아버지만 좋아하는 거니?


그런데, 그 들은 아이돌 외모도, 배우 외모도 아닌데……흠흠…


이것마저도 다 내 탓인 건가?


내가 날린 부메랑이란 말인가?


난 산모와 태아의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본 것뿐이라고… 딸아…


양보해서 아기가 아빠를 좋아하고 심지어 우리 아빠까지 좋아해 주는 일은 참 좋은 일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엄마를 밀치고 때리면서 거부하는 것은 매번 겪을 때마다 너무 서운하다.


그냥 태담 좀 하면서 너랑 친해져 볼 걸.


아빠가 말 거는 게 더 잘 들리고 아기한테 좋다는 그 말은 무시하고 나만 속닥속닥 너랑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둘걸.


아니 주중에 아빠가 없는 내내 나랑 놀아도 아빠만 등장하면 찬밥 신세에 때리고 꼬집는 통에 오기가 나서 더 달라붙고 안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속만 쓰린 날을 보내고 있다.


진짜 너무 서운한 날은 눈물까지 찔끔 흘리기도 한다.


뭘 안다고 벌써 차별에 편애냐 너…


결국엔 엄마를 제일 좋아하게 되어 있다고 위로하는 주변인들 앞에서 나는 또 그저 철없는 엄마가 되어버리지만, 그래도 엄마 좀 더 많이 안아주고 다가와 줘.


나의 최애야. 누가 와도 안 바뀔 나의 최애씨.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친구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언니, 태교 어떻게 하고 있어?”


나는 잠시 당황해서 머뭇거렸지만 솔직하고 당당하게 답했다.


“음… 제로베이스원으로 하지?! 매일”


그렇다. 나는 소문난 아이돌 덕후다. 나를 아는 모든 이가 나를 [덕후]로 인식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를 해 본 적도, 할 생각도 없다.


나는 덕질하는 내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여기는 사람이니까.


시대에 맞게 대통령이 바뀌듯이 나에게도 때마다 기억되는 최애들이 있고, 때마다 늘 진심이었다.


내 삶은 ‘최애 연대기’로 요약될 정도다.


초, 중등학교를 신화로. 중고등학교를 동방신기로 대학생 때부터는 샤이니로.


그렇게 끝날 줄 알았던 덕질은 서른을 맞이하여 ‘워너원’으로.


그리고 임신과 출산을 맞이하여 (?) ‘제로베이스원’으로.


뭐 그런 식이다.


조금 더 디테일을 첨가하자면 임신 준비 기간부터는 제로베이스원, 출산이 임박한 임신 후기는 ‘선재 업고 튀어’가 더 정확하다.


사실, 아이 태명인 ‘우쭈’보다 ‘선재’를 더 많이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내 인생을 마치 위인전 마냥 아이돌로 엮어 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했던 내 덕후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선재’보다 조금 불러보았던 뱃속의 ‘우쭈’가 태어난 뒤로 ‘남자’만 좋아하기 때문이다.


엄마인 내가 이런 식으로 아이를 몰아가는 것은 좀 지나치다 싶을 수 있다.


그런데 날 잘 아는 사람이 우리 딸의 모습을 보면 ‘아…. 진짜 태교 때문인가 보다’ 하고 공감한다.


너무도 명확하게 ‘아빠’와 ‘할아버지’만 편애하고 안겨있는 우리 아기.


하루 종일 옆에서 시중들고 밥 차리고 밥 먹이고 맞아도(?) 거부당하는 ‘엄마’와 ‘할머니’.


이 두 그룹의 차이는 명확하게 남자냐 여자냐이다.


요새는 낯을 가려서 아무한테나 안기지 않지만 낯을 가리기 전에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도 주로 삼촌들 곁에만 있곤 했다.


“엄마가 행복한 게 태교지.”


라고 말하면서 하루 종일 제로베이스원과 선재에 빠져있던 작년이 슬슬 후회되기 시작한다.


후회라고 말할 만큼 아이가 날 찾지 않고 심지어는 거부한다.


정말 내 덕질 때문에 아이가 나보다 아빠와 할아버지를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태어나기를 ‘남성’만을 열렬히 사랑하도록 태어난 존재도 있는 걸까.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 인지도 모르겠다.


내 남편과 내 아버지는 ‘아이돌’ ‘선재’ 비주얼이 아니니까 누가 봐도 정말 아니니까…..


내가 태교를 핑계로 내 가족을 너무 올려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며 농담 삼아했던 말이 점점 노골적으로 편애를 받고 나니 정답같이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아이에게 듬뿍 잘해주지 못하고서 ‘태교’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잘 못 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못난 맘으로 말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그렇다 쳐도 저희 친정 엄마는 저보다 더 헌신적으로 아이를 대하시거든요….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아무래도 태교 때문인 것 같아요”


매일 속상함과 서운함에 자신감을 잃어가는 초보 양육자는 오늘도 혼란하다.


내 딸이 왜 이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