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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Apr 15. 2020

내가 완벽주의자였다니!

심리상담으로 처음 알게 된 나의 성향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남편은 심리상담을 받아보라고 권유했다. 멘탈이 약해질 정도로 약해진 상황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옆에서 보기가 딱했는지 남편은 심리상담센터에 상담을 예약해주었다. 내가 직장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는 남편은 심리상담을 받고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방법을 찾길 바랬다고 한다. 시작은 남편의 권유였지만 나 역시도 심리상담을 통해 스트레스를 조절할 수 있다면 얼마의 값이든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예약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고 안내 직원분이 방으로 나를 안내한 뒤 간단한 심리 검사지를 건네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심리상담 선생님께서 방문을 두드렸고 나도 모르게 "아직 다 안 했는데요?"라고 먼저 말해버렸다. 괜찮다며 조금 일찍 상담을 시작하자는 말에 곧바로 상담이 시작되었다. 무슨 얘길 해야 할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자연스럽게 얘기가 흘러갔다.


"최근에 유산을 했어요. 그래서 남편이 상담을 예약해줬는데요. 그 일 때문에 상담을 받는 건 아니고요. 회사 내에서 관계가 너무 힘들어서요. 뭐가 문제일까요? 상담을 받아보면 무언가 제가 깨닫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요."  


유산을 경험한 일이 많이 슬프긴 했지만 상담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임신을 준비하면서 너무 급하게 생각했던 건 아닌 지 후회했고 건강한 아기를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며 내 자신을 위로했다. 남편과 아기를 가지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의논했고 충분히 마음을 들여다봤다고 생각했다.


"유산을 경험한 것도 큰 일이에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볼 수 있어요."


그런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유산하고 마음이 쿵 내려앉은 건 사실이다. 그동안 '괜찮다. 괜찮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견뎌왔다. 그런데 유산 후에도 개인적인 아픔과는 별개로 회사 내에서는 더욱 안좋은 상황이 벌어졌고 회사는 개인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회사사람들은 내 상황을 다 알면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래 사람들에게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산 후에는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일말의 기대가 생겼고 회사에서의 스트레스가 전보다 크게 느껴졌었다.


상담하고 싶은 내용이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라고 말하니 선생님께서는 회사에 대해 편하게 얘기해보라고 하셨다. 지금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들과 회사에서의 일상에 대해 얘기하니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회사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나요?"


늘 생각했었다. 맘에 안 드는 사람 욕하면서 풀 수 있는 동료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요. 없어요."


선생님은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내 회사를 다니면서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나는 상을 받았던 일, 성과가 좋아서 인센티브를 많이 받았던 일들을 신나서 얘기했다. 얘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나아지고 있었다. 다시 동기를 심어주어 회사에 대한 의미를 일깨워주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회사생활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유진씨는 완벽주의자이신 것 같아요."


단 한 번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일을 잘한다는 얘기를 종종 듣기는 했지만 실수도 꽤 하는 편이었다. 물론 실수를 하고 나서는 바로 잡았고 일은 프로답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스스로를 완벽주의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내가 완벽주의라고?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나를 덜렁이라고 부른다. 손을 대면 잘 고장내고 뭐든 대충대충하는 나에게 아직도 엄마는 잔소리를 한다. 실제로 잘 다치고 잘 넘어지고 부수고 깨지기 일수다. 결혼하고 나서는 남편이 거의 다 챙겨주는 편이다. 집안일도 잘 못하고 살림에는 완전 젬병이다. 남편은 "여보다워"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남편이 말하는 "여보다워"의 의미는 실수가 많고 무슨 일을 할 때 대충한다는 뜻이다. 옷걸이에 손을 베었을 때도 자동차를 살짝 긁었을 때도 남편은 웃으며 "여보다워"라고 말하곤 했다.


30년을 넘게 덜렁이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내가 완벽주의라고 하니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는 완벽주의라는 말은 처음 듣는데요? 저 되게 허술한 사람이거든요."


"오늘 상담하러 일찍 오셔서 직원이 심리 검사지를 드렸잖아요. 보통은 제가 똑똑하고 문을 열면 따라 나오는데 유진 씨는 검사지를 다 마무리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하셨거든요. 끝마무리를 짓고 싶었던 거죠. 그게 완벽주의의 성향으로 보였어요. 회사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얘기를 듣다 보니 일도 굉장히 프로페셔널하게 하실 것 같아요. 아닌가요?"


듣고 보니 선생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나는 꽤 허술하고 못하는 게 많은 사람인데 왜 회사에서는 완벽주의가 된 거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일을 잘한다는 말은 꽤 들어봤지만 그렇다고 저를 완벽주의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저는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고 생각했거든요.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현재 회사에서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하셨잖아요. 회사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완벽주의의 성향이 증폭된 것 같아요. 일상에서는 허술해도 회사에서는 완벽주의인 거죠."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동안 나를 잘 알고 이해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갑자기 스트레스의 원인을 알게 되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회사에서는 나만의 기준을 세워두고 완벽하게 맞추려다 보니 스트레스가 커졌던 것 같다. 관계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깨달았다. 부하 직원과의 관계가 어려웠던 일은 내 기준이 높아서 그 친구가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다른 동료들과의 좋지 않은 관계도 ‘나는 열심히 일하는데 왜 저들은 열심히 하지 않지?’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나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모든 사람의 기준이 같지 않다는 걸 알았더라면 관계가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뭉쳐서 생각하지 말고 조각조각 내어 가볍게 생각하는 연습을 해보세요."


여러 안 좋은 상황이 한꺼번에 몰려 힘들어하는 나에게 좋은 솔루션이었다. 사건을 하나씩 나눠 생각하는 연습을 하니 스트레스가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내친김에 심리검사를 진행해보지 않겠냐는 권유에 선뜻 하겠다고 답했다. MMPI 검사였는데 검사 문항에 답을 체크한 뒤 다음 상담 전날까지 센터에 문자로 보내달라고 했다.


일주일 뒤 두 번째 상담일이 되었다. 첫 번째 상담이 끝나고 다음 상담을 받기 전 일주일 동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어려운 숙제를 오래 묵혀 놓다가 풀어버린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표정이 정말 좋네요. 굉장히 편안해 보여요."


"네. 지난번에 저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돼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마음도 편해졌고요.”


선생님은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심리검사의 결과에 대해 먼저 얘기해주셨다.


"유진 씨는 본인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저는 제가 좋은 것 같아요.”


"본인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편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도 있으신 분으로 보이네요. 성격이 좋아 보여요."


항목 별로 천천히 설명해주셨고 나의 심리상태는 정상 범위라고 하셨다. 첫 번째 상담 후에 마음이 많이 편해졌고 두 번째 상담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심리검사의 결과를 듣고 싶어 다시 상담을 간 것이었다. 검사 결과도 정상이고 표정도 밝아져서인지 선생님도 다음 상담을 권유하진 않았다.


일상에서 덜렁이인 내가 회사에서는 인정 받기 위해 완벽주의자가 된 것처럼 사람은 때때로 다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신입 때부터 일 잘한다는 얘기를 꽤 들었지만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회사에서는 입사하자마자 성과에 대한 보상과 인정을 받았다. 그렇게 3년을 넘게 일했고 나는 계속해서 인정을 받고 싶어 일에 대해서는 완벽해 지려고 했던 것이다. 누가 그러라고 다그친 것도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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