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mmer Apr 09. 2019

저는 아니라고 해주세요.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나는 희귀 질환이 맞다는 사실을.


병원을 가보기로 했다. 엄마에게도 병원에 가자고 가서 뭐든 듣고 오자고 했다.  카페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집과 가장 가까운 병원을 찾았고, 예약이 안 되는 탓에 아침 일찍부터 나갈 준비를 했다.


밤새 뒤척인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엄마의 낯빛을 보니 나랑 똑같았다.  여러 겹 껴입었음에도 어느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는지 온몸 구석구석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병원은 집에서 버스로 약 1시간 정도. 막히는 시간까지 생각해서 병원 오픈 시간과 얼추 비슷하게 도착할 거 같았다. 병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엄마는 창밖을 나는 작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인지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남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다 문득 엄마를 물끄러미 봤다. ‘지금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이 침묵을 더 가지고 싶었다.


사실 나는 내 안에서 부정하고, 발버둥 치는 나를 보고 있었다. 가엾고 불쌍한데, 그런데 손을 내밀어 주고 품에 안아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울부짖는 나를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병원 오픈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도 홀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내 상태와 그들의 상태를 비교했다. 그러면서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나는 아니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신경섬유종인 거 같아서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익숙한 듯 개인정보를 적으라고 했고 이어 ‘현재 대기 환자가 많아서 1시간 이상은 기다리셔야 해요.’라고 했다.


꼴 보기 싫은 혹들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1시간쯤은 기다릴 수 있었다. 20년 넘게 해온 시간에 비하면 겨자씨만큼도 안 되니까.


또 한편으론 나보다 먼저 온 이 사람들은 얼마나 일찍 온 걸까? 나도 이들도 같은 마음으로 왔을 터. 그만큼 절박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침 일찍이 대수냐고, 일단 가자고 하지 않았을까?


대학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을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땐 내가 먼저 장난을 걸었는데. 어쩐지 이곳에선 꿀 먹은 벙어리였다.


마주 앉은 담당 의사는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닌 1형으로 흔하게 보이는 증상이며, 다발성 신경섬유종증으로 보인다고 당장 눈에 보이는 큰 혹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큰 혹의 경우는 조직검사도 하자고 덧붙였다.


그렇다. 나는 희귀 질환을 가진 사람이었다. 부정하고 또 부정했는데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이전 03화 결혼은 하지 않을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