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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로 Feb 23. 2024

그림을 샀다.

나 모던한 것 좋아하는 거 아니었네

 친구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

우리와 1년 반 정도의 시간 차이를 두고, 꽤 높은 경쟁률을 통과해 분양을 받았을 때,

친구네 집에서 술을 마시고도 대리운전을 할 것인가 차를 두고 택시를 탈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고 날 좋으면 슬렁슬렁 집까지 걸어갈 수 있겠구나 흐뭇한 상상을 했다.

동네 피부과에서 보톡스 시술을 예약해 둔 날, 이사 온 친구네 집에 들러 좀 늦지만 저녁을 먹었다.

저녁 6시에 퇴근을 하고, 예정대로 피부과에 들러 시술을 받고도 가능한 동선이었다.

보통은 평일의 퇴근 후 두 개의 스케줄을 소화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서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을 텐데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게 이렇게 효율적일 수가 없다.


그 집은, 내 친구의 생애 첫 본인 명의의 집이다.

40대의 나이에 모든 사람이 내 집 마련을 하는 건 아니지만, 또래보다 상당히 어린 나이에 가정을 꾸려 아이들이 고등학생인 것을 생각하면 늦은 편이고 그래서 애정이 집 곳곳에서 묻어났다.

가구와 러그, 커튼 등의 비교적 굵직한 것들 이외에 소소한 오브제까지 하나하나 고르며 신경 썼겠구나, 행복했겠구나 하는 느낌.


친구가 이사 오고 첫 방문을 했던 날, 집에 돌아왔는데

문득 우리 집이 굉장히 비어있는 느낌을 받았다. 물건이 밖에 나와있는 걸 싫어해서 아일랜드나 거실 선반 등에 물건이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런 데서 오는 깔끔함이 아니라 '아직 가꿔지지 않은 휑함'의 느낌이라 다소 당황스러웠다.

이사 온 지 이제 1년이고 이사 올 때 신축 아파트임에도 적지 않은 규모의 인테리어 작업을 거치고 들어왔기에 늘 예쁘다고 생각했었는데 무슨 일인가....


우선, 거실 바닥에 러그나 카펫이 없다.

물론 처음에는 있었다. 그것도 흔치 않은 원형의 러그를 깔아 두었었다. 그런데 치웠다. 이사 오면서 새로 산 신상 로봇청소기가 러그의 두께도 못 올라가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인데, (메뉴에 러그에 올라가면 흡입력이 세지게 하기 같은 기능이 있지만 올라가야 기능을 발휘하지!) 러그 테두리에서 오락가락 헤매는 꼴을 지켜보기 힘들었고 그래서 매일 러그 위는 다시 청소해야 하는 것도 번거로웠기에 그냥 치워버렸다.

같은 이유로 소파용 사이드테이블(테이블 다리가 11자가 아니라 모로 누운 ㄷ자로, 바닥에 테이블 너비만 한 파이프가 있는 스타일인데 바로 그 파이프 부분을 넘어보려다가 종종 청소기가 그 위에서 멈춰버렸다) 도 없앴다. 러그의 유무가 거실을 따뜻하게 보이는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한다는 걸 알지만 번거로움이 예쁨을 이겼다.


또 하나, 벽에 장식이 없다.

이사오던 날부터 그림 사이트를 수없이 들락였는데 1년째 없는 이유는, '이거야!'싶은 그림이 없었기도 했고 무엇보다 남편이 벽에 못 박기를 단호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못을 박을 수 없다는 이유는 '구멍을 원상태로 복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길래 내 집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했더니, 사람 마음은 변할 수 있고 그래서 어느 날 저 자리에 그림을 안 걸고 싶다 생각했을 때가 올 거라는 기가 막힌 답변이 돌아왔다.... 할까 봐 안 한다.... 는 논리는 남편의 흔한 레퍼이고 내가 불편해하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그간 여러 번 얘기를 했었고, 초반보다 많이 긍정적이 되기는 했지만 꼭 이렇게 한 번씩은 벽을 쳐서 마음이 상한다.

필름 마감 벽이라 꼭꼬핀도 불가능하고, 몰딩도 굉장히 얇게 둘러서 (남편 말로는) 액자레일 설치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못과 꼭꼬핀과 액자레일 없이 그림을 걸어야 하니 어쩌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어도 크기나 무게 등에서 탈락이었다.

님편은 이어 할 말이 많은데 뭐부터 할까 생각하는 것이 역력했을 내 표정을 보고 대안을 꺼내놓았는데(그러기 전에 처음부터 이럼 참 좋겠다고), 3M 훅이 꽤 큰 무게를 견딘다 하니 그거 사 쓰면 괜찮겠단다.

어찌 되었든, 벽에 그림을 걸 수 있게 되었으니 다시 그림 찾기에 들어갔다.


굉장히 많은 선택지가 있었고, 그래서 고를 수가 없었다. 오늘은 심플하고 색깔 두어 가지 이상은 안 들어간 그림을 찾다가, 내일은 그것보다 화려한 그림이 좋겠다 싶어서 화려한 걸 찾다가, 적당한 크기의 그림 여러 개를 연작으로 붙일까 하다가, 큰 그림 하나만 걸까 하는 식이라 결정이 어려웠다.

고민의 가장 큰 원인은 그림값이 저렴하다고 할 수는 없어서, 몇 달 걸었다가 별로면 바꿔 걸어야지 할 수준이 아니더라는 것.


그러다가, 며칠 전 자기 전 잠깐 들어갔던 앱에서, 또 별 습관처럼 그림을 넘기다가, 눈에 딱 띄는 그림을 만났다! 그때는 원하는 바가 돌고 돌다 '가로로 길고 높이는 좁은, 와이드 대형액자'를 찾던 중이었는데, 찾던 바와는 다른 일반적인 직사각 비율의 그림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갑자기 도파민이 도는 느낌. 그동안 '뭐 나쁘지 않네, 이 정도 괜찮겠네' 했던 그림들이 많았는데 그때 깨달았다, 그동안 그런 생각을 했던 그림들은 결국 마음에 안 들었던 거다.


그래서 결제를 했고, 아직 구매처에서 출발하지 않은 그 그림을 매일매일 기다리고 있다.

그림에 문외한인 나인데, 이런 거구나 그림. 그냥 느끼는 거.

빨리 왔으면 좋겠다. 커다란 그 그림이 벽면에 걸린 우리 집 거실이 보고 싶다.


+그림 산 다음 날 카펫도 결국 새로 장만했다. 가능한 두께가 두껍지 않고 테두리가 딱 붙어서 로봇청소기가 잘 올라갈 것으로 기대되는 것으로. 그런데 펼쳐두고 온 다음날 로봇청소기 앱에서 경로를 보니, 기가 막히게 딱 러그 있는 부분만 네모나게 남겨두고 청소한 것이 확인되었다.


++ 그림이 와서 추가해보는 실사진 =)

     기대만큼 우리집에 잘 어울렸고, 다행히 나뿐 아니라 남편과 아이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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