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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연 Mar 28. 2019

그 집안의 제사 1_영원한 이방인

결혼한 지 15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내가 알기로 나의 시부모님은 며느리를 보기 전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셨다. 고향인 부산을 떠나 일찍 서울에 정착하셨을 뿐 아니라, 시아버지가 해외 근무가 많으신 직업이셔서 그랬다고 얼핏 들었다. 그런 이유로 시부모님은 비록 장남이었지만, 고향인 부산의 작은아버지 내외가 자연스레 지내게 되신 듯하다. 물론 여력이 되실 때 종종 참석하신 것으로만 예측할 뿐이다. 제사에 관한한 오로지 나의 짐작과 추측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속시원하게 고백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느리를 맞이하며 지내기 시작한

 ‘제사’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결혼하기 전 즉, 시부모님이 며느리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제사를 직접 지내지 않으시다가, 며느리를 맞이하면서부터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추측으로는 딸만 셋인 부산의 작은집에서 제사를 모시는 것을 미안해하셨던 것 같다. 때문에 “며느리 들이면 우리가 지내겠다”고 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처음엔 나에게 비밀이었다. 하지만 제사음식을 돕고 함께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 있는 작은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촌 형수이신 큰 어머님이 서울로 올라오시면서 자연스레 알게 됐다. 부산 작은어머니는 처음으로 제사를 주도하는 우리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행님~, 그래 하믄 안 됩니더! 이래 하셔야지예~”     

며느리인 나조차도 듣기 거북할 정도로 건건이 지적과 훈계를 했지만, 시어머니는 얼굴을 붉히시며 그 말씀을 조용히 따르곤 하셨다. 제사 지낼 때 왜 그렇게 어머니의 기가 죽고, 손아랫동서의 목소리가 크고 당당했는지 그 당시엔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아니, 손위 형님이 제사를 모시고 있는데 왜 손아래 동서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라고 말이다.


나중에서야 장남을 대신해 고향에서 평생 제사를 모신 작은 며느리의 텃새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랬기에 장남이었지만 제사상을 차리는 일에는 서툴렀던 어머니가 그렇게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서울 토박이인 시어머니를 ‘서울깍쟁이’라고 생각하며 은근히 경계하던 ‘부산토박이’ 작은 어머니는 조카며느리인 나 앞에서 위세가 등등했다.      


부산에서는 제사상에 문어가 꼭 올라가야지예. 부산에서는~ 이케 지냅니더!
저는 과일도 최고 아니면 제사상에 안 올렸어예. 순서를 잘 지켜야지예.   

그러한 까다로운 부산 작은 어머니에게 책잡히기 싫어서였을까.

시부모님은 가끔 제사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아버님은 아버님 나름대로 동생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테고, 어머님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시부모님 제사스트레스의 가장 큰 희생양은 바로 큰며느리이자 외며느리인 나라는 점이었다. 보통 열흘 전부터는 제사에 대한 상의를 하기 위해 전화를 하셨다.


회사 일이 중요한 며느리

제사가 먼저인 시부모

하지만 난 매일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수시로 잡히는 회의와 성과에 대한 압박, 지방 취재일정, 바쁜 평일을 대신해 주말마다 원고를 쓰러 회사를 가야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20대 후반이었으니 일을 한창 배워가며 사회생활에 적응할 때이기도 했다. 업무스트레스가 많았고 삶에 있어 워라밸이 무시된, 일의 비중이 90% 일 정도로 일에 빠져 살았다. 제사에 대한 시부모님의 한마디 한마디는 무거운 돌덩이처럼 내 가슴을 짓눌렀다.

무엇보다 제사의 특성상 주말이나 휴일에 지낼 수가 없었다. 확률적으로도 평일이 많았을 뿐 아니라 주말 특히 일요일 저녁의 제사는 평일보다도 더 가혹하게 다가왔다.     


“며늘아, 월요일이 제산데 음식 준비도 해야 하고 휴가 못 내니?”
“도저히 힘들어요. 저녁에 회사 끝나고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 회사가 어디 있니? 큰며느리가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데, 안 보내준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꼭 일찍 와라.”     


사실 당시 회사 분위기상 제사를 이유로 휴가를 낸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특히나 결혼한 여자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는 조직문화, 그 누구도 제사를 지내는 정도로 휴가를 내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막무가내였다. 제사를 지낸다고 하고 회사를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안 되면 점심만 먹고 조퇴를 하라’고 애원하시다시피 했다.

집요하게 전화가 왔고, 신혼 초의 며느리였던 나는 도저히 외면하기 힘들었다.

사실 당시 시어머니는 난소암3기 진단을 받은 상황이었다. 음식조차 하기 힘든 아픈 어머니가 제사만큼은 지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시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휴가를 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 안 가면 평생 힘들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막상 도저히 제사 때문에 조퇴를 해야겠다는 말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상사와 나는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다. 결혼한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결혼했다고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며 경고장을 날리기도 했다.


시가 제사를 위해 만들어낸

친정엄마의 교통사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일에 있어서는 늘 프로라는 생각으로 일해 왔다. 특히 그게 무엇이든 결혼한 여자라서 조금이라도 회사에 피해를 준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찾아낸 거짓말은 이것이었다.    

“팀장님, 어떡하죠. 저 빨리 병원으로 가봐야겠어요!"
"왜? 무슨 일이야?“
“저희 엄마가 방금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실려 가셨는데, 아빠도 지방에 계시고 제가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빨리 다녀와!”     

아, 이렇게 큰 거짓말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느껴졌다. 왜 그것밖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지금이라면 물론 이런 고민과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로선 그만큼 고민이었고, 절박했다.

친정엄마를 교통사고까지 나게 하고 시가에 제사를 지내러 가야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시아버지조차도 얼굴도 본 적 없다는 그 조상들 때문에 울 엄마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최근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곤 하지만, 당시로선 퇴사를 각오하지 않는 한 ‘연차’를 쓸 수도 없는 회사에도 짜증이 났다.      


남자들은 이런 고민을 하며 살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않았다. 남편에게 제사에 대한 나의 고민을 얘기하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제사가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두 분이서 이렇게 원하시는 데 그렇게 해야지. 그리고 제사 음식하는 거랑 장보는 거 같이 하자.”

남편은 함께 장을 보고, 음식하는 것을 돕고, 제사상을 차리고 치우는 것을 도왔다. 도련님도 물론 함께였다. 하지만 그 제사의 주체는 나였다. 시부모님이 며느리를 보면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듯, 제사는 며느리에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남자들이 만든 제도였다.  


제사를 지내고 난 저녁, 자연스레 제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왔다. 나는 나의 의견을 명확하게 피력하리라 마음을 먹고 자리에 앉았다.

남편이 먼저 말씀을 드렸다.


“저희도 다 일을 하고, 어머니도 아프신데 앞으로 제사를 꼭 지내야 할까요?”
“정 그러면 새식구가 왔다고 조상들에게 신고하는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으니, 3년만 지내도록 하자.”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새식구(며느리)를 맞이하고 조상님께 신고식(?)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이해가 잘 안 되긴 했지만, 어쨌든 3년이면 끝난다는 사실에 어깨가 가벼워졌다.

‘그래, 3년만 기다리자!’     


2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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