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 숙종 Jan 10. 2019

18. 겨울까지 살면 돼!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잖아!”     


 요르단을 떠날 때 꼭 말해야 하는데 못했다. 내가 이해 못한다고 남을 탓할 수는 없다. 나는 절대 따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는 살고 있었다. 그가 가르쳐준 아랍어는 비싼 학원비를 많이 절약하게 했다. 요르단에 와서 근무한 문화부 생활 3할은 그와의 시간이었다. 이런 친구를 남기고 요르단을 떠나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그는 내게 많은 것을 줬다. 특히 그가 편안하게 세상을 사는 모습은 내게 큰 선물이 되었다. 지금 내가 버틸 수 있는 것도 그가 준 선물 때문이다.    


 요르단에서 봉사활동을 끝내고 3년 6개월 만에 돌아왔다. 서울은 여전히 분주했다. 꽃이 한창이고 숲은 여름으로 흘렸다.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세상으로 나갔다. 막 퇴직했을 때 닥쳐왔던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 

 ‘난 뭘 해야 하나?’ 

 ‘무엇으로 살아야 하나?’

 내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일을 찾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떨 때. 친구는 실실 웃으며 내게 말한다.

 “겨울까지 살면 돼!”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 내일도 뻔뻔한 하루다. 일없는 시간과 마주앉아 있을 테니! 그래도 친구가 있어 두렵지 않다. ‘나도 겨울까지 살면 될 테니까.’ 


 요르단은 겨울 한철 비가오고 다음 겨울까지 오지 않는다. 사막에 사는 양들이나 길가 올리브나무도 겨울에 내린 비로 한해를 산다. 친구의 삶도 메마르고 쓸쓸했다. 양들이 겨울을 기다리며 살 듯, 그도 다음 겨울까지 살고 있었다. 그는 숱한 사람들 속에 있지만 혼자 있는 사람이다. 경제관념을 잃어버리고도 잘 살아간다. 결코 비를 기다리지 않는 올리브나무처럼 단단한 삶을 사는 그런 친구였다.   


 독일 병정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이름은 ‘아슈랍프’다. 병정이 제복을 입듯, 늘 똑같은 옷만 입고 다녀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딱 봐도 편안했다. 3년 전 문화부에 처음 파견되어 직원한테 그를 소개 받았을 때다. 불쑥 나온 배를 가린 낡은 조끼에 커피가 얼룩졌고, 주름진 얼굴에 콧수염까지 입술을 덮고 있어 나이가 들어보였다.

  그는 47살이며 총각이라 말해서 나를 놀래 켰다. 요르단 사람들은 늘 햇빛과 함께 살아서 실제 나이보다 열 살 정도 들어 보인다. 문화부에서 사진작가 일을 한다. 정규 직원은 아니고 계약직이다. 나는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영상미디어 직종에 파견되었다. 사진작가 일을 해야 하니 그와 업무가 겹치는 것이다. 봉사자인 내가 그의 일을 하면, 문화부에서 월급을 주면서 그를 고용할 이유가 없어진다. 

 물론 내가 한국에서 전문 사진작가는 아니었지만, 방송국 출신이고 직종이 미디어 쪽이라 그들은 나를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또 ‘아슈랍프’가 사용하는 카메라보다 내 것이 선명도가 높아 일부직원들은 내 사진을 선호할 수 있다. 그와 첫 대면은 큰 부담이 됐다. 나로 인해 그가 직장을 잃을 가능성이 있어서다.    

 

  ‘아슈랍프’는 개연치 않았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오히려 그는 일을 처음 시작하는 나를 이끌었다. 사진 찍을 일이 있으면 항상 함께 다녔다. 그가 찍은 사진은 다음날 신문에 게재되는 일이 많았다. 나는 조수여서 그의 업무가 중복 될 때, 홀로 나가 사진 찍어 내 작품이 신문에 실린 경우가 몇 번 있었다. 특히 문화부 장관 행사에 많이 갔다. 그때마다 난 조심스럽게 ‘아슈랍프’ 뒤에서 셔터를 눌렀다. 

 사진은 포지션이 50% 먹고 들어간다. 좋은 자리에서 좋은 사진이 찍힌다. 방송국 시절 중계차를 끌고 나가 좋은 장소를 선점하기 위해 10시간이나 빨리 현장에 가서 기다린 적도 있다. 그만큼 사진작가는 피사체가 잘 찍히는 자리를 중요시 한다. 그런데 그는 나를 앞으로 끌어내며 자리를 양보해주곤 했다.  


 나는 출근해서 종종 그의 전화를 기다린다. 점심 무렵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그와 한 시간씩 얘기하는 것이 문화부에서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나는 헷갈린 아랍어 표현들은 쪽지에 적어놓고 그의 전화를 기다리곤 했다. ‘아슈랍프’는 해결사였다. 그는 은지화(銀紙畵) 그리듯 담배 은박지를 뜯어 그림을 그려가며 내게 설명해줬다.


그의 손엔 항상 커피와 담배가 들려있다. 하루 커피 10잔을 마시고, 담배 2갑을 피운다고 말한다. 그는 건강을 걱정하거나 돈을 은행에 저금하지 않는다. 내 음식 값도 주로 그가 내곤 했다. 내일 삶에는 관심 없는 사람이다. 미래를 포기한 건지? 아님 기대하지 않는 건지? 오히려 내가 걱정이 되어 말했다. 

“나이 들면, 저축해 둔 돈이라도 있어야 병원도 가고 먹고 살 텐데?”

“하하하 그때가 언제일런고?”   

그냥 하고 싶은 것, 그때그때 다 해버리고 사는 사람이다. 무슬림이면서도 ‘알라’ 신에게 기도하지 않는 유일한 친구였다. 여자 친구도 없다. 내 스타일을 좋아하는 여자는 없다며 웃는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바람 잘 때까지 엎드려 있는 풀잎처럼, 세상 걱정 안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이지적인 자유로움에 젖은 친구다.   

  

 문화부에 파견 된지 얼마 안 돼 그의 차를 탈 기회가 있었다. 차는 낡아도 너무 낡은 지프차였다. 차가 도로에서 굴러간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30년 된 러시아 차야!” 자랑스럽게 말했다. 문제는 30년 된 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차 안이었다. 청바지를 입은 나는 뭐가 묻을까봐 좌석에 앉을 수가 없었다. 차안은 마시던 커피와 담배 등 생활 쓰레기로 가득했다. 담배꽁초가 푹푹 담긴 종이 커피 잔은 햇빛에 마르고 있었다.   

  

 그는 3년 동안 나를 세 번이나 집으로 초대했다. 그의 차를 타고 다니며 그를 웬만큼 적응했지만, ‘아슈랍프’ 집은 적응불가였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선 그의 집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차는 앞좌석에 앉아 바깥만 내다보면 불결함을 극복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집은 앉을 곳도 내다볼 창문도 없었다. 나는 여기가 어딘지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한동안 살지 않은 집이었다. ‘이런 꼴을 해놓고 손님을 초대하다니!’

 “세상은 혼자 사는 거야!”하며 나한테 과시하는 것만 같았다. 장마에 휩쓸린 잡동사니가 이집으로 왕창 밀려 온 듯 했다. 컴퓨터 마우스가 지나는 책상 일부분만 반들거렸고 온통 먼지여서 사물이 뚜렷하지 않았다. 나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서 말했다.


 “청소 안한지 얼마나 됐어? 하하”

 “글쎄, 4년 정도 됐을걸! 크크큭"

 “야! 이건 예술이다.”

 “흐흐 좀 앉지”    


 나는 이 집 부엌이 궁금했다. ‘방이 이 정돈데 부엌은 어떨까?’ 화장실 가는 척하며 안을 들여다봤다. 부엌은 ‘예술’ 그 이상이었다. 설거지 하지 않은 그릇이 싱크대에 켜켜이 쌓여 있었고, 파리는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빛 속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비위가 상해 서둘러 방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내게 비수를 꽂았다.    


 “우리 점심 해 먹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17. 트로이 목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