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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지않는돌고래 Aug 26. 2021

설상가상이 나에게보답하는 것들에 대하여

새벽의육아잡담록


1.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즉, 삶을 깊이 있게 다가가게 만드는 요소에 “설상가상”이란 게 있다. 철권 플레이어는 초딩에게 연일 10단 콤보로 후드려맞고 깨져봐야 비로소 철권의 의지를 가지며, 투자자는 연짱 하한가에 2400만 원이 500만 원으로 돌아와 봐야 제대로 금융시장을 이해할 불씨를 얻는다(… … 지금, 세수하고 옵니다. 기다리세요)


육아인으로 비유하면 자식이 하나인데 하나 더 늘어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2.

자식이 생겼다는 기쁨도 잠시, 자식이 또 생긴다는 기쁨은 반드시 그만한 괴로움을 동반한다. 아이는 늘지만 남편은 늘지 않으며 엄마도 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둘이 하던 일을 각자 해야 하며 교대하여 휴식하는 일도 없어진다. 


오직 월급과 계좌만이 깊은 안식에 들어간다. 


3.

나의 경우, 주말마다 첫째인 하루를 마크하고 있는데 이 녀석은 나와는 다른 점이 많다. 시야에서 몇 명 이상의 인간이 존재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은 같으나 탈 것, 개중 기차에 변태적 집착이 있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꽃이 있으면 가서 뽀뽀한다. 내 자식이 아니었다면 정신이 어떻게 된 놈이 아닌가 생각했을 게다.


하루는 좋지만 이 취미는 나와는 도통 맞지 않는 것으로 오직 다양한 열차를 타기 위해 지난 주말 토요일엔 수원(무궁화호), 일요일엔 천안(KTX), 이번 주 토요일엔 청평(ITX-청평), 일요일엔 양평(KTX-이음)을 다녀왔다. 


이왕 갔으며 주변이라도 둘러보고 싶은데 이 녀석은 역내에 있길 원하며, 역 밖으로 나가도 반경 200m 이상 나가는 건 드물다.


나가도 좋아하는 꽃이 있으면 뽀뽀하느라 멈춘다.


… … 


아빠로서는 과연, 설상가상이다. 도대체 나는 여기서 어떤 재미를 느껴야 한단 말인가. 


4.

장점은 있다. 타지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는 역과 주변의 문화, 사람을 관찰할 기회를 얻는다. 이는 내가 부산 태생임에도 평생 서울에서만 산 사람처럼 문을 잠그고 지냈음을 강제 인지시킨다.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라 해봤자 이 조그만 나라의 수도인 서울에서 불과 몇 킬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허나 문화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빈부가 다르다. 이는 다른 ‘공기’를 만든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나가지만 농담을 거는 방식이 다르며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표정이 다르다. 


어떤 역 주변에는 특색 없는 프랜차이즈만 잔뜩 있다. 노상 주점엔 양팔에 가득 문신을 한 20대 청년이 왠지 모르게 앞의 청년에게 막말을 쏟아내고 이상한 할아버지가 하루에게 사탕을 달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농담을 한다. 어떤 역 주변에는 그냥 빙긋이 미소를 보내며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육아인이라면 알 수 있는 친화적 접근의 확률도 높다. 


이 다른 공기의 연유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정밀히 알지 못하나 불과 서울에서 수 십 킬로 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의 ‘공기’가 이토록 다르다는 감촉만큼은 선명하다.


이 좁은 나라에서 말이다. 


5.

흔히 집돌이라 불리는, 문을 잠그고 성 안에서만 살아가길 좋아하는 나로서는 자식의 이런 변태적 취미가 없었다면 타지를 접하는 감수성이 더없이 낮아질 뻔했다. 즉, 모든 곳이 부산이나 서울과 크게 다를 바 없겠지, 하는, 게으른 상상력 속에서 가랑비적 무식함에 젖어 박물관에 전시되기 직전이었다.  


지역의 빈부 문제와 지역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면밀히 살펴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나 역과 주변만 돌아다녀도 가보지 않은 사람과는 확연한 차이를 몸에 새긴다. 지역경제가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지도 눈치 빠른 자라면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역과 주변의 상권은 많은 걸 말하고 있다.


친구였다면 취미나 감성이 맞지 않아 도통 친해질 리 없는 하루인데 마침 자식으로 태어나 보지 못했을 ‘꽃’을 본다. 둘째인 하나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전담마크를 하지 않았을 터이니 주말마다 이리 오롯이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을 게다.


괴로움과 기쁨은 정비례하니, 괴로움이 깊어야 높은 기쁨을 안다. 


“설상가상”은 삶의 깊이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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