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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여행자 Jan 14. 2021

견디는 시간들

며칠 전 한 공기업 사보팀으로부터 칼럼을 청탁받았다. 주제는 <삶을 변화시키는 힘, 의지>라고 했다. 아하 새해로구나. 그런데 의지력에 대해 내가?? 과연 무엇을?? 망설였지만 담당자는 고맙게도 내 책을 읽었다며 '하루'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쓰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나는 써보기로 했다. 새해 첫 제안이었으니까.


새해 내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기.' 남들처럼 새벽 네시 다섯 시가 아니라 그저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딱 한 시간만 일찍 일어나 급하진 않지만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과를 마치자는 계획이었다. 중요한 루틴이라 봐야 산책과 공부가 전부였지만 오전에 그것들을 마치지 못하면 스케줄상 외부 변수가 많은 오후엔 빼먹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감이 있는 원고, 의사 결정, 해야 할 연락 등에 비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산책이나 공부는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려나곤 했다.

1월이 절반쯤 지난 지금, 결론만 말하면 나는 단 하루밖에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그날이 오늘이다). 12월 31일까지 이어져온 생활 리듬을 갑자기 바꾸는 건 무리였다. 알람을 듣고 한 시간 일찍 눈 떴다가 눈 한 번 더 깜빡였을 뿐인데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기가 일쑤, 결과적으론 오히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는 날이 많았다.


'이런 내가 의지력에 대해 무슨 말을 쓸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나는 나 자신을 꽤나 신뢰하는 편 아닌가? 의지력은 없지만 느릴지언정 하고 싶은 건 하고, 우연과 인연의 회오리 속에서도 삶의 큰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고자 애썼다. 의지력 없는 내가 가진 힘이 있다면 그건 불완전한 나를 견디는 힘, 나를 아끼기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인 것 같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기에 최초로 성공한 오늘 하루,  며칠 안 풀리던 칼럼을 의외로 쉽게 완성했다.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성취감 덕일까, 이른 산책으로 몸과 마음을 리프레시했기 때문일까. 둘 다 아닐 것이다 그냥 풀릴 때가 되어서 풀린 것뿐. 하루에 네다섯  시간 앉아서 끙끙 대도 안 풀리는 글이 있는가 하면 산책 중에 휘리릭 구성이 잡히는 글도 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풀릴 때 잘 받아 적기 위해 나를 좋은 상태로 준비시켜 놓는 것. 내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렇게나 보잘것없다. 하지만 내가 할 수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새해가 됐다고 원대한 목표를 세우거나 팔자가 뒤바뀔만한 엄청난 행운 같은 걸 기대하지는 않게 됐다. 그보단, 몇몇 기회와 결실들만큼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야 할지부터 생각하게 된다. 글을 쓰거나 못 쓰는 시간들 뿐 아니라 원고를 보내놓고 기다리는 시간, 보내지 못해 좌절하는 시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이런 시간동안 필요한 건 의지력보다 나를 끝까지 아끼는 마음이다. 그러니 견디는 시간이 사실 괴로운 시간만은 아니다. 나를 아끼는 시간의 내밀한 즐거움을 나는 알고 있으니. 사람들이 주목하는 성공이란, 그저 나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하루씩 견딘 날들 끝에 어쩌면 찾아올 지도 모를  행운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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