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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Jan 03. 2024

아이러니

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토요일 새벽, 비가 내렸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현이는 연재가 보낸 문자를 읽지도 않았다. 그래도 월요일엔 다시 나오겠지, 싶은 마음에 연재는 기다려보기로 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카페는 이 공간의 부수 기관이라 소풍 오픈 시간에만 영업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생계유지를 위해 주말에도 문을 열어야 한다. 메뉴는 단 두 개,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뿐. 그럼에도 주말에 호숫가 산책 나온 사람들이 있어 주문이 제법 있다.      


어떤 사람은 주말에 브런치를 팔라는데, 연재는 그러고 싶진 않다. 이 공간의 정체성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메뉴가 달랑 두 개인 것도 이런 이유다. 소풍이 자리 잡으면 카페 운영시간도 소풍 운영시간에 맞출 예정이고, 주말에는 쉴 예정이다. 물론 계획대로 될지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계획은 그렇다.   

  

그런 연재지만 날이 차가워지면서 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 하나를 더 구상하고 있다. 카페인 음료를 못 마시는 사람도 있고, 연재도 이 가을엔 새콤달콤 따뜻한 음료가 당기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농수산시장으로 차를 몰았다. 청과 코너를 찾아가니 레몬이 있다. 호불호가 없는 레몬이 당첨이다. 레몬청을 만들어 볼 예정인데, 자꾸 자몽이 눈에 들어온다. 


‘카페가 메인이 아니니까 레몬 하나면 충분해, 더 일 만들지 말자’ 다짐하며 레몬을 고르는데, 이번에는 모과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 추울 땐 모과지. 이왕 담는 거 모과로 할까?’ 연재 마음속에 때아닌 레몬 자몽 모과 3파전이 시작되었다. 왜 자꾸 욕심이 생기는 걸까? 그토록 간결한 삶을 원했는데, 이 집요한 삶의 관성은 ‘이왕 하는 김에’라는 습관을 자꾸 소환해 다시 버라이어티한 노동을 불러온다. 레몬을 들었다 모과를 들었다 하는 연재를 보며 나이가 지긋한 과일가게 사장님은      

“청 맹글라고?”

“네”

사장님은 배를 문지르며 “위가 워때? 좋아 안 좋아??” 

과일가게에서 왜 위를 물어볼까 싶었지만, 어른이 물으신 거니까

“가끔 쓰리고 안 좋아요.”

“그라믄 생강으로 해. 여 내가 직접 키운 생강 있어. 생강이 참 좋아”

“생강이요? 생강은 매운맛이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과일가게 사장님은 

연재 앞에 생강이 가득 든 바구니를 앞에 놓으며 

“생강차 마시면 감기도 안 걸리고 위장병도 싹 다 고쳐 부러, 만병통치여”

사장님의 얼굴에서 이 생강을 꼭 팔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게 보였다.

게다가 ‘싹 다 고쳐분다’는데 안 살 도리가 없다. 그래도 망설이는 연재에게

“왜? 뭐가 문제여?”

“제가 원래 레몬을 사려고 했거든요.”

“그럼 레몬하고 생강 하고 반반씩 섞어 담가. 레몬 하고 생강이 궁합이 좋아.”

맞다. 레몬 생강차면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다. 레몬이 젊은이들을 겨냥한 음료라면 생강은 연령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음료다. 그럼 레몬 생강차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음료이지 않은가. 복잡한 마음이 싹 정리되었다.

“그럼 생강 1킬로랑 레몬 열 개 주세요”

신이 나서 봉투에 생강을 담는 과일가게 주인을 보며 연재는 생각했다. 

‘과일가게에서 진료를 받고 생강을 사다니, 이것이 춘하 시의 시룰인가?’     

 

생강 손질은 손이 많이 간다. 생강 사이사이 흙도 잘 씻어야 하고 껍질도 까야하니 손이 보통 가는 게 아니다. 그냥 레몬만 살 걸, 약장수한테 속아 만병통치약을 사 온 할머니 심정으로 내내 후회하면서 생강을 씻고 껍질을 깠다. 껍질 벗긴 생강의 물기를 잘 닦아 슬라이스로 자르고 이번엔 레몬을 준비했다. 소독해 둔 유리병에 유기농 설탕과 함께 차곡차곡 쌓았다. 설탕을 많이 넣으면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적당량의 설탕이 들어가야 보관도 쉽고, 맛도 있는데, 그 적당량이라는 게 실은 매우 많다는 게 문제다. 설탕물을 마시는 것인지, 청을 마시는 것인지 헷갈린다. 그 죄책감을 덜고자 유기농 설탕을 쓴다. 유기농이면 몸에 더 낫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몸을 바쁘게 움직였더니 열 시 전에 일이 끝났다. 유리병에 가득 찬 레몬 생강을 보니 뿌듯하다. 연재는 서둘러 카페로 내려가 카페 문을 열었다. 비가 와서 호수는 한결 호젓했다. 데스크톱 컴퓨터를 켜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 음악을 틀었다. 실비 바르땅의 마리쨔 강변의 추억이 흘렀다. 가사가 무슨 뜻인지 몰라도 멜로디가 좋다. 가사를 찾아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이 느낌 이대로 간직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언젠가 멜로디가 좋아서 가사를 찾아봤다가 확 깬 적이 있어 그다음부턴 좋으면 좋은 대로 그 느낌을 즐긴다.     


커피를 내리고 토스트 한쪽을 구웠다. 커피와 토스트를 들고 창가 자리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니 간밤의 흥분이 떠올랐다. 불과 몇 시간 전 일인데, 전생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어젯밤을 생각하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우산을 쓰고 정원으로 뛰어 들어온다.      

수찬 씨다.   

  

   *아이러니     


수찬 씨는 놓고 간 기타를 가지러 왔다. 쇼케이스 때 전자기타와 통기타 두 대를 다 세팅했었는데, 공연 끝나고 짐이 너무 많아 전자기타만 들고 갔기에 통기타가 남아있었다. 간밤에 친구들과 과음한 수찬 씨는 단 게 당긴다며 아메리카노 반에 시럽 반을 섞어 마셨다. 이어 수찬 씨는 친구가 보내줬다며 영상을 연재에게 보여줬는데, 바로 연재가 궁금했던 인사말 영상이다. 안 그래도 무슨 말을 했는지 너무너무 궁금했는데. 영상 속 연재가 말하고 있다.     


“소풍에 소풍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소풍 매니저 김밥입니다. 복합 문화 공간 소풍은 오늘 싱어송라이터 수찬 씨의 공연을 시작으로 클래식, 재즈 등 다양한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니 관심 가지고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현재 글쓰기와 문학 토론 수강 신청을 받고 있으니 원하시는 분은 홈페이지에서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 함께 힘찬 박수로 수찬 씨 불러볼까요?”     


막상 보니 괜히 봤다 싶다. 바보같이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니. 뭘 자꾸 바라는 거야? 뒤는 ‘신청해 주세요’,라고 했으면 더 간결하고 좋았을 것을. 더구나 긴장한 게 너무 티 나서 창피했다. 그리고 김밥인 것이 더욱더. 연재는 자기를 김밥으로 만들어 놓고 튀어버린 사이다 이놈이 매우 괘씸하다.


다정한 수찬 씨는 잘했다고 그 정도면 잘한 거라고 연재를 안심시킨다. 연재는 그때 50대 수강생과 연주했던 곡 제목을 물었고, 수찬 씨는 ‘핀탄 왈츠’라고 했다. 그 곡이 좋았다고 하니 수찬 씨가 어젯밤 감사의 의미로 연주해주겠다고 한다. 헐, 이건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인데.     


연재는 듣고도 싶고, 혼자 감상하자니 부담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손님이 왔다. 서울에서 온 커플 관광객. 커플은 창가에 앉아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연재와 함께 핀탄 왈츠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한 곡만 하긴 아쉽다며 ‘라스트 카니발’도 연주했는데, 익히 들어본 적 있는, 그러나 제목은 몰랐던 곡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고 들으니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아까운 곡이었다. 수찬 씨와 커플이 모두 나가고 연재는 유튜브에서 라스트 카니발을 찾아 무한 재생해서 들었다. 여러 가지 버전이 있었다. 특히 피아노 트리오 연주가 좋았는데, 계속 듣자면 마음이 너무 가라앉을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종료해야 했다. 수찬 씨가 감사의 선물이라고 놓고 간 종이 가방에는 와인 한 병이 들어있었다.      


한가롭고 쓸쓸한 토요일 오후가 흘렀다. 자꾸 혜진 씨 아기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아직 아기 이름도 모른다. 혜진 씨가 맨날 ‘우리 애기, 우리 애기’하니까 연재도 ‘우리 애기’라고 부르다 보니 그렇게 됐다.    

  

통성명. 서로 이름을 알려주는 것. 이 의례가 연재는 조심스럽다. 서로의 이름을 알고 불러준다는 것은 관계가 형성된다는 뜻이니까. 춘하에 오면서 연재는 결심한 게 있다. 관계 맺지 않을 사람이면 이름도 묻지 말자. 이런 이유로 퀼트 팀원들 이름도, 50대 기타 수강생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 계약서도 대표자인 혜진과 수찬만 썼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이름을 알 수 없다. 알자면 물었을 텐데 굳이 그러지 않았던 것은 한꺼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을 자기 삶의 바운더리로 ‘훅’ 들이고 싶지 않아서다. 어쩌면 왁자지껄한 것을 싫어하면서 복합 문화 공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사람들과 관계 맺고 싶지만, 그 반대로 혼자 있고 싶은 마음. 연재는 이것도 이렇게 정리했다. 두 마음 다 내 마음이라고.     


  *     


화요일에도 현이는 연락이 없었다. 편의점 알바를 한다고 했는데, 어디 편의점인지 모른다. 연재가 보낸 문자의 1도 아직 그대로다. 알바들이 말없이 그만두는 일은 흔하다. 현이도 그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금까지 현이가 연재보다 더 열정적으로 소풍을 이끌어 오지 않았는가! 

그럼,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건가? 지금까지 본 현이 성격상 더 높은 임금을 원하면 분명 말을 했을 텐데.

무엇보다도 연재는 시월 들어서부터 현이의 시급을 만 오천으로 지급하고 있었다.

물론 주휴 수당도 챙겼고. 현이는 충분히 그만큼 일하고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 7시에 요가 수련을 오는 제하 씨를 기다렸다. 

제하 씨는 현이의 동네 누나고, 현이가 소개해서 왔으니 소식을 알지도 모른다.

뭔가를 기다리면 시간은 늦게 흐른다. 느리게 흐른 시간 뒤에 제하 씨가 왔다.

현이가 지난 금요일부터 나오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된다는 연재의 말에 제하 씨는

‘한번 알아보겠다’라는 담백한 답만 남겼다. 담백하다 못해 건조한 답변에 연재는 머쓱해졌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현이가 내 아들도 아니고 말없이 그만둘 수도 있지.’

그런 느낌이 들고 나니 연재는 기운이 빠졌다. 짧은 시간 현이를 너무 의지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서기 위해 이 낯선 도시에 왔는데

또 이렇게나 금세 누굴 의지해 마음이 흔들리다니. 왜 그랬을까 연재는 곰곰이 생각했다.

가장 큰 원인은 오만과 오해였다. 

현이는 어리다. 그러니 의지할 존재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오만.

연재 큰아들과 또래다 보니 그것만으로 혼자 친근하게 느꼈던 오해.

......

그러고 보니 그날은 시월의 마지막 날이고 현이의 월급날이었다. 그렇게 현이는 갑자기 사라졌다. 헛헛했다. 지원군이 갑자기 철수해 버린 기분이 들었고 배신당한 것도 아닌데 배신감이 들었다. 이틀 후 제하 씨 얼굴을 봤지만, 묻지 않았고, 제하 씨도 따로 기별하지 않았다. 그렇게 현이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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