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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Jan 10. 2024

첫눈에 온 손님

칭밖은 가을, 장편소설

삼 주가 흘렀다. 그동안 소풍에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매주 화요일 오전 캘리그래피 수업이 생겼고, 목요일 오전에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이끄는 글쓰기 수업이 생겼다. 현이가 올려놓았던 글쓰기와 문학 토론 수업에 두 사람 외에 더는 신청자가 없었는데, 이 글쓰기 수업이 생겨 그 두 명을 이쪽 글쓰기 수업에 연결해 주었다. 연재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혼자 카페와 소풍을 운영하기도 벅찬데, 수업까지 맡는다는 것은 욕심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연재는 확실히 마음을 정한 게 있다.      

글을 쓰겠다는 것.      


막연히 글을 쓰고 싶어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당장 돈을 벌기 위해 학원 강사를 시작했던 게 업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글을 쓰겠다는 마음조차 사라져 버렸다. 현이가 “책을 쓰세요”라고 무심이 던진 말에 파문이 일면서 이후 연재는 매일 생각했다.     

‘나는 왜 쓰고 싶고, 무엇을 쓰고 싶은 거지?’     


학원에서 학생들 가르치며 명함 없이 살아왔기에 남들 보기에 근사한 명함 있는 작가가 되고 싶은 건가? 서점에는 매일 같이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데, 괜한 짓 해서 종이만 소모하고 결국 쓰레기나 만드는 건 아닐까? 누가 나 같은 사람이 쓴 책을 읽기나 할까? 책이 한 권도 안 팔려 출판사에 손해나 끼치면 어쩌지? 그럴 땐 내가 다 사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 물처럼 커다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걱정은 책이 나올 분량을 쓰고, 그 글이 어느 출판사에 뽑혀야 벌어질 일인데,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로또 당첨과 비슷한 확률인 일을 로또를 사지도 않고 당첨 후의 일을 걱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또 쓰지 않을 핑계를 찾고 있다는 것을. 무려 이 짓을 이십 년 동안 무한 반복했다는 것을.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뭘 새로 배워야 하는 것도 아니니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글을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게 뭐라고 시도조차 못 했다니. 노벨문학상을 노리는 글을 쓸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주제 파악을 하고 보니 주제를 정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소풍에서 만난 사람들과 벌어지는 이야기.’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기록이다.

 

카페 컴퓨터를 이용하면 자리도 지키면서 글도 쓸 수 있다고 결심한 첫날, 출근하자마자 야심 차게 컴퓨터를 켰다. 청소하고 커피를 만들면서 쓸 거리를 계속 생각했다. 쓰려고 마음먹고 사람들을 대하니 촉각이 곤두선다. 감각이 깨어나고 스치는 눈빛 하나에도 별스러운 의미가 느껴진다. 글을 쓰려는 마음은 연재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런데 간간이 카페 손님 주문도 받아야 하고, 수강생들 문의도 받아야 하고 수업이 끝난 공간 청소도 해야 하니 쪼가리 시간으론 도저히 쓸 수가 없다. 용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양손에 떡을 쥐고는 글을 쓸 수 없다. 한 손을 놔야 가능하다.  

   

그래서 결론, 12월부터 주말 카페 영업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날이 추워지면서 호수를 찾는 사람도 줄고 공간대여와 주중 커피 판매만으로도 최소한의 생계비는 충족되었다. 월세도 없고 인건비도 없으니 욕심만 버리면 가능했다. 주중에는 먹고사는 일에 집중하고 주말에는 나에게 집중하기. 연재는 이렇게 차근차근 자기만의 시간을 만들어간다.     


  *첫눈에 온 손님.     

11월의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 을씨년스러운 바람과 함께 하늘이 잔뜩 흐렸다.

수찬 씨의 기타 수업이 끝나고 나니 소풍에 남은 사람은 연재뿐이다.

연재는 진하게 커피를 내려 창가로 간다. 창가에 서니 겨울 한기가 느껴진다.

켜 놓은 라디오에서는 에디트 피아프의 라비앙로즈가 흐르고

연재는 따뜻한 커피를 두 손으로 꼭 쥐고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데.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첫눈.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잿빛 공기를 뚫고 하얀 알갱이가 속절없이 내려온다.

“아….”

연재의 입에서 탄성이 흘렀다.

첫눈을 이렇게 보다니. 느닷없이 내린 첫눈이 원망스럽다.

아무런 약속도 없는데, 혼자 있는데, 첫눈이 오면 안 되는 것이다. 쓸쓸한 것이다.

그깟 첫눈 매년 오는 건데, 그게 뭐라고 늙지도 않는 마음이 수선을 피운다.     


춘하에 오기 전, 그러니까 연재가 서울에 살 때 첫눈이 오는 날이면 무조건 외식을 고집했다. 아무리 집밥, 자연주의 식탁을 고집하는 연재지만 첫눈 오는 날 집에서 밥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 둘과 홍익인간이 하는 돈가스집에 가서 돈가스를 먹었다. 평소 튀긴 음식을 좋아하지 않은 연재지만, 눈 오는 날엔 돈가스가 당겼다. 아니 그런 분위기가 당겼다. 창가 자리에 앉아 가족들이 얼굴을 마주 보며 오순도순 먹고 싶었다. 실제 상황은 늘 연재의 바람과 달랐지만 말이다. 남편은 거래처와 끊임없이 통화하느라 밥을 먹다 말고 자주 밖으로 나갔고, 아들들은 핸드폰 게임만 하느라 눈이 오든지 말든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눈이 오고 가족이 모여 돈가스를 먹을 수 있으니까. 동상이몽이건 동상사몽이건 그땐 그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호수에 떨어지는 눈을 보며 연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한번 떨어진 눈물은 손 쓸새 없이 흐른다. 당황한 연재는 누가 볼까 서둘러 눈물을 닦고 코를 푸는데 창밖으로 길고양이가 떨고 있다. 소풍이 문을 열 때부터 종종 오던 놈이다. 최근엔 도통 안 보여 사고라도 난 게 아닌지 걱정했었는데 첫눈과 함께 나타났다. 얼마나 굶었는지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연재는 고양이 사료 봉투를 챙겨 들고나갔다.


고양이는 연재와 거리 두기를 하고 저만치 앉아 연재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

연재가 그릇에 사료를 채워 고양이에게 주려고 고개를 드는데,

고양이가 있던 자리에 현이 있다. 연재는 너무 놀라 사료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현이는 여태 본 적 없는 그늘진 얼굴로 눈 내리는 호수를 보고 있다. 연재는 정신을 차리고 고양이를 찾는데, 현이의 등장에 놀란 건지 보이지 않는다. 일단 아무 때나 먹으라고 눈 맞지 않을 장소에 그릇을 둔다. 현이 말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춥다, 들어가자”


현이는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다. 심하게 아파서 입원했고, 어제 퇴원했다고 했다. 어디가 아픈지는 말하지 않았다. 연재도 어디가 아팠냐는 말 대신 지금은 괜찮냐고 물었고, 현이는 괜찮다는 말 대신 죄송하다고 했다. 연재는 과일가게 사장이 했던 것처럼 배를 문지르며

“위는 어때?” 난데없는 질문에 현이 살짝 당황하더니 역시 배를 문지르며

“... 약을 많이 먹었더니 좀 불편해요. 소화도 안 되고”

“레몬 생강 청 담갔는데, 마셔볼래?”

“레몬 생강 청이요?”

“위에 좋대”

그때 만들고 한 번도 뚜껑을 열지 않았던 레몬 생강 청 뚜껑을 열었다. 발효가 잘됐는지 빵 소리가 났다. 포트에 물을 끓여 레몬 생강차 두 잔을 만들었다. 현이와 연재는 두 손으로 레몬 생강차를 쥐고 말없이 호수를 바라봤다.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현이가 드디어 입을 뗐다.

“저 잘렸죠?”

연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아파서 입원했다는데, 자른 게 맞나? 싶다가 아무리 아팠어도 연락 한 번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부딪혔다.

“돈가스 좋아해?” 뜻밖의 질문에 현이는 어리둥절하다가

“레몬 생강차를 마셨더니 배가 고프긴 해요”     

춘하에도 다행히 홍익인간이 하는 돈가스집이 있었다. 현이랑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아 돈가스를 시켰다. 그때 추억을 소환하고 싶은 건지, 야윈 현이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은 건지, 아마도 둘 다이지 싶다. 현이는 이제야 조금 편해진 얼굴로 수찬 씨의 공연에 관해 묻는다. 공연은 잘 치렀는지, 사람들은 많이 왔는지 등등. 연재는 현재 소풍의 상황까지 소상히 설명했다. 연재의 소상한 설명을 현이는 복직의 의미로 받았는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주말에 카페 문을 닫을 거란 말에 현이는 자기가 주말 카페 운영을 맡으면 안 되겠냐고 한다. 편의점에서도 잘려, 할 일이 없다며 주말 수입은 자기가 다 갖고 대신 대여료를 내겠다고 했다. 물론 사용한 원두값은 당연히 제하며 카페와 소풍 공간을 다 쓰고 싶단다.


이 패기는 뭘까? 손님이 온다는 보장도 없는데, 아무리 돌고 도는 게 돈이라지만 혹시 나한테 받은 월급을 공간 사용료로 다시 돌려주는 건 아닌지 연재는 걱정되었다. 하지만 현이는 자신에 차 있었다. 그렇게 되면 현이는 주중에는 알바, 주말에는 사장이 되는 거다. 연재는 고민이 되었지만 가보고 아니면 돌아오든지, 다른 길을 찾으면 그뿐. 그래서 내린 결론. 현이는 월화는 쉬고, 수목금은 알바, 주말엔 사장이다. 다소 복잡하지만, 연재는 상관없었다. 대신 다음엔 무슨 사정이 생기거든 꼭 연락하기로 약속하고 복직을 허락했다. 사실 현이를 복직시킨 건 순전히 눈 때문이다. 연재는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와 돈가스를 먹고 싶었고, 누군가는 현이었고, 돈가스집에 데려온 이상 내칠 순 없었다. 인생이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현이는 타이밍이 절묘하게 연재 앞에 나타났다.


 * 이래서 사이다 사이다 하는구나.     


연재가 아침을 준비하는데, 아래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열어보니 현이 앞치마를 메고 뭔가를 하고 있다. 지금 시간 여덟 시 사십오 분. 열 시부터 시작이니 연재가 보통 그 시간쯤 내려가 문을 여는데 한 시간 전에 문을 연 것이다. 정오부터 오후 6시까지 계약이고 전처럼 하루 6시간 시급을 생각하고 있는데, 이건 반칙이다. 이 시간부터 시급을 지급하면 연재는 굶어야 한다. 굶어 죽기 전에 이 사이다 놈을 말려야겠다 싶어 연재는 서둘러 내려갔다.   

  

이러면 곤란하다고 말하는 연재를 보며 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긴 지금 주말 장사 준비를 하러 나온 거라 한다. 지금은 목요일인데 주말 준비라고? 뭔 소린가 했더니 현이는 작은 전등이 달린 전선 꾸러미를 봉투에서 꺼냈다. 12월에 크리스마스트리 정도는 있어야 겨울 분위기도 나고 사진 찍을 장소도 생긴다는 말씀. 출근 전에 해야지 출근하면 일하느라 못 할 테니 일찍 나오셨단다. 연재는 속으로 ‘내가 사장이고 넌 직원이야! 나도 그 정돈 생각하고 있거든! 그니까 내가 지시하면 그때 하면 안 되겠니?’      


그사이 현이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트리로 낙점된 나무에 전선을 감기 시작했다. 연재는 부채감이 들었다. 현이가 만들어 놓은 주말 장사 준비에 숟가락만 얹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연재도 팔을 걷어붙였고, 둘이 힘을 합치니 금세 끝났다. 전선 감기가 끝나자 현이는 볼 일이 있다며 황급히 나가고, 연재는 제대로 작동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코드를 꽂고 버튼을 눌러보았다. 불빛이 반짝거린다. 이쁘긴 한데 혹시 이 전선이 나무를 괴롭게 하는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사람 보기 좋자고 나무를 괴롭히고 싶진 않다. 그러다 문득 겨울엔 추운데, 이 불 때문에 나무가 덜 춥지 않을까 란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도 현이 야심 차게 준비한 프로젝트를 망치고 싶지 않아 그냥 두기로 마음먹었다. 일정한 리듬에 따라 깜박거리는 불빛이 보는 사람을 홀린다.    

  

오픈 준비를 하는데 혜진 씨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혜진 씨는 익숙한 듯 데스크톱 컴퓨터를 켜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 음악을 켠다. 재즈 버전의 크리스마스 캐럴 연주곡이 흐른다. 일부러 맞춘 건 아닌데, 트리의 깜박이는 불빛과 재즈 연주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 혜진이 음악을 켜는 동안 연재는 유모차에 탄 시우와 눈을 맞추고 자문자답하고 있다. “잘 잤어요? 아이구, 잘 잤다구?”

”맘마는? 맘마도 배불리 먹었고요? 아이구, 잘해쩌요”

시우는 혜진 씨 아들 이름이다. 대화 앞엔 왜 모두 ‘아이구’가 들어가는지 연재도 모른다. 시우만 보면 그렇게 된다. 연재가 시우랑 노는 동안 혜진이 자기 카드로 커피값을 결제하고 커피를 내리며.

“트리는 언제 만드신 거예요?”

“방금 현이가. 현이 다시 나오기로 했거든.”

“현이가요? 그동안 왜 안 나왔대요?”

그새 A가 들어오며 “현이가 왔다고? 그동안 왜 안 나왔대요?”

연재가 한참 설명하는데, 이번엔 B가 들어온다. A는 B에게 “현이가 왔대”, 하고

B는 마치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라는 돌림노래처럼

“현이가요? 그동안 왜 안 나왔대요?” 곧 대문을 들어서는 C가 돌림노래를 부를 차례다.    

 

   *     

정오에 현이 출근했다. 이번에는 크리스마스트리에 달 장식품을 잔뜩 가지고 왔다. 퀼트 팀도 정원으로 나가 현이가 장식품 다는 걸 도우며 ‘어디가 아팠냐, 이젠 괜찮냐?’ 다정한 관심을 보였다. 현이는 쾌활한 모습으로 지나친 관심은 부담스럽다고 너스레를 떨어 퀼트 팀을 웃게 했다. 커피잔을 씻고 홀을 정리하며 연재는 그들을 바라봤다. 사람 하나 왔을 뿐인데,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다니. 퀼트 팀에게 현이는 크리스마스가 있는 주말에 플리마켓을 열 예정이니, 팔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준비하란다. 입원해 있는 동안 사업 구상을 많이 한 모양이다. 어떻게 저렇게 계획도 금방 세우고, 실행력도 좋을까? 또 저렇게 온몸을 불태우다 아플까 걱정이다.  

   

퀼트 팀이 돌아가고 현이는 춘하시청 문화예술과에 다녀왔다고 했다. 문화예술과에는 지역 서점이나 문화 공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단다. 소풍에서 유명 작가를 초청해 강연을 열고 싶다면, 강연료를 시에서 보조해 주는 방식이다. 그래서 신청하고 왔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새해맞이 김지영 작가 초청 강연’ 안내문을 만들어 올린다. 연재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김지영 작가라면 연재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데, 그 작가를 초청한다고? 그것도 내 공간에? 게다가 강연료도 시에서 지급해 준다니, 이런 꿈같은 일이. 소풍을 열고 연재에게 가장 흥분되는 일이 벌어졌다.     


하…. 이래서 소풍엔 사이다가 필수겠구나! 연재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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