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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Jan 24. 2024

왜 하필 복합문화 공간이에요?

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찬바람에 눈을 떴다. 현이 벌써 출근해서 문을 활짝 열고 청소 준비를 하고 있다. 

제하도 찬 바람에 눈을 떴다. 현이 제하에게 다가가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짜증 나서”

“거울 봤어?”

제하는 현이의 등짝을 강하게 스매싱했고, 연재는 이 현실 동네 남매의 대화를 3초 후에야 이해했다.(거울 봤기에 짜증났냐는) 현이는 주말 장사 준비해야 한다며 콜택시를 부른 다음 제하를 부축해 나갔다. 연재도 비틀거리며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부터 마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각종 술병이 패잔병처럼 나뒹굴고 있다. 속이 울렁거리더니 메슥거리기 시작한다. 헛구역질이 올라와 꽥꽥거리는데 현이가 들어선다. 현이는 재빨리 연재를 끌고 가 화장실에 넣었다. 간발의 차이로 바닥에 토사물을 흘리는 일만은 면했다. 위액까지 다 쏟아내고 나서야 토악질이 멈췄다. 연재 인생에 이렇게까지 마셔본 적이 없는데, 스스로도 이게 뭔 일인가 싶다. 가까스로 입을 헹구고 나오니 현이 레몬 생강차를 끓여놓았다. 한 모금 마시니 연재는 살 것 같다고 생각하자마자 다시 구역질이 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     

저녁이 되어서야 연재는 속이 가라앉고 정신이 들었다. 간밤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가물가물했다. 치킨에 맥주, 소맥, 위스키에 얼음을 타서 마신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이후론 깜깜하다. 냉장고에 남은 콩나물에 김치를 넣어 해장국을 끓였다.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밥을 넣고 끓이다 마지막에 파와 청양고추, 달걀까지 넣으니 제법 그럴싸하다. 천천히 오래도록 식사하면서 간밤의 대화를 떠올려봤다. 그러다 문득 코르크 뱉어 얼굴에 붙인 혜진의 얼굴이 떠올라 연재는 웃었다. 생각할수록 웃음이 났다. 설거지까지 끝내니 그제야 소풍이 궁금해졌다. 이번 주가 현이 하는 첫 주말 장산데 인건비나 건질는지, 대여료나 나올는지 걱정되었다.  


*    

소풍엔 현이 빼고 아무도 없었다. 그럴 것이 벌써 시간이 여덟 시가 넘었다. 서울에서야 여덟 시면 초저녁이지만, 춘하에서, 더구나 겨울에, 시내가 아닌 호숫가 여덟 시면 서울로 따지면 자정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토요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현이 혼자 영수증을 보며 정산을 하고 있다. 연재가 들어서자 현이는 하루 대여료 빼고, 재료비 빼고 십 일만 원이 남았다고 좋아했다. 대체 뭘 팔아서 그 돈을 벌었냐고 묻자 오전엔 브런치 주문 예약을 받았고, 오후엔 쿠키와 커피를 세트로 팔았단다. 브런치 만들었던 것을 사진으로 보여주는데, 꽤 그럴싸하다. 소시지 두 개를 칼집을 넣어 굽고, 구운 식빵 두 쪽, 스크램블에그와 샐러드. 그리고 커피. 특별하거나 새로운 것은 없었다. 브런치 예약을 받기 위해 SNS를 이용, ‘토요일엔 소풍에서 브런치’란 문구와 현이 요리하는 사진을 올렸는데, 무려 일곱 팀이 신청했다며 현이는 고무되어 있다. 이럴 때 보면 외모가 크게 한몫한 것 같다. 누가 봐도 현이는 호감형이다. 시크한 말투와 유머, 순수해 보이는 눈동자, 무심한 표정까지. 연재는 누가 손님으로 왔었는지 보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젊은 여성들이었을 거라 확신했다. 현이는 내일은 다른 메뉴로 브런치를 만들 거라며 연재에게 내일 아침 식사는 먹지 말라고 했다.     



방으로 돌아온 연재는 노트북을 켰다. 간밤의 강렬했던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하 씨가 남편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고백했다는 말, 그래서 이혼(당)했다는. 문득 절친 수영의 말이 떠올랐다. 수영이 새로 이사 간 동네 목욕탕, 어느 목욕탕이나 있는 사우나 터줏대감 형님(여자들끼리지만 꼭 호칭을 형님이라고 쓰는 집단)들께서 처음 본 수영에게 애인이 있냐고 물었다. 수영은 남편이 있다고 했고, 형님들은 우리도 남편은 있다고, 그러니까 애인이 있냐고 다시 물었다. 수영이 없다고 하자,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는 형님들. 어쩌면 이 형님들 이야기가 제하 씨의 그것보다 더 사실적인 것 같다고 연재는 생각했다. 대부분은 바람을 피우면서도 걸리지 않기 위해 별별 수를 다 쓰고, 걸려도 오리발을 내밀기 일쑤인데, 무엇이 제하 씨에게 다른 선택을 하게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연재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 그것에 관해 말할 기회가 생긴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새로운 사랑도 언젠가 마음이 식을 텐데, 마음이 식을 때마다 다른 사람을 만날 게 아니라면 몰래 만나는 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니냐고. 그러다 갑자기 혜진의 말이 떠올랐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대충 되짚어 보면 바람피우기 전에 배우자에게 말해야 하고 그게 새로 사랑을 시작한 사람에 대한 예의다. 그땐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다. 배우자에게 솔직해야 하는 이유가 새로운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틀린 말은 아닌데, 이 묘한 불편감. 그 근원지를 찾아야 하는데 그러기엔 졸음이 더 빨리 찾아왔다.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시간은 흐르고, 커서는 계속 깜박이고 연재는 첫 글자도 쓰지 못하다가 규칙적으로 깜박이는 커서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눈이 스르륵 감겼다. 수면제 없이 잠든 두 번째 밤이었다.      


   *     

새벽에 눈을 떴다. 언제 찾아들어 갔는지 침대다.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진다. 연재는 온열기 전원을 켰다. 잔뜩 움츠린 몸뚱이가 전선에 열이 들어오니 슬그머니 펴진다. 이불속에서 손가락을 접으며 춘하에 온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유월에 이 집을 계약하고 칠월부터 인테리어 들어갔다. 2층은 원래 거실 겸 주방인 넓은 공간과 방 두 개, 화장실 하나인 구조였다. 전체 도배하고 마루를 깔고 화장실 타일과 변기를 바꿨다. 창틀도 너무 펜션스러워 아파트 창호 같은 스타일로 모던하게 바꾸고 오크 색 몰딩은 다 없앴다. 2층 공사하는 동안 연재는 1층에 머물렀는데, 낯선 공간에 혼자 있자니 무서웠다. 잠 못 들던 밤, 호수를 바라보면 나무가 서 있거나 흔들리는 모습이 머리를 축 늘어뜨린 귀신같아 보였다. 그 무서운 느낌이 다른 여타의 느낌을 상쇄시켜 연재는 무서워 떨면서도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포, 외로움, 분노, 미움, 좌절 어느 하나로 치우치면 사달이 날법한데, 이것들이 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어 연재를 이도 저도 하지 않게 만들었다. 2층 인테리어가 끝나자 1층 인테리어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했으면 시간이 더 단축되었을 텐데, 연재는 가 있을 곳이 없었다. 굳이 찾자면 있었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패잔병의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그때 연재는 결심했다. 이곳, 춘하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처음엔 도피처로 생각했지만, 도피가 아니라 새로운 삶이다. 더는 과거에 발목 잡혀 괴로워하지 않겠다고. 내 불행한 과거를 안주 삼아 꼭꼭 씹고 타인을 미워하는 일을 술 삼아 꿀떡꿀떡 넘기며 살지는 않겠다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는데, 벌써 5개월이 흘렀다. 금요일이 연재에겐 고비였는데, 다행히 두 여인 덕에 잘 넘어간 것 같다. 역시 답은 인간인가? 인간에게 상처받지만, 또 인간에게 위로받는. 아무와도 깊게 관계하고 싶지 않지만, 고립되고 싶지도 않은 마음.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연재는 결론지었다. 두 마음 다 내 마음이라고.     


   *     

핸드폰 진동에 더듬더듬 손을 뻗어 확인하니 현이다. 브런치 먹으러 빨리 내려오란다. 시간을 보니 열한 시가 되어간다. 잠깐 눈 붙인다는 게 시간이 벌써. 서둘러 내려간 소풍에는 세 테이블이 식사 중이었다. 연재를 보자 현이는 준비된 테이블을 가리키며 그쪽에 앉으라 했고, 준비된 자리에 연재가 앉았다. 현이 가져다준 브런치는 다소 신기했는데, 다양한 재료가 든 김밥이다. 일반적으로 돌돌 말아진 김밥이 아니라 한입 크기의 입구가 벌어져 있어 밥 위로 올라간 재료가 보이는 쌈밥 형태의 김밥이다. 일단 비주얼이 압권인데 명란과 아보카도가 듬뿍 든 김밥, 치커리에 새우튀김을 얹고 살구색 소스를 뿌린 김밥, 얇게 채 썬 오이와 당근 위에 빨갛게 볶은 잔멸치를 듬뿍 올린 김밥, 연어와 양파로 속을 푸짐하게 채우고 하얀 소스를 얹은 김밥까지. 장식으로 사과와 귤이 올려져 있다. 손을 대기도 아까워 연재는 주변을 둘러보는데, 모두 접시 사진을 찍고 신기한 표정으로 김밥을 들었다 놨다 한다. 

“드셔보세요”

현이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연재를 보고 있다. 연재는 아보카도 명란 김밥을 먼저 입에 넣었다. 밥에서 나오는 참기름의 고소한 맛과 명란의 짭조름한 맛, 아보카도의 밍밍한 맛이 합쳐지자 그야말로 일품이다. 손뼉이 절로 쳐지는 맛이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어?”

“브런치로 무엇을 만들까 고민 많이 했는데, 소풍엔 역시 김밥이지 싶어서요. 차별화된 뭔가를 만들고 싶어서 한번 해봤는데, 반응이 좋네요. 앞으로 이쪽으로 밀고 나갈까 해요”

현이의 대답을 들으며 오이, 당근에 잔멸치 듬뿍 인 김밥을 입에 넣었는데 단짠에 매콤함까지, 거기에 오이 당근의 상큼함이 보태지니 백종원도 울고 가지 싶었다. 고개까지 끄덕이며 음~~ 콧소리가 나오는데 동시에 현이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새우튀김 김밥은 말해 무엇! 계속해서 연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이는 쿨하게 자꾸 감탄하면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단다. 연어 양파 김밥까지 먹고 나니 확신이 들었다. 아직 홍보가 안 돼서 그렇지 앞으로 대박은 떼놓은 당상이다. 공짜 브런치를 먹었기에 연재는 테이블 정리와 설거지를 했다. 현이는 주말용 메뉴판을 새로 만드느라 정신없었다. 언제 주문했는지 카페로 납품되는 각종 티백과 과일청을 유리병에 담아 진열했고, 진열대가 반짝반짝하도록 광이 나게 닦았다. 진열대가 비어 있었기에 판매할 것들을 가져다 놓는 건 상관없지만, 주중에는 원래 메뉴만 팔 거라고 연재는 현이에게 못 박았다. 현이도 연재의 뜻을 알기에 두말하지 않았다. 곧이어 자전거 라이더 무리가 들어왔다. 

     

서울에서부터 왔다는 자전거 동호회팀인데, 오륙십 대쯤으로 보이는 남자 총 여섯 명이다. 여섯 명은 여섯 개의 메뉴를 주문했고 모두 창가 자리에 흩어져 서서 호수를 바라봤다. 검은 레깅스를 위아래로 입고 곤충 눈처럼 생긴 선글라스에 두건, 목에 스카프. 모두 단체로 같은 착장을 하고 있어 언뜻 보면 다 같은 사람 같았다. 같아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번엔 차례로 창가에 서서 인증사진을 찍는데 동작까지 똑같이 주먹 불끈 파이팅!이다. 저럴 바에야 대표로 한 명만 찍고 자기라고 올려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연재는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를 만들었다. 현이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레몬 생강차, 자몽차, 청포도 에이드, 얼그레이를 차례대로 만든다. 음료를 만드는 동안 들려오는 대화를 통해 연재는 그들이 고등학교 동창생들이고 그중 한 명이 원치 않는 명예퇴직을 당했단 걸 알 수 있었다. 명퇴당한 친구는 놀 수도 없고, 어디 오란데도 없으니 뭔가 자기 사업을 해야겠는데, 자기는 사업을 해본 적도 없고 그러기엔 자본도 부족하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되겠냐는 복잡한 사연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런 그를 향해 누군가 또 주먹 불끈 파이팅 넘치게 동작까지 취하며 말했다.

“고스톱도 오광 들고 치면 못 나. 근데, 쌍피를 들잖아? 그럼 난다?!”

들고 있는 패가 나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는 뜻 같은데, 그의 말이 연재에게도 위로가 됐다. 내가 든 쌍피는 뭘까 연재는 생각했다. 문득 연재의 시야에 현이 들어왔다. 현이는 음료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느라 쌍피고 광이고 못 들은 것 같았다. 연재는 저 아이가 내 쌍피일까 생각하다가 쌍피라 하기엔 너무 광이 났다. 쌍피와 광을 오가는 사이 카페라테가 완성되었다.     

“카페라테에 시럽 넣어드릴까요?” 연재가 물었고, 방금 파이팅 넘친 명언을 쏟은 남자가 대답했다. “듬뿍 부탁드립니다”      


   *     

오후, 네 시가 넘으니 손님이 뚝 끊겼다. 인제 그만 올라가려는 연재에게 현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물었다.

“왜 하필 복합 문화 공간이에요? 보통은 사업 처음 하는 분들은 카페나 프랜차이즈 빵집을 생각하는데, 특히 여자분들은 더욱.”

연재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길어질 것 같아. 

“그냥, 해보고 싶어서, 수고해” 

연재는 계단을 올라오면서 그날을 떠 올렸다. 복합 문화 공간에 대해 생각하던 그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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