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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Feb 07. 2024

꽃그림을 보며 눈물 흘리는 여자

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연재가 윤희 화백을 만난 건 소풍 인테리어가 한창일 때였다. 날은 덥고 계속 현장에만 있긴 힘들었기에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 그때 찾은 곳이 갤러리 선재였다. 선재에선 윤희 화백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연재는 그의 그림을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다. 다음날, 윤희 화백을 만날 수 있었고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그의 그림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몇 해 전 연재는 천경자 화백의 전시를 보고 동양 채색화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런데, 동양 채색으로 한국의 야생화를 그리는 윤희 작가를 만난 거다. 그림이 아름다운 건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연재가 좋았던 건 작가의 시선이다. 길가에 흔하디 흔해 보잘것없는 것으로 취급당하기 쉬운 존재들에게 애정 가득한 시선을 선사함으로 존재의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들풀 하나도 각자의 고유한 미가 있다는 걸 한지 위에 증명했다. 너무 이쁜데, 눈물이 났다. 어쩌다 보니 초라한 중년이 되어버린 연재에게 당신도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누가 볼까 싶어 연재는 고개 돌려 눈물을 훔쳤다.     


윤희 작가는 선재 갤러리에서 전시가 끝나면 가을 동안은 서울, 부산 아트페어에 참가할 예정이고, 연말이나 되어야 소풍에서 전시 가능하다고 했다. 오늘이 그 일을 상의하기 위해 윤희 작가가 소풍을 찾는 날이다.    

 

연재는 왠지 긴장된다. 공간을 보여주는 게 선생님께 숙제 검사를 받는 아이가 된 것 같다. 호수를 등지고 윤희가 우아하게 스카프를 숄처럼 두르고 카페를 향해 걸어왔다. 오늘은 현이도 쉬는 날, 소풍도 비어 있다. 아무래도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으면 소풍을 온전히 보여줄 수 없기에 수업이 없는 월요일 오후 세 시 반으로 약속을 잡은 거다. 윤희가 소풍을 둘러보는 동안 연재는 커피를 내렸다. 윤희가 꼼꼼히 숙제 검사를 끝내고 연재 곁으로 다가왔다.     


“여기 너무 좋은데요?” 윤희의 첫마디다. 연재는 긴장이 안도로 바뀌며 그제야 굳었던 얼굴이 풀렸다. 윤희는 보유하고 있는 작품이 백여 점 있다며 연재에게 자기 화실을 방문해 같이 선별하자고 했다. 연재는 기뻤다. 윤희의 화실에 가볼 수 있다니. 윤희는 어떻게 이곳에 이런 공간을 만들었는지 물었다. 이 간단한 질문에 긴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지 않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해보고 싶었어요.”


윤희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소풍 곳곳을 다니며 이쪽 벽엔 이런 식으로 그림을 배치하는 게 좋겠다, 혹은 이 벽은 가능하면 보라색을 칠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따라 카페를 찾는 손님이 많아 윤희를 혼자 세워놓는 시간이 길었다. 연재는 이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이곳이 보기보단 많은 사람이 온다는 걸 보여준 것아 내심 으쓱하는 마음과 그 때문에 자꾸 대화의 맥이 끊겨 미안한 마음이 엎치락뒤치락했다.   


마감할 시간이 되었고, 내친김에 연재는 윤희의 화실을 방문하기 위해 소풍을 나섰다. 윤희의 작업실은 5층 상가 건물 꼭대기에 자리했고, 생각보다 넓었다. 백 여점이 넘는 작품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희는 매해 갤러리와 아트페어에 작품을 내고, 그해 팔리지 않는 작품은 이렇게 작업실에 쌓아둔다. 안 팔린 작품을 다음 해에 또 전시해도 누가 뭐라는 사람은 없지만, 꾸준히 새로운 작품을 내는 게 작가의 임무이고, 그래야 나태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그림을 다 전시하고 싶지만, 벽에 여백이 많아야 그림이 사는 법, 빡빡히 채우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정도는 연재도 안다. 일단 이십여 점을 전시하기로 했다. 그림 고르는 것은 차차 더 시간을 가지고 신중히 고르기로 했고, 이제 금액을 정해야 할 시간이다.      


갤러리와 아트페어는 그림이 팔리면 화가와 주체자가 반반씩 그 수익을 가져간다. 하지만 연재는 그림이 팔리면 공간 대여료만 받겠다고 했다. 소풍은 갤러리도 아니고 공간을 따로 마련해 전시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사용하는 공간 벽에 전시할 거니까. 


연재의 이런 자세에 윤희는 싱긋 웃어 보였고, 연재는 그 미소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윤희는 연재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춘하 시에 온 지 얼마 안 된 여자가 무턱대고 공간이 있다고 전시를 하겠다고? 그리고 그림이 팔리면 공간 대여료만 받겠다니.    

  

윤희는 그림이 팔릴 확률 0으로 봤다. 갤러리들이 화가의 그림을 전시하고 팔렸을 때 괜히 금액의 반을 가져가는 게 아니다. 그들은 그림을 살 만한 사람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 그 명단을 갖기 위해 로터리 클럽이라든지, 무슨 무슨 연합이라든지 하는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가 돈을 들여가며 인맥을 쌓는다는 것을 연재는 모르는 듯했기 때문이다. 오다가다 들른 사람이 호당 이십만 원 하는 그림을 사긴 어렵다. 윤희의 그림은 제일 작은 것도 이십 호였으니 고로 제일 작은 작품도 사백만 원이라는 얘기다.   

  

윤희가 그럼에도 허락한 이유는 처음 선재 갤러리에서 봤을 때부터 이 여자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야생화 그림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 대체 꽃을 보며 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또 설사 그림이 안 팔린다고 해도 어차피 작업실에서 보관만 할 테니, 밑져야 본전이다. 윤희가 보기에 연재는 그림은 좋아하지만 미술 시장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오직 그림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전시하겠다는데, 그것도 첫 기획이라는데, 그 순진한 의도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다. 윤희의 이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연재는 들떠서 그림을 고르느라 눈이 분주했다. 그런 연재를 윤희는 유심히 바라봤다. 그림은 내년 1월 2일부터 전시하기로 하고 연재는 윤희의 화실을 나왔다.     


   *     


그동안 현이는 크리스마스 플리마켓 준비로 바빴다. 마켓만 열면 사람이 모이지 않을 것을 우려해 떡볶이와 어묵, 튀김을 파는 푸드 트럭을 섭외하고 언제 수찬 씨랑 작당했는지 수찬 씨는 휴대용 버너에 호떡을 구울 예정이라고 했다. 게다가 중고 직거래 사이트의 판매자들에게 '팔 물건을 직접 들고 나와 팔 수도 있고, 가격표와 계좌만 붙여놓으면 팔리는 경우 바로 계좌로 연결해 준다'라고 일일이 디엠을 보냈다. 행정복지센터와 문화센터,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곳에 전단을 붙이고, 시청 사거리에 커다란 현수막도 걸었다. 대체 잠은 언제 자는지 연재는 걱정이 되었다. 젊어서 그런지 현이는 이런 연재의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에너지가 넘쳤다. 연재에겐 카페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플리마켓은 자기가 총괄 책임자라고 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이 밝자 연재는 정원으로 나가 나뭇가지를 연결해 만국기를 달았다. 잠시 후, 현이는 헬륨가스 풍선을 가득 들고 나타났다. 나뭇가지마다 헬륨 풍선까지 다니 제법 플리마캣 냄새가 났다. 카페 테이블을 정원으로 꺼내 물건 전시할 매대를 만들고, 가격표를 만들 종이와 펜도 넉넉히 준비했다. 곧이어 푸드 트럭도 도착해 음식을 준비했고, 팔 물건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정오쯤 되니 예상보다 훨씬 많은 상인이 모였다. 알고 보니 특별한 판로가 없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플리마켓이 열린다는 소식을 서로 공유해 함께 왔고, 이에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소상인들까지 합세한 것이다. 준비한 매대가 모자라 늦게 온 상인들은 돗자리를 깔아야 했다. 퀼트 팀도 한 땀 한 땀 만든 손지갑, 안경 지갑, 컵 받침 같은 소품을 진열했다.     


문제는 수찬 씨다. 호떡 반죽을 통에 담아 왔는데, 발효가 되지 않은 건지 무척 딱딱했다. 연재가 보기에 문제가 있었지만, 현이는 일단 한번 구워보자고 했다. 바삭하게 되면 과자처럼 먹어도 되지 않냐며. 수찬 씨가 흑설탕과 땅콩을 버무려 만든 속을 호떡 반죽에 넣고 굽기 시작했다. 호떡 누르는 기구로 아무리 눌러도 펴지지 않고 간신히 지름 십 센티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이게 뭐라고 모두 긴장한 눈을 호떡 한 개를 보고 있었다. 앞뒤로 갈색이 되자 꺼냈다. 수찬 씨와 현이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양보하는 사이 해종 씨가 호떡 누르는 기구로 사 등분해 한 개를 먹었다. 연재도 하나를 집어 입어 넣었는데, 이건 참사다. 밀가루 맛이 나는 돌멩이를 씹는 것 같아 연재는 돌아서 휴지에 뱉었다. 현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형, 내가 준 이스트 안 넣었어?” 


수찬 씨는 깜빡했다고 했다. 해종 씨는 슬그머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현이와 수찬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연재가 말없이 반죽 통을 들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연재가 들고 온 반죽 통엔 김치전 반죽이 들어있었다. 호떡용으로 만든 진한 밀가루 반죽에 물과 김치, 양파를 추가해 김치전 반죽으로 탈바꿈시킨 거다. 수찬 씨가 신나게 김치전을 굽는 사이 현이는 호떡 1개에 천 원 가격표를 떼고 김치전 한 장에 오천 원을 써 붙였다. 구워진 김치전 맛을 보니 익히 아는 그 맛, 실패 없는 그 맛이다. 이건 그냥 나눔 하는 게 좋겠다는 연재의 의견을 받아 현이는 가격을 수정했다. “김치전 공짜” 굽는 속도가 느려 기다리는 사람 애를 태웠다.     


목공소 사장 해종 씨는 나무 도마를 빨주노초파남보 색깔별로 진열했다. 모두 천연 염색이라 몸에 해롭지 않을뿐더러 시간이 지날수록 빈티지 느낌이 나쁘지 않다고 했다. 이렇게 이쁜 나무 도마는 못 참지, 싶은 연재가 보라색 도마를 집으려는데, 다른 사람이 냉큼 집어 가 버린다. 눈이 마주친 해종과 연재는 그냥 웃었다. 고맙게도 해종 씨는 플리마켓을 응원한다며 나무 도마를 시세보다 싸게 내놓았다. 연재도 커피값을 내려 뜨아 한잔에 천 오백 원이라고 가격표를 붙였다. 손님으로 온 사람은 별로 없었고 대체로 물건을 팔러 온 사람들이 물건을 샀다. 그러니 그 안에서 물건이 돌고 고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런 걸 내수시장이라고 하던가. 연재는 생각했다.     


현이는 가죽 공예 작품을 팔러 온 이의 가죽 가방을 메고 모델처럼 워킹하면서 가방을 홍보했고, 현이가 메면 안 그래도 개성 있는 가방이 더 멋져 보였다. 생활용품에 자기만의 스타일로 페인팅을 해서 들고 온 이도 있었는데, 락카 스프레이로 그러데이션을 넣은 노트북 덮개, 지하차도 벽화 느낌 나는 마우스 패드, 빈티지 칠을 한 이어폰 상자 등 세상에 단 한 개밖에 없는 물건이라는 특이점이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인기 매대는 장난감 매대. 상인들을 제외하고 손님이라곤 아이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부모가 전부니, 장난감 코너가 인기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메고 있던 가방 판매에 성공한 현이가 이번엔 장난감 코너에 왔다. 매의 눈으로 뭘 홍보할까 스캔한 현이는 무선 노래방 마이크를 집었다. 건전지를 넣고 마이크 테스트를 하더니 갑자기 매달아 놓은 헬륨 풍선 하나를 당겨 가스를 마신다. 헬륨가스 마신 목소리로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 


아이들 눈이 동그래지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무슨 이유인지 심기가 불편해진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고, 이에 수찬 씨가 현이 손에서 냉큼 풍선을 가져다 가스를 마시고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는 선물을 안 주신대요” 하는데, 여기저기서 자기도 해보고 싶다고 지원자가 속출했다. 순식간에 헬륨가스 노래자랑이 열렸고, 참가자는 아메리카노가 서비스로 나갔다. 모두 물건을 팔기보다 즐기러 나온 것 같았다. 그렇게 한낮의 크리스마스이브가 저물고 있었다.      


모두 짐을 싸서 돌아가고 나니 갑자기 소풍이 텅 빈 것 같다. 텅 빈 정원, 어둠이 내리는 호수를 보자니 연재는 꿈을 꾼 것 같고 꿈에서 깬 것 같고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현실이 비로소 현실로 느껴졌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파티가 끝나면 떠나는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 외롭다. 모든 사랑이 그러한 것처럼. 그래서 떠나는 것을 택한 연재다. 그런데 또 남겨지고 보니 여태 제자리걸음만 한 것 같다. 오늘 밤은 소풍을 떠나 다른 곳으로 소풍 가야겠다고 연재는 생각했다. 외롭지 않기 위해. 더 정확히는 다른 곳에서 외롭기 위해. 삶의 공간이 외로워지면 안 되는 거니까. 삶의 공간은 쉬는 곳이어야 하기에 절대 외로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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