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2장
이번에야말로 지금까지 행로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현은 여름 방학 계획표 같은 하루 루틴을 세웠다. 해뜨기 전에 조깅하고, 운동이 끝나면 샐러드와 요구르트, 삶은 달걀로 아침을 든든히 채우고, 아르바이트 찾아 지원서 내고, 청년 창업 프로그램에 등록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막상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딱히 배우고 싶은 게 없다.
그동안 현은 여느 아르바이트생들처럼 주유소, 카페, 식당, 피시방, 편의점 등에서 주로 일했는데, 일하면서 관심이 생긴 것들을 청년 창업 프로그램을 통해 배웠다. 그렇게 얻은 자격증이 바리스타와 한식 조리사 자격증, 제과제빵 고급반 과정까지다. 일식이나 양식을 더 배워볼까 싶다가도 식당을 운영하는 건 여러 가지 문제로 현실성이 없다. 공무원 시험 준비도 잠시 고민했지만, 합격한다 해도 꾸준히 다닐 자신이 없다. 알바지만 훗날 갖게 될 직업에 도움이 되는 일, 그런 일 없을까?
마음속 규칙은 절대 초조해하지 않을 것. 작심삼일이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이라더니 구직을 시작하고 사흘이 지나자 현은 초조해졌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았다. 초조함은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사라지지 않음을 경험으로 아는 현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다행히 구직 일주일 만에 두 곳에서 면접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처음 면접 장소는 카페로 이름은 ‘미로’다. 카페 일이야 해봤기에 망설임 없이 미로로 행했다. 도착하니 통나무로 만들어진 출입구에서부터 커피가 아닌 한약 냄새가 풍겼다. 쌍화차나 대추차가 시그니쳐 메뉴인 전통찻집인가?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하고 테이블마다 칸막이가 쳐져 있다. 한쪽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손님이 보이는데, 딱 봐도 2차 나온 여자와 장년의 남자가 서로를 향해 각자 다른 욕망을 분출하고 있다.
순간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여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나갈까?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주방에서 60대로 보이는 여자 사장님이 커다란 국자를 들고 나왔다. 현이 면접하러 왔다고 하자 사장은 주방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따라오란다. 사장님은 펄펄 끓는 한약재에 흑설탕을 들이부으며 카페 매니저 해봤는지 물었고, 현은 거절하기보단 까이는 게 낫겠다 싶어 처음이라고 둘러댔다. 사장님은 커다란 국자로 정체 모를 한약재와 흑설탕이 잘 섞이도록 휘휘 젓더니 컵에 가득 담아 맛을 보라고 한다.
어른이 주시는데 사양하기도 뭐 해 받긴 했는데 양이 너무 많다. 머뭇거리는 현을 향해 사장님은 돈 안 받을 테니 걱정 말고 쭉 들이켜란다. 사장님 말씀대로 들이켰다간 입천장 벗겨지는 건 시간문제, 뜨거운 어묵 국물 마시듯 후 불어 조금만 입에 넣었다. 한약에 흑설탕 탄 맛인데, 달아도 너무 달아서 몸이 떨렸다. 당 쇼크가 올 것 같았다. 애써 꿀떡 삼키고 맛있다는 감탄사 음~~ 소리와 함께 엄지척하자 사장님도 한 국자 드시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전통찻집은 처음이라 못 할 것 같다고 죄송한 표정으로 운을 떼는데, 하필 사장님 핸드폰이 울렸다. 사장님은 전화를 받으며 국자를 내밀더니 현에게 계속 저으라는 시늉을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현은 남은 차를 재빨리 싱크대에 쏟고 국자로 솥을 젓기 시작했다.
한참을 저어도 사장님은 돌아오지 않았고 설상가상 손님까지 왔다. 손님은 주방 커튼을 젖히며 “어이, 여기 쌍화차 두 잔!”하고 사라졌다. 어이가 된 현은 당황스러웠다. 나가서 직원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지, 그러기엔 국자까지 들고 있어 직원임이 틀림없는 상황이라 애매했다. 쌍화차 두 잔이란 말이지, 현은 펄펄 끓는 차를 컵 두 개에 붓고 싱크대에 놓인 달걀 두 개를 깨서 노른자만 하나씩 넣었다. 뭔가 허전해 냉장고를 열어보니 잣이 든 작은 유리병과 편으로 잘린 대추가 담긴 락앤락 통이 보인다. 두 개를 꺼내 토핑으로 뿌렸다. 만들고 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홀에는 등산복을 입은 장년의 남자가 여자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근처 산행하고 내려온 모양인데, 현을 본 남자의 손이 여자 허벅지에서 종아리로 내려왔다. 현이 못 본 척하고 쌍화차 두 잔을 테이블에 놓고 돌아서는데, 옆 테이블 여자가 콧소리를 섞어 “오빠, 나도 저거 마시고 싶어” 한다. 현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잘생긴 오빠가 타 주면 더 맛있을 거 같은데”라며 고양이 눈 키스를 날린다.
현은 현장에서 민원을 접수한 공무원 심정이 되어 또 쌍화차 두 잔을 만들었다. 서빙까지 마치고 나니 그제야 사장님이 들어왔다. 사장님은 깨진 달걀 껍데기를 보더니, 쌍화차 어떻게 만들었냐고 묻는다. 현은 있는 그대로 말했고 사장님은 싱크대 아래에서 쌍화차 가루를 꺼내며 다음엔 이걸로 만들라고 했다. 현은 곰솥에 끓던 차의 이름은 끝내 알지 못한 채 갑자기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는 핑계로 황급히 미로를 빠져나왔다. 여기 있다간 가뜩이나 침침한 인생이 더 미로에 갇힐 것 같았다. 나중에라도 다시 오라는 사장님을 뒤로하고 나오는 현의 뒤통수에 쌍화차 맛이 희한하다는 민원이 폭주했다.
두 번째는 편의점. 여기 근무시간은 평일 저녁 6시부터 밤 11시까지다. 대도시 편의점은 24시간 돌아가지만, 춘하는 보통 열 시, 늦어도 열한 시에 마감했다가 아침에 다시 문을 여는 곳이 대부분이다. 편의점 일도 많이 해봐서 잘 아는 일, 다행히 변수는 없었고, 당장 저녁부터 출근하기로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매일 저녁 6시까지 빈둥거릴 수는 없는 일, 낮에 할 일이 더 필요했다. 오랜만에 바깥에 나온 현은 정처 없이 쏘다니다가 전봇대에 붙은 전단을 발견했다. ‘복합 문화 공간 소풍에서 공간을 빌려 드립니다’ 현은 전단을 떼 한참을 바라보다가 주소와 약도를 보며 그곳으로 향했다.
소풍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니 예전에 와본 적 있는 곳이다. 펜션이었을 때 말이다. 그런데 입구부터 완전히 달라져 있어 의식하지 않았다면 펜션 자리였는지 전혀 모르겠다. 복합 문화 공간이라고? 그게 뭐지? 현이 머리를 굴리는데 사장님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그와 몇 마디 나눠보니 감이 왔다. 이분 사업 처음이구나. 말투를 보니 춘하 사람은 아니고, 간단한 질문에도 답을 생각하느라 눈빛이 진지해지는 것을 보니 진중한 사람일 거란 생각, 진중한 사람은 일단 자기와 ‘일적으로’ 잘 맞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현이다. 게다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공간대여 사업이라니, 호기심이 생겨 안으로 들어섰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실내 장식과 슬라이딩 도어를 이용한 공간 분리 방식, 통창과 거울을 이용해 호수를 실내로 끌어들인 방식, 모두 현의 눈을 사로잡았다. 소풍은 아직 아무런 채색이 되지 않은 빈 도화지 같았다. 빈 도화지에 사람과 공간을 채워 놓는 일은 현이 추구하는 창의적인 일이다. 이곳에서 일하면 지금까지 얽힌 삶의 미로에서 탈출해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자기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알바를 구하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존재의 필요성을 어필하는 수밖에.
현은 소풍에서 하면 좋을 것 같은 아이템들을 내놓았다. 연재는 현의 아이디어에 어딘가 당혹스러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혹은 수긍과 기대로 바뀌었는데, 이건 현에게 긍정의 신호였다. 현의 눈에는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보였다. 그건 연재가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일단 홈페이지를 만드는 게 시급하다. 시대가 언젠데 전단을 전봇대에 붙일 일이 아니다. 홍보를 위해 급한 대로 사진 몇 장을 찍어 SNS 여기저기 올렸다. 연재는 처음엔 ‘안 사요, 안 사’를 외치다가 차츰 다단계에 빠지는 어르신들처럼 현에게 홀렸다. 잘하면 옥 장판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쯤 되자 현은 계약서를 꺼냈고, 무사히 도장까지 일사천리로 찍었다.
아쉬운 건 당장 저녁부터 편의점 알바를 가야 할 시간이었기에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 거다. 편의점에서도 현의 머릿속은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사람이 모이고, 복합문화 공간이라는 정체성을 살릴 수 있을지에만 꽂혀 있었다. 집에 돌아간 현은 새벽까지 홈페이지 작업을 하다가 문득 핸드폰 사진에 찍힌 연재의 얼굴을 유심히 봤다.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한참을 생각해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
다음 날 현은 고등학교 인근 체육사에 들러 이름표 두 개를 팠다.
소풍 매니저 김밥, 소풍 부매니저 사이다.
이름표를 보니 소속감도 더 생기고 마치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을 손에 쥔 것처럼 든든함도 들었다. 본격적인 홍보를 위해 시내 여기저기 현수막을 만들어 걸고, 제하를 소풍에 소개했다. 제하는 요가 수련할 공간을 찾고 있었는데, 현이 덕에 소풍과 인연을 맺은 거다. 소풍이란 공간이 현의 손길로 채워지는 게 현에게도 큰 성취감과 기쁨이 되었다. 하루하루 자릴 잡아가는 소풍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는데.
뚝딱뚝딱 콘서트를 앞두고 퇴근하던 길, 현은 버스 정류장에서 희수 엄마와 마주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현을 향해 깊은 원망의 눈빛이 새어 나왔고 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 눈길은 날카롭게 현의 심장에 파고들어 금세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현은 어둠의 세계로 빠르게 끌려들어 갔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이불이 된 것 같았고, 물에 잠긴 소금 자루가 된 것 같았다. 쓰러진 마음을 세우는 데는 짧게 여러 날, 길게 수 주가 걸렸지만, 무너지는 건 순간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 현의 세계가 무수히 닫히고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추진해 온 모든 일이 곧 망할 것 같았고, 모든 비난의 화살에 자기에게 쏠릴 것만 같았다. 그때 그날처럼. 내 실체를 안다면 사장님도 날 멀리하겠지, 현은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사실, 약이 떨어진 지 삼 주가 지났고 약 없이도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또다시 제자리라는 것.
컨디션 조절을 위해 날마다 없는 시간을 쪼개 운동했고, 규칙적으로 밥 먹고, 일하고, 애써 부지런히 잤다. 그래서 이번엔 다를 줄 알았는데 또 제자리걸음이라니, 현의 절망은 배가 되었다. 방에 들어와 불을 끄고 누웠다. 어둡고 축축했다. 이대로 암흑 속으로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다시 세상에 나만 혼자 남겨진 기분은 영원한 고통으로 다가왔고, 고통을 끝낼 방법은 단 하나. 현은 어둠 속에서 또 커터칼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