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세상엔 외로운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호텔마다 만실이다. 숙소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던 연재는 핸드폰을 닫고 외투를 입었다.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가장 사람이 많은 곳에 내려달라고 했다. 중앙동에 내리니 역시나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 연재가 사는 동네에 비하면 꽤나 흥성스럽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사람들 사이를 유영하듯 다녔다. 번화가가 시작하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천천히 걸어도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시 유턴해 이번에는 조금 더 느린 걸음으로 상점 하나하나 구경하면서 걸었다. 유독 손님이 많은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한 작은 술집 여주인이 텅 빈 가게에서 건너편 손님이 꽉 찬 호프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재는 여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여주인은 들어서는 연재를 반기며 몇 분이냐고 물었고, 혼자라고 답하는 연재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았다. 어묵전골에 소주를 시켰고,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연재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순간 “아, 깜짝이야!” 연재는 어깨가 들썩하도록 놀랐다. 창밖에는 해종 씨가 연재를 보고 더 놀란 눈으로 서 있었다. 연재를 확인한 해종 씨가 들어가도 되느냐는 수신호를 보냈고, 연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입문으로 들어온 해종 씨는 주방을 향해 “사장님, 저 왔습니다” 익숙하게 인사하고 연재 앞으로 오며 사람 좋은 미소로
“또 뵙네요! 혼자 오셨어요?”
“네, 뭐.”
“저도 집에 혼자 있기 뭐해서 나왔는데, 여기 저 단골집이라 한잔하려고”
“네...”
주방에서 주인이 나오며
“왔어?”
연재가 창밖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해종 씨는 주인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들으려는 건 아닌데, 저절로 대화가 들렸다.
“고백은 했고?”
여주인의 질문에 해종 씨는 웃기만 했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왜 말을 못 해? 아니 요즘엔 사춘기 애들도 속전속결이야! 말을 해야 거절을 당하든 말든 할 거 아니냐!”
“됐어요. 괜히 말했다가 좋은 사이까지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 그러다 또 놓치면? 지난번에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종 씨는
“어허, 지나간 얘기 자꾸 하면” 말을 하다 말고 힐끔 연재를 본다. 본의 아니게 자기 얘기를 듣고 있는 연재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연재는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 어묵전골 한 국자를 떠 접시에 담았다. 후 불어 한 숟가락 넘겨보니 뜨끈한 국물이 시원했다. 아무리 해종 씨가 연재를 신경 쓰여 한들 이제 먹기 시작한 어묵전골을 두고 나갈 수는 없다. 소주도 겨우 한잔 마셨을 뿐이다. 연재는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나름 신경 쓰지 말라는 배려 차원이다. 핸드폰으로 블루투스를 연결하고 음악을 켜는데, 뚜뚜 하는 신호음과 함께 이어폰이 꺼져버린다. 언제 마지막으로 쓰고 가방에 넣어 뒀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 사이 방전됐나 보다. 이어폰이 꺼진 채 그대로 있다 보니 둘의 대화는 여전히 선명하게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테이블 달랑 다섯 개인 작은 가게다. 음성은 고막을 타고 그대로 전달되었다. 해종과 주인의 대화는 페이크 이어폰에 안도해 한껏 편해졌다.
들어보니 해종 씨는 사십 대 중반에 미혼. 삼십 대에 대차게 차인 후, 연애 공포증을 겪다가 최근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은 지 수개월 됐는데, 아직 고백도 못 했다는 게 둘의 대화에 흘러나온 정보다. 도통 알 수 없는 건 마음에 품은 여인의 정체다. 주인 여자가 아무리 캐물어도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 킬링 타임으로 남의 연애 듣는 건 그야말로 꿀잼인데, 누군지 말을 안 하니 고구마 드라마다. 답답하다. 눈은 거리에 귀는 둘의 대화에 머무는데, 순간 눈앞으로 현이 친구들과 어울려 어디론가 가고 있다. 한 번도 친구들을 소풍에 데리고 온 적 없는 현이다. 또래에 비해 어른스럽고, 늘 사업구상에 머릿속이 꽉 차 있어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내나 싶었는데, 그냥 보통의 청년들처럼 거리를 활보하며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있었다. 당연한데 새삼스러웠다.
어느새 해종 씨와 여주인은 스무고개를 시작했다. 여자의 나이가 삼십 대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해종, 공무원이냐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고. 결정적으로 반한 이유에 관해 물으니, 몸동작이 유려하단다. 몸동작이 유려하다면 무용하는 사람? 해종 씨는 무용은 아닌데 비슷하단다. 그렇다면 요가? 필라테스? 대답하지 않는 해종 씨.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30대 여자, 요가하는 사람. 어? 그럼 제하 씨? 연재가 제하를 떠올리고 있을 때 해종이 연재를 돌아보며 물었다.
“고백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연재는 잠시 생각했다.
“거야 어떤 사람이 고백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여주인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해봐! 아니면 말고” 이어 연재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 연재를 보며 “그쵸?” 재차 확인했고, 연재는 그냥 미소만 지었다. 해종은 이런 연재의 대답에 별다른 표정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연재는 그때 제하와 술 마시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하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좋아하는데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그도 한번 다녀온 돌싱이라는 말, 그렇다면 제하는 아니겠구나 싶다. 하긴 누구면 어떻고, 어차피 내가 알 리 없는 사람일 텐데 싶으니 관심이 사라졌다. 어느새 연재는 마지막 잔을 채웠다.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이가 사라졌던 쪽에서 다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연재가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오갔던 것처럼 목적지 없는 현이도 친구들과 그러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란 데는 없어도 정처 없이 떠나고 싶은 이들이 넘치는 밤이었다. 소주에 어묵탕 국물을 마셨더니 신호가 온다. 한쪽 벽에 붙은 화장실 화살표를 확인하고 연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세먼지는 맑고 외로움은 위험 수준이던 그 밤
그날은 하늘나라 천사가 외로움 한 대야를 옮기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허공에 쏟아버렸는지 춘하 시에 잠 못 들어하는 영혼들이 많았다. 해종 씨도 그랬다. 영 몸도 마음도 개운치가 않아 머리를 식힐 겸 밤 열 시가 넘어 호숫가를 돌았다. 보통 때면 소풍에 불이 꺼졌을 시간인데,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마지막 수업인 요가를 할 때면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 불빛만 새어 나올 뿐 내부가 보이지 않는데, 그날은 블라인드가 젖혀져 안이 훤히 보였다. 소풍 안에서 두 여인이 요가를 하고 있었다. 한 명은 요가복을 갖추고 동작도 프로인 제하. 또 한 사람은 잠옷 바람으로 허수아비처럼 펄럭이는 연재. 호숫가를 돌던 해종은 허수아비를 보며 웃다가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니 깜깜하고 아무도 없다.
동작을 따라 해 보는 해종은 자신도 허수아비란 사실을 깨닫는다.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두 손을 맞잡고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 안쪽에 붙이고 똑바로 서는 동작이다. 일명 나무 자세. 해종이 허공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파닥거리는 동안 소풍 안 허수아비도 휘청이고 있다. 휘청이던 허수아비가 중심을 잡고 버티자 파닥이던 해종도 똑바로 중심이 잡혔다. 물아일체의 순간이랄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이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섰다. 그러가 연재가 휘청했고, 해종은 거의 반사적으로 넘어지는 연재를 보호하려는 듯 두 팔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청이던 허수아비가 파닥이던 허수아비 마음속으로 훅 들어온 바로 그 순간.
잠시 후, 배달 오토바이가 벨을 누르고 연재가 나와 배달 음식을 받아 간다. 가로등에 비친 연재의 얼굴에서 빛이 흘렀다. 해종은 연재가 사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연재를 보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해종은 괜히 귓볼까지 빨개져 집으로 돌아왔다.
소풍에서 플리마켓을 연다고 했을 때 해종은 기뻤다. 가까이에서 연재를 볼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연재에게 부담 주고 싶진 않다. 그리고 아직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지금처럼 곁에서 지내다가 좋은 친구라도 될 수 있었으면 바랄 뿐. 연재가 보라색 도마에 관심을 보였을 때 해종은 더 기뻤다. 그래서 이왕 보라색 도라지꽃을 도마에 그려 넣어 연재에게 선물해야지 생각하며 시내에 나왔는데... 그런데 연재가 여기 ‘퍼플 레인’에 딱 앉아있다니.
연재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다시 앉았다. 연재는 빈 소주병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한 병 더 마실 것인가, 그냥 갈 것인가. 여주인은 연재에게 서로 아는 사이면 이쪽으로 와서 같이 마시자고 했다. 시간은 열한 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연재는 외투를 집으며 시간이 늦어 그만 가봐야겠다고 했다. 연재가 계산하고 나가자 여주인은 또 누구냐고 캐묻기 시작한다. 여주인의 성화에 부대낀 해종도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종이 밖으로 나오니 연재는 사라지고 없다. 괜히 아쉬운 해종은 택시를 타고 작업실로 돌아와 화목 난로에 불을 붙이고 작업 노트를 꺼냈다. 적당한 크기에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 손잡이가 있어 사용이 편리한 도마를 생각하며 대충 모양을 그렸다. 달달한 믹스커피가 생각 나 포트에 물을 끓이는데, 작업실 앞으로 연재가 지나간다. 본능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한시가 다 되고 있었다. 이 야밤에 시내에서 여태 걸어온 모양이다. 해종의 작업실에서 연재의 소풍까지는 어둡고 한적한 길이라 해종은 얼른 다시 외투를 걸쳤다.
앞서가는 연재 뒤로 해종이 걷는다. 연재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건지 뒤에서 봐도 상념이 느껴졌다. 푸른 달이 창백하게 연재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푸른 달과 얼어붙은 호수와 어딘지 눌려있는 연재의 어깨를 보며 해종은 서늘한 마음이 들었다. 해종이 알지 못하는 연재의 세상이 지금 해종의 눈앞에 그 모습 같았다.
앞서가던 연재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해종도 멈춰 연재를 보다가.... 잠시 후 깨달았다. 연재의 어깨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가늘게 떨리던 연재의 어깨가 점점 과격한 진폭으로 흔들리더니,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연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해종은 누군가 저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격한 감정이 태풍처럼 지나가고 잠시 고요가 흘렀다. 연재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연재가 소풍에 도착해 2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해종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연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해종은 작게 속삭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연재 씨"
작업실로 돌아오니 식어버린 포트의 물과 목이 따여 누워 있는 믹스 커피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 포트를 눌러 물을 끓이고 믹스 커피를 컵에 부었다. 커피를 마시며 해종은 그 뒷모습을 내내 생각했다. 왜 울었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음이 저릿해왔다. 커피가 바닥을 보이자 해종은 작업 노트를 다시 꺼냈다. 푸른 달과 호수와 도라지 꽃을 그려봤다. 한 장을 넘기고 다시 달과 도라지 꽃을 그렸다. 다시 한 장을 넘겨 달과 그 아래 여자의 뒷모습을 작게 그렸다. 손잡이가 있어 편리성까지 갖춘 세상에 하나뿐인 도마의 스케치가 완성됐다. 스케치가 끝나자 해종은 제일 좋은 나무를 골라 대패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