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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Dec 27. 2023

김밥과 사이다

창밖은 가을, 장편소설

   

현이 왔다. 명찰 두 개를 들고 왔는데, 

‘소풍 매니저 김밥’. 

‘소풍 부매니저 사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왔는데, 현의 동네 친한 누나라는 제하 씨. 제하 씨는 요가 강사라고 했다. 원래 요가원장을 했었는데, 수강생 감소로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단골 몇 명과 함께 수련할 곳을 찾는다고 했다. 요일은 화목금 저녁 7시에서 9시. 수련 시간은 7시 반에서 8시 반인데, 미리 와서 몸도 풀어야 하고 끝나면 정리해야 하니 두 시간을 쓰겠다는 거다. 요가복을 입은 제하 씨가 호수를 배경으로 물구나무를 섰다. 그 모습을 현이 사진 찍고, 몇 가지 동작을 더 촬영한 제하 씨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현이 찍은 제하 씨 요가 사진은 소풍 홈피의 배경을 장식했다. 예술이다. 


현은 오늘도 혼자 바쁘다. 사진 포토샵하고 SNS 여기저기 올리고 공간을 대여한다는 전단을 만들어 시내 요지에 붙이기까지 했다. 호수를 배경으로 찍은 요가 사진 한 장이 불러온 효과는 대단했다. 다들 그 사진을 찍겠다고 문의가 쇄도했다. 정기적인 이용이 아니니 가격을 얼마를 받아야 할지 난감한데, 현은 한 시간 공간대여에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주기 포함 4만 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내 여섯 건의 계약이 성사됐다. 연재는 이런 현을 보며 의아했다. 


‘아니 이 정도 능력자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현이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연재는 지루할 틈이 없다.

이 아이는 천재 사업가가 틀림없다. 정체가 대체 뭐지? 왜 이렇게 뭐든 잘하는 거야?

현이는 저녁 시간에는 편의점 알바를 가야 해서 6시면 퇴근했다. 

낮 12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에 주 5일 근무.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현이가 퇴근하고 없는데,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러 온 필라테스 강사. 은은한 조명 아래 찍고 싶다며 밤 8시경에 왔다. 한참 가을이라 저녁 7시만 넘어도 어둑어둑했다. 호숫가엔 가로등이 있어 소풍 실내조명을 끄면 역광으로 실루엣만 나오는 사진을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필라테스 강사는 고난도 동작을 취하고 연재는 핸드폰으로 정성껏 사진을 찍었다. 허나 결과물은 처참했다. 왜 똑같은 배경에 똑같은 핸드폰으로 찍은 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지? 연재는 놀라웠다. 더 놀란 사람은 필라테스 강사였다. 


연재는 서둘러 현이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현이 달려왔다. 괜히 한 시간을 넘게 지체했기에 돈은 안 받고 싶었지만, 현이가 찍어준 사진이 마음에 든 강사는 4만 원을 두고 갔다. 편의점은 어쩌고 왔냐는 연재의 말에 현은 문 잠그고 왔다며 다시 달려 나갔다. 현이의 뒷모습을 보며 연재는 저 아이는 동네 홍반장이구나 싶다.               

 *


한 달이 흘렀다. 요가복을 입고 인증샷을 찍으러 온 사람들과 커피 판매로 백오십만 원의 수익이 발생했다. 연재의 인건비는 제외하고 현이의 이주 치 급여와 원두 가격, 각종 공과금까지 내면 남는 건 없지만 이 정도도 감지덕지다. 한 달 무료란 말을 부지불식간에 내뱉는 바람에 큰 적자가 발생할까 걱정했는데, 선방했다.     


소풍이 작게나마 커피 명소로 떠오른 것도 다 현이 덕분이다. 현이 소개해준 로스팅 업체에서 원두를 썼는데, 향과 맛이 명품이다. 물론 비쌌다. 하지만 한잔을 마시더라도 이런 걸 마셔야지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싸고 맛있는 커피라는 인식이 돌면서 테이크 아웃 손님이 꽤 늘었다. 요가 인증샷 찍었던 사람들이 커피 맛있다는 해시태그까지 달아주면서 그것이 홍보되어 호수에 산책 나온 사람들은 거의 소풍 커피를 들고 있었다. 사실 연재는 공간대여를 주로 하고 커피는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작게 운영할 계획이었는데, 이 계획도 지금으로서는 어긋났다. 인생이 모든 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도 맞고, 행운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온다는 말도 맞다. 지금까지만 보더라도 말이다.     


예상과 반대로 혜진 씨와 퀼트 회원들은 한 달이 지날 무렵 정식으로 협상을 제안해 왔다. 소풍 이전에는 이 집 저 집 번갈아 가며 작업했었다. 그런데 통창으로 호수가 보이는 곳에서 우아하게 커피와 토스트를 즐기며 고품격 취미생활을 경험했기에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주 5일 하루 두 시간, 한 달 12만 원을 사 등분하면 일인 삼만 원으로 고품격 취미생활이 가능하니 그리 부담되지 않았다. 대신 접이문을 쳐서 반만 사용하기로 했다. 반이라도 꽤 큰 공간이라 유모차 4대까지도 충분하다. 한꺼번에 12만 원이 들어오니 연재는 행복하다. 소소히 커피랑 브런치까지 하면 이 팀만으로도 월 이십은 거뜬하다.     


요가 강사 제하 씨는 저녁 시간이라 보일러도 돌려야 하고 넓은 공간을 통째로 사용, 인원도 열 명 이상이다. 이용하는 인원이 많으면 소모되는 물건들도 많기에 시간당 만 원으로 계산, 한 달 이십사만 원으로 계약을 마쳤다. 대신 제하 씨가 공간을 정리하고 문을 닫는 조건으로 말이다. 연재는 그 시간에 저녁을 지어먹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니까. 오전 9시에 문을 열고 오후 6시 이후에는 일하지 않는 게 연재의 원칙이다.      

그리고 기쁜 소식 하나. 소풍 홈페이지에 글쓰기 신청자가 생겼다. 무려 두 명. 개강 인원을 열 명으로 해놨으니 이제 여덟 명만 더 신청하면 된다. 연재는 기대감에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었다. 열 명이 채워지리란 보장은 없지만, 홈페이지 오픈 두 주일 만에 두 명은 꽤 의미 있다. 홍보만 되면 더 많은 사람이 올 수 있다는 뜻이니까.     


수찬 씨도 한 달 무료가 끝나자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했고 칠만 이천 원을 결제했다. 수찬 씨 수강생들도 대체로 커피는 기본으로 시키니 이 수입도 쏠쏠하다. 레슨이 끝나고 수찬 씨는 연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여기서 공연해도 될까요?”      

너무 급작스러운 말이라 눈만 끔벅거리는 연재에게 수찬 씨는 신곡을 냈다는 얘기와 쇼케이스를 하고 싶단 의사를 비쳤다. 

‘그렇지, 이거야말로 복합 문화 공간에서 할 일이지’ 생각하는데, 

어느새 귀 밝은 현이 다가오며     

“날짜는 언제고 몇 명이나 초대해요?”     

날짜는 시월 말, 그러니까 시월의 마지막 날이고 금요일이다. 티켓은 오십 장 정도 준비할 건데, 몇 장이나 팔릴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앰프와 마이크는 수찬 씨가 준비하고 정원에서 간단한 다과와 커피는 소풍에서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소풍 오픈하고 아직 개업식도 안 했는데, 개업식 겸 쇼케이스를 하면 좋겠다고 연재는 생각했다. 장소 제공과 조명, 인원 관리를 소풍에서 맡아주는 조건으로 십만 원만 받기로 했다. 다과와 커피는 연재가 준비한다. 사실 연재는 ‘십만 원’이란 금액을 안 받아도 그만인데, 받아야 수찬 씨도 부담 없고, 서로 책임감이 더 생기니 소액이라도 받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다. 연재가 초대할 사람은 퀼트 팀과 목공소 사장 정도다. 하지만 근처 주민 누구라도 와서 즐겼으면 좋겠다.     

 

현은 곧바로 홍보물 작업에 들어갔다. 홈피에 홍보물을 올리고 SNS 여기저기 링크를 걸었다. 어리게만 보였던 현의 등이 오늘따라 듬직하게 느껴졌다. 시월 말이면 사실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그야말로 말이 나오자마자 바로 실행하는 뚝딱뚝딱 콘서트인 셈이다. 연재는 현에게 ‘가을밤의 뚝딱뚝딱 콘서트’란 타이틀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현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사장님 말씀하시는데, ‘네’가 아니라 생각해 보겠다니. 하여간 ‘MZ는 다르구나’ 싶다. 그래도 연재보다 사업 수완도 좋고 아이디어도 더 뛰어났단 걸 부정할 수 없으니 애처롭게 또 마른침만 꼴딱 삼킬 뿐이다. 떡을 맞출까, 빵과 쿠키를 준비할까 연재도 벌써 마음이 분주했다.     


  *뚝딱뚝딱 콘서트     


아침부터 날이 좋았다. 가을 하늘은 높았고 청명했고 기온도 20도 안팎으로 따뜻했다. 

뚝딱뚝딱 콘서트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참, 콘서트 이름은 결국 그리되었다. 

오늘 저녁 요가 수업은 공연으로 취소되었다. 고맙게도 모두 양해해 주었다.

퀼트 팀이 활동을 마치고 정원에 의자 까는 걸 도왔다. 수찬 씨는 앰프를 연결하고 마이크를 설치했다. 시간이 두 시가 넘어가는데 현이가 나타나질 않는다. 전활 걸어보는데, 받지도 않는다. 떡과 쿠키를 찾아와야 하고 과일과 음료도 세팅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일에 그렇게 열정적이던 얘가 무슨 일이지? 처음엔 늦은 줄 알고 화가 났다가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행실을 봐서 이럴 얘가 아닌데. 다행히 50대 기타 수강생인 건축가가 팔을 걷어붙였다. 혜진 씨도 과일 세팅을 도왔다. 네 시가 넘어가니 수찬 씨의 수강생들과 친구들이 나타나 자리를 메웠다. 수찬 씨는 리허설을 시작했고, 과일 세팅을 마친 혜진 씨가 티켓 현장 판매도 맡아줬다. 오늘따라 혜진 씨 아기는 울지도 않고 잘 논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것을 보느라 작고 까만 눈동자가 분주하다. 연재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머리가 하얘진다. 사람들 앞에서 오프닝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는 현이가 다 소개해주고 연재는 인사만 하기로 했었는데, 이 망할 자식이 나타나지 않는 거다.   

   

현이 소개하려 했던 말들을 다시 연재의 워딩으로 준비해야 했다. 얼굴 근육이 굳어 입이 잘 벌어지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해본 게 언제인지. 물론 학원에서 얘들을 놓고 수업은 했지만, 이건 늘 하던 그런 수업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를 앉혀놓고 소풍에 대해 마케팅을 해야 한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다섯 시가 되고 오십 개 자리는 금세 다 찼다.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뒤에 서거나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수찬 씨가 연재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많은 눈동자가 연재를 바라봤다. 머리가 하얘지면서 준비했던 말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찬 씨가 그런 연재를 먼저 눈치채고 크게 환호하며 손뼉을 유도했다. 사람들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손뼉을 치며 환호해 주었다. 비로소 진정된 연재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다음 준비한 말을 이어갔다.     


“소풍에 소풍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소풍 매니저 김밥입니다.

복합 문화 공간 소풍은 오늘 싱어송라이터 수찬 씨의 공연을 시작으로 

클래식, 재즈 등 다양한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니 관심 가지고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현재 글쓰기와 문학 토론 수강 신청을 받고 있으니 원하시는 분은 홈페이지에서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 함께 힘찬 박수로 수찬 씨 불러볼까요?”     


힘찬 박수 소리와 함께 수찬 씨가 나왔다. 마이크를 넘겨준 연재는 자기가 무슨 소릴 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말을 똑바로 했는지, 빼먹은 말은 없는지, 이것저것 묻고 싶지만 현이가 없다. 다행히 혜진 씨가 관중석에서 양손 엄지 척을 하며 잘했다는 사인을 보내주었다. 환하게 웃는 혜진 씨를 보며 연재는 생각했다. 저렇게 환하게 웃는 사람이었구나. 미소가 눈부신 사람이구나, 혜진 씨는. 저 착한 미소에는 어떤 작은 ‘악’도 없었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선한 미소.     


수찬 씨 곡은 연재가 빠져들기엔 다소 어려웠다. 가사도 관념적이라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와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연은 좋았다. 기타 소리가 좋았고, 가을 밤바람이 좋았고, 기타 사이사이 귀뚜라미 협연까지 다 좋았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이 연재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완벽한 밤, 완벽한 공연이었다. 현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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