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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양주로 가세요

어린아이 그림 같지만, 세상을 관조하게 만드는 화가, 장욱진 미술관

by 화양연화 Feb 01. 2025

피카소는 말했다.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는 사 년이면 족했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고. 장욱진도 이와 같다. 조각가 최종태의 표현에 따르면 "칼날 같은 예리함과 조금도 용서될 수 없는 준엄함이 있지만 겉으로는 아이들도 그릴 수 있다 할 만큼 평이한 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의 특징이라고. 장욱진은 최소한의 획으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작가다. 그러니 단순해 보이는 그의 획은 오랜 시간이 만들어 낸 결과물로 결코, 단순하지 않다.

  

장욱진 미술관


경기도 양주에 있는 장욱진 미술관은 2014년에 개관했다. 설립 당시 BBC가 뽑은 '새로 문을 연 세계 8대 미술관'에 뽑혔고, 김수근 건축상을 받을 만큼 아름다운 경관 위에 독특한 건축 양식을 뽐낸다.


장욱진의 그림 '호작도'(호랑이가 나오는 그림)에 집의 개념을 섞어 설계된 것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호랑이 같은 모양인데, 그렇다 보니 전시실마다 독특한 구조를 띤다. 지금 이곳 상설전시관에선 '완전한 몰입'(2025년 9월 7일까지)이 진행 중으로 장욱진의 작품 3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장욱진 미술관 위에서 본 모습 ⓒ 장욱진 미술관


장욱진(1918~1990)은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유영국 등과 함께 대한민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2세대 서양화가이자 1세대 모더니스트이다. 가족, 새와 나무, 해와 달과 같은 친근한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내 안의 악이라 할만한 것들이 사라지고 선한 것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던 와중에 우연히 그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다.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툭툭 튀어나온다. 마음속으로부터.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밝은 거울이나 맑은 바다처럼 순수하게 비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속엔 잡다한 얼룩과 찌꺼기들이 많다. 기쁨 슬픔 욕심 집념들이 엉겨서 열병처럼 끓고 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지워간다. 다 지워내고 나면 조그만 마음이 남는다. 어린아이처럼 조그만. 이런 텅 비워진 마음에는 모든 사물이 순수하게 비친다. 그런 마음이 돼야 붓을 든다."


그의 그림은 유독 작은 것이 특징인데, 그것에 대해 작가는 화면에 대한 지배력을 완벽하게 가져가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림이 커지면 싱거워진다며. 그런데 이건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관람객도 그 작은 그림을 보느라 고개를 한껏 빼고 유심히 보게 되면서 온전히 내 안에 새기게 되니 말이다.


장욱진은 충남 연기군 지주 집안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서울로 이사해 경성사범 부속학교에 다녔는데, 9살 무렵 그린 까치 그림이 <전일본소학생미전>에서 일등상 수상하면서 이후 (지금으로 보자면) 중,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공모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의 실질적인 보호자였던 고모는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격하게 반대해 몰래 숨어서 그려야 했다. 그랬던 그에게 당당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1938년 조선일보 주최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공기놀이'가 조선일보 사장상을 받으면서 상금 백 원을 받으면서다.


공기놀이(1938) ⓒ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그는 이 돈으로 고모에게 비단 치마를 선물했고, 그때부터 고모는 그의 재능을 인정해 더는 말리지 않았다. 다음 해 그는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학교 교수진들은 대부분 프랑스 유학파로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사조들을(인상주의, 포비즘, 큐비즘 등) 공부했고 그도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접할 수 있었다.


3년 후 그는 이병도(1934년 진단학회를 창설하고 이후 문교부 장관을 지낸)의 장녀 이순경과 결혼한다. 이 여사는 훗날 장욱진이 그림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책방 '동양서림'(1954년 서울 종로구 혜화동)을 열어 가족 생계를 책임졌으며 이를 30년 가까이 운영해 여성 최초로 출판문화공로상을 받았다.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아내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그가 그린 그림이 '진진묘'인데(진진묘는 아내의 법명) 이 작품에서 그는 아내를 보살 형태로 묘사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그림만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힘들었기에 1945년, 국립박물관에 취직한다. 이곳 진열과에서 박물감(지금의 학예사)으로 일하며 상설 전시를 담당했는데, 이를 통해 전통 미술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2년여 만에 사직하고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신사실파를 조직해 동인전에 참여한다. 다음 해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피란 중 종군 화가로 활동하다가 고향으로 잠시 돌아온 그는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하기라도 하듯 미친 듯이 그림에 매달리는데.


자화상(1951) ⓒ 개인소장


이 그림은 그 시기에 그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자화상이다. 노란 들판이 고흐의 밀밭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은 화사하면서도 따뜻하다. 잘 익은 벼가 햇빛을 받아 출렁이고, 기다랗게 난 빨간 길 위에 세련된 프록코트(결혼식 날 그가 입었던 옷)를 입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우산을 들고 관람객을 바라본다.


그 뒤를 따르는 강아지와 줄지어 따라오는 네 마리의 새는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반기는 것 같다. 사실, 이 그림은 현실과 정반대의 상황을 꿈꾸는 그림이다. 전쟁으로 파괴되어 황량하기 그지없는 들판에 다시 좋은 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1954년, 그는 서울대 서양학과 교수로 취임해 이곳에서 약 7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그림은 가르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던 그는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자 교수직을 내려놓고 덕소에 작업실을 만들어 칩거에 들어간다.


가족(1955) ⓒ 국립현대미술관


이 그림은 대학에 몸 담고 있을 시기에 그린 '가족'으로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을 때 최초로 공개된 작품이다. 같은 주제로 그린 다른 작품 속엔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좁은 집안에 가득 찬 형태로 그려지는데, 이 작품은 유일하게 그와 아이들이 그려졌고 가족을 소재로 한 첫 작품이기도 하다. 이 그림이 공개되기까지 지난한 일들이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 그림만은 원하는 이가 있어도 주지 않고 간직했었는데, 1964년 반도화랑에서 열린 그의 첫 번째 개인전에 이 작품을 내놓았다가 일본인 사업가에게 팔렸다. 일본인 사업가는 팔 생각이 없는 장욱진을 몇 번이고 찾아와 간청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장욱진으로서는 최초로 돈을 받고 판 작품이다.


당시엔 그림을 파는 일이 생소한 일이었기에 장욱진의 아내는 그의 명함을 챙겨뒀고, 1990년 장욱진이 세상을 떠나고 작고 1주년 전시를 맞아 장욱진이 두고두고 아쉬워했던 이 그림의 행방을 찾던 중 그림을 샀던 그의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그의 병세가 위중해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작품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다시 시간은 흘러 2024년, 그의 대대적인 회고전을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에 다시 이 그림을 찾고자 발 벗고 나섰다.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중 그의 가족과 다시 연락이 닿았고, 배원정 학예사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그의 아틀리에 깊은 벽장 안에 잠들어 있던 그림을 찾아냈다. 이후 지난한 절차와 협상 끝에 다시 한국으로 가지고 와 관람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나무와 새(1957) ⓒ 개인소장


이 작품은 그의 시그니처(까치와 나무, 아이와 마을, 해와 달과 같은)가 모두 들어간 '나무와 새'로 1958년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 전시된 작품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까치는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 읽히는데,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1977년, 그가 양산 통도사 경봉 스님에게 법명을 받을 때 스님은 그에게 "뭘 하느냐"고 물었고, 그는 "까치를 잘 그립니다" 답했다. 스님은 "쾌하다"라며 그에게 비공 거사와 '까치 작(鵲)'을 두 번 붙인 작작(鵲鵲)이라는 법명을 지어줬다. 자기 자신을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닌 '까치를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콕 집어 표현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또 작작(鵲鵲)은 까치의 울음소리 '깍깍'을 떠올리게 해 이 또한 재밌다.


까치 위엔 까치 다리 모양을 한 나무가 중심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나무 가운데엔 해맑은 아이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 위에는 마을 풍경이 해와 달과 함께 동화처럼 그려져 있다. 대칭을 중요시했던 그답게 사인도 새 다리 아래 대칭으로 표시했고, 나무를 중심으로 마을과 새가 위아래로 균형을 맞춘다.


그의 많은 작품 중 특히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라 내 방엔 이 그림 포스터가 걸려있다. 요즘 난 유명 영화사와 손을 잡고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 대본 회의 나가서 까이고 오는 날엔 이 그림 앞에서 묻는다. "좋은 날이 올까?" 내 말에 그림도 답한다. "오늘이 좋은 날이다. 깍깍."


그는 평생 "나는 심플하다"를 외치며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에게 '심플'이란 솔직하고 거짓 없이 사는 것을 뜻했다. 죄가 있다면 그림을 그리고 술을 마시는 것뿐이었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늘 그리고 때때로 취하는' 간결한 삶을 살았다. 그 때문에, 도인의 이미지가 강하기도 했는데,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품은 그가 죽기 두 달 전에 그린 '밤과 노인'이라는 작품이다.


밤과 노인 (1990) ⓒ 개인소장


흰 도포를 입은 노인(아마도 그 자신)은 하늘을 날아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그의 발아래 그가 평생 사랑했던 나무와 새, 어린아이가 뛰어다니고, 하얀 집은 주인을 잃은 듯 텅 빈 상태로 닫혀 있다. 노인의 표정엔 아쉬움이 없다. 한평생 잘 놀다간 사람처럼 훌훌 떠나는 모습에는 미련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는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다. 그는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명대로 살다 갈 것을 말하곤 했는데, 정말 명(命)대로 그림을 그리다가 때가 되어 하늘로 훌훌 되돌아갔다. 이 그림은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다. 세상을 관조하게 만드는 힘.


장욱진 미술관은 조각공원 내에 있어 아름다운 여러 조각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미술관 앞으로 천이 흐르고 주변엔 양주시에서 운영하는 캠프장도 있으니 캠핑 좋아하는 사람이면 눈여겨 보면 좋을 것 같다. 또 미술관 맞은 편에 있는 민복진 미술관(조각 작품)도 볼 수 있으니 이왕 가셨다면 들러보면 더 좋겠다(무료).


매일 최선을 다하는데도 결과가 신통치 않아 괴로운 사람(내 이야기),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아 괴로운 사람(또 나), 욕망은 높고 현실은 더 높아 좌절감이 드는 사람(또 또 나)이 있다면 장욱진을 만나러 가시기를. 그의 그림을 자세히 보다 보면 마음속 번뇌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고요해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나와 같이 간 내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강가의 아뜰리에(장욱진 저)' '진진묘' (장욱진 미술관) '가장 진지한 고백'(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장욱진 미술관)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추신: 연재가 매주 화요일인데, 자꾸 다른 날에 올려 죄송합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제가 지금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서 시간이 촉박합니다. ㅠㅠ

아마도 이 주에 하나씩 올릴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 연재하는 글이라 기사로 업로드된 후에 브런치에 올릴 수 있는데, 기사로 나오는 시점이 일정치 않아 그렇습니다. 너그러이 양해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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