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유나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아침을 먹자마자 저수지가 보이는 곳까지 뛰어갔다가 돌아오고 누렁이한테 간식을 던져주고는 또 돌다리를 건너 당숙네를 지나 마을 입구까지 갔다 돌아왔다. 할머니는 점심때나 돼야 온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유나는 엄마가 저수지 위로 건너오면 안 된다며 오전 내 대문을 들락거렸다. 그 사이 점심 준비를 마친 할머니는 같이 저수지까지 가보자며 유나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섰고 돌다리를 건널 즈음 드디어 유나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가족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나는 혼자 이곳에 남겨진 걸 깨달은 날 그랬듯 짧은 두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엄마에게 달려갔다.
가족의 손을 잡아끌고 집으로 올 때까지 유나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설명해줄 것도 들려줄 얘기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특히 언니 오빠한테는 가르쳐 줄 것들투성이였다.
집에 도착해 방에 들어선 가족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유나가 그린 그림과 썼던 글씨들, 별표 받은 할머니의 숙제와 종이 한 장에 크게 써 놓은 할머니 이름까지, 방은 그런 것들로 새롭게 도배가 된 것 같았다.
“아니 이게 다 뭐야?”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빠는 입을 떡 벌렸다.
“아빠 이게 내가 본 뱀이다. 진짜 이뿌지? 그리고 이건 냇가에 사는 송사리. 그리고..”
“고 봉 레..?”
크게 써진 이름을 발견한 언니가 유나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고봉레가 누구야?”
오빠도 글씨를 보며 물었다.
“할머니 이름! 몰랐지- 언니도 모르고 오빠도 몰랐지롱-”
“알았거든! 갑자기 생각 안 난 거 거든!”
오빠는 머쓱해 하며 억울한 표정으로 유나에게 소리쳤다. 옆에서 언니도 나도나도 하며 기억이 안 났었다고 변명했지만 의기양양해진 유나의 목소리를 이길 수는 없었다.
“이게 다 니가 써서 붙인 거야?”
아빠는 가져온 짐을 건넌방 한쪽에 잘 정리해 두며 물었다.
“여기 빨간 별 받은 건 할머니가 쓴 거. 내가 숙제 검사한 거야”
할머니가 썼다는 말에 아빠가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가 썼다고? 어떤 게?”
유나는 할머니가 똑똑한데 글씨만 모른다며 할머니가 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혼자 쓴 이름을 가리켰다.
“인제 할머니 혼자서도 이름 잘 쓰지?”
“그러게.. 잘 쓰셨네..”
아빠는 할머니가 썼다는 글씨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상 좀 같이 들어요”
점심 식사 준비를 마쳤는지 엄마가 방문을 열고 아빠를 불렀다. 아빠는 알겠다고 방을 나서면서도 할머니가 썼다는 글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유나는 언니 오빠와 함께 곤졸 투어를 시작했다. 저보다 나이만 많았지 언니와 오빠는 시골에 대해 당최 아는 게 없었다. 유나는 먼저 집 밖으로 데리고 나와 냇가로 갔다.
“조심해. 돌 미끄러워”
할머니가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써먹으며 유나는 물고기 잡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진짜 잡았어? 나도 잡고 싶다..”
할머니가 만든 그물을 손에 쥔 채 오빠는 아쉬운 표정으로 냇물을 들여다보았다.
“엄-청. 매운탕 끓일 만큼”
“진짜-?”
언니가 못 믿겠다는 얼굴로 유나를 쳐다보았다.
“매운탕 진짜 맛있어. 근데 지금은 추워서 다 잔대. 못 잡아. 가자 인제”
유나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냇가에서 올라서 바쁘게 또 앞장섰다. 언니 오빠는 냇물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이곳에서는 왠지 유나가 대장 같았다. 알려 줄 게 너무 많은 유나는 제가 뻥을 치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보여줄 곳들, 들려줄 얘기들이 너무 많을 뿐이었다.
“쩌기 저수지 있자나. 거기는.. 괴물 산대”
유나가 갑자기 소리를 낮추는 바람에 언니와 오빠의 고개가 절로 유나에게로 숙여졌다.
“진짜?! 괴물이 있다고?!”
“쉿! 비밀이야!”
유나가 꾸짖듯 언니를 쳐다보며 여전히 비밀스러운 말투로 얘기를 이어갔다. 목을 자라처럼 잔뜩 움츠려 모은 모습으로 유나가 들려주는 저수지의 비밀 얘기를 들으며 삼 남매가 얼굴을 맞대고 걸어갔다. 당숙네 대문에서 나오던 용이 아재는 그런 유나의 일행을 발견했다. 오늘 온다더니 도착했구나 생각하며 유나를 불러보았지만, 수다 삼매경에 빠진 삼 남매 누구도 용이 아재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신이 난 유나의 표정이 멀리서도 보이는 듯했다.
“쩌기가 뱀 사는 데야”
저수지로 가던 중 멀리 보이는 정자를 가리키며 유나가 말했다. 언니와 오빠의 고개가 동시에 유나의 그쪽으로 돌아갔다.
“우와- 진짜 뱀 있어?”
“저기는 내일 가자. 저긴 위험한 데니까 조심해야 돼. 풀이 이만큼 높아서 나는 아재가.. 맞다. 언니 오빠 아재 알아?”
“아재..가 뭐야?”
“당숙 할먼네 용이 아재. 당숙 할머니도 모르지?”
언니는 슬쩍 오빠 눈치를 보았다. 오빠는 아느냐는 듯, 혹은 오빠도 나처럼 모르냐는 듯.
“에효. 모르는 거 천지네. 당숙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보다 훨-씬 더 할머닌데 허리가 이렇게 꼬부라져서..”
오빠가 이제 생각났다며 자기도 그 할머니 안다고 늦게나마 말했지만, 유나는 믿을 마음이 없는 건지 신경 쓰지 않고 제 설명을 이어나갔다. 당숙 할머니와 용이 아재 얘기는 삼 남매가 저수지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까지 이어졌다.
저녁 식사를 마친 아빠는 식구들을 데리고 당숙네로 가 인사를 드렸다. 엄마 아빠는 용이 아재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고 아재는 별로 한 것도 없다며 멋쩍어했다. 유나에게 미리 당숙 할머니 얘길 듣고 온 언니 오빠는 유나처럼 뒤로 숨지 않고 꽤 늠름하게 당숙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집에 올 때까지 당숙 할머니가 문고리를 잡고 일어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유나가 말한 ㄱ자로 굽은 허리는 결국 보지 못했다.
다음날도 유나의 식후 투어 일정은 이어졌고 아빠는 선산에 올라 할아버지 산소를 둘러본 후 불 필 때 쓸 마른 나뭇가지들을 날라오셨다. 내일이면 유나네 식구가 떠날 시간이었다. 이틀째 시골집 방안은 오랜만에 여섯 식구로 꽉 찼다. 아랫목부터 건넌방 앞까지 요를 깔아야 했다. 제일 윗목에 자리를 잡은 아빠는 옆자리에 누운 할머니의 다리를 주무르며 더 머물지 못하고 올라가게 돼서 죄송해했다.
“죄송은. 여 오래 있어 뭐 헐라고. 농사 질 것도 아니고. 어여 가서 돈 벌어야제..”
아빠는 죄송한 마음을 손아귀에 담아 메마른 할머니의 다리를 꾹꾹 눌러주었다. 아랫목은 언니와 오빠가 차지했다. 장판의 누런 색이 진할수록 더 따뜻한 곳이었기에 둘은 티격태격하며 더 누런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유나는 아랫목보다 엄마 옆자리를 택했다.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 나 묶어줘요”
유나의 말에 할머니는 몸을 일으켜 반짇고리를 찾아 안에 있던 긴 천을 꺼내왔다.
“뭐 하는 거야?”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는 아빠가 유나와 할머니를 휘둥그레 쳐다보았다.
“엄마 손 줘봐”
“손..?”
유나와 엄마 곁으로 다가온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유나의 오른손과 엄마의 왼손을 끈으로 묶기 시작했다.
“니들이 또 버리고 갈까 봐 머리 쓰잖여. 을마나 고민을 했다고. 엄마가 못 떼 놓게”
할머니는 손녀딸의 지시대로 엄마와 유나의 손을 잘 묶어주었다. 황당하게 쳐다보던 엄마와 아빠도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야, 풀고 가면 되지-”
오빠가 유나를 놀리듯 말했다.
“그럼 내가 일어날 거 거든! 할머니 더 꽉- 꽉 해주세요”
모두의 놀림 섞인 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나는 단단히 묶인 끈을 보며 만족해했다. 그제야 유나는 마음 편히 잠자리에 누웠고 시골 방의 불도 꺼졌다. 불 꺼진 시골의 겨울밤은 유난히 더 칠흑 같았다. 그렇게 곤졸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짹짹짹- 짹짹짹-
날이 추워져서인지 참새들 수가 적어졌다. 하지만 잠을 깨우는 짱짱함은 여전했다.
유나는 눈을 뜨자마자 휙 고개를 쳐들고 옆자리를 확인했다. 엄마가 옆에 있었다. 손목에 묶은 천도 그대로였다. 아빠도 윗목에서 아직 자고 있었고, 아랫목을 차지한 언니와 오빠도 아직 꿈나라였다. 언제 나가셨는지 할머니 요만 비어 있었다. 유나는 그제서야 씩 웃으며 다시 자리에 누워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할머니와 엄마는 내내 부엌에서 보따리를 싸느라 바빴다. 아빠는 아침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뒷산에 가서 마지막으로 마른 나뭇가지들을 잔뜩 지고 와 부엌 뒷문 밖에 쌓아 두었다. 언니 오빠는 소 여물통 앞에 쪼르르 앉아 아침 식사를 하는 누렁이를 보고 있었다. 질겅질겅 풀떼기를 먹는 모습이 재밌는지 둘은 손으로 먹이를 주기도 하며 재밌어했다. 느긋하게 갈 준비를 하는 식구들과는 달리 유나의 마음은 이미 기차역에 가 있었다. 어디 한 군데 가만있지 못하고 부엌도 들여다봤다 아빠한테도 가봤다 하며 다했냐고 열 번도 넘게 물어보고 있었다.
“엄마 다 했어? 인제 가?”
“다 혔으. 이자 이놈만 싸믄 되여”
할머니는 안달하는 유나를 보면서도 하나라도 더 싸 보내려 계속 뭔가를 꺼내 보따리에 집어넣었다.
“인자 나가셔유?”
용이 아재가 대문으로 들어섰다. 소 우리 앞에 지게를 벗어놓은 아빠는 유나 등을 떠밀며 아재에게 다가갔다.
“유나야, 그동안 감사합니다 인사해야지”
“아재 감사합니다! 물고기도 잡아주고 목말도 태워주고 자전거도 태워주고 노트도 주고.. 헥헥헥, 다 감사합니다-”
장난기 넘치는 유나 말에 용이 아재는 웃음을 터뜨리며 유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인자 핵교 들어 가믄 애기 아니고 국민학생이니께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아재네 전화번호 잘 외웠제?”
“삼십이 국에 사 육 삼 칠!”
“으이그 똑똑허네. 한 번씩 전화 혀. 할미랑 통화 혀야지”
바리바리 보따리를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할머니가 말했다. 엄마와 할머니가 보따리를 다 싸고 나오는 모습을 보자 유나는 소리치며 잽싸게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알겠어용, 이제 얼른 가자!”
주섬주섬 짐을 들고 인사를 나누며 온 식구가 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 유나는 이미 다리까지 뛰어가고 있었다.
“야 너 할머니한테 인사 안 해-!”
오빠의 목소리에 유나는 가던 발을 멈추고 그대로 뒤돌아 단숨에 대문 앞까지 뛰어왔다. 그리곤 할머니 치마폭에 화악- 안겼다.
“할머니, 글씨 공부 잘하시고 계란 푸라이 안 비리니까 쫌 드시고, 안녕히 계세용!”
여전히 장난스러운 유나 모습에 할머니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랴 그랴…”하며 주름 잡힌 손으로 유나 등을 문질러 주셨다.
“고생하셨어요. 즈이 갈게여. 아, 틀린 글씨는 지가 고쳐 놨어여”
“글씨...?”
아빠는 씩 웃으며 할머니를 내려다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할머니와 인사를 마친 언니와 오빠도 유나를 향해 달려나갔고 그 뒤를 엄마와 아빠가 뒤따랐다. 엄마 아빠는 그만 들어가라고 손짓했지만 할머니는 알았으니 어여 가라고 그 손짓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렇게 막 돌다리를 건너려는데 유나가 갑자기 할머니를 향해 소리쳤다.
“할머니! 부엌에서 자꾸 이케 하지 마요! 빠이빠이-”
유나는 허리를 숙이고 꼬부랑 할머니 흉내를 낸 후 손을 흔들었다. 그 말에 할머니는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간신히 가둬놓고 있던 눈물도 툭- 함께 떨어지고 말았다. 유나는 할머니가 당숙 할머니처럼 허리가 굽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살아보니 시골 부엌에서는 허리를 굽힐 일이 많았다. 당숙 할머니도 아마 그런 부엌에서 오래 일을 해서 그렇게 된 거라 유나는 생각했었다. 할머니는 알겠다고 들리지 않는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용이 아재가 조용히 할머니 등을 문질러 주었다.
그렇게 다섯 식구는 할머니와 용이 아재 시선에서 조금씩 멀어지다 결국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나의 높고 밝은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할머니 귀에 머물고 있었다.
“신났네.. 신났으.. 우리 유나가 신이 났네..”
아들네를 보내고 방에 들어온 할머니는 텅 빈 방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작은 꼬맹이 하나가 집안 분위기를 싹 바꿔놓고 가버렸다. 할머니는 벽에 붙여놓은 유나의 그림과 글씨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웃고 있는데 주책맞게 눈물을 여전히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할머니가 썼던 이름의 "레" 자에는 줄이 하나 더해져 있었다.
해가 바뀌었다. 딱딱하게 얼었던 땅들이 녹아 부드러워지고 겨울잠을 끝낸 어린싹들이 그 틈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할머니는 당숙네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용이 아재도 신발을 신은 채 마루에 걸터앉아 귀를 열고 있었다.
“어이구, 인자 담 주부텀 핵교 가는 겨?”
“입학식 때 바보같이 우는 애도 있었대요. 난 코도 안 흘렸는데”
유나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쩌렁쩌렁하게 들려다.
“갸들은 아마 글씨도 몰를 걸. 우리 유나가 젤로 똑똑허겄네”
“에효, 내가 또 가르쳐줘야겠네..”
한바탕 유나와의 수다를 마치고 전화를 끊은 할머니는 용이 아재와 복기하듯 유나의 입학 얘기를 반복하며 즐거워했다. 어느새 문지방까지 엉덩이를 밀고와 앉은 당숙 할머니도 뭔진 모르겠지만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얹고 겨우내 걸어뒀던 고무 다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대문을 활짝 열어둔 채 흥얼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언제나 그랬듯 조용하고 평화로운 곤졸에는 파릇파릇 봄이 싹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