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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프씨 Apr 12. 2024

작고도 어린, 곤졸

(9)

어느새 냇가엔 살얼음이 얼었다. 유나도 엄마가 몰래 챙겨놓고 간 두꺼운 겉옷에 목도리와 장갑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개울가 돌이 미끄러우니 올라가지 말라고 했다. 지금껏 할머니 말은 항상 맞아왔다. 이제 유나에게 할머니는 글씨만 빼고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개울가에 내려와 보니 가장자리 얼음이 보이긴 했지만, 아직 졸졸 물이 흐르고 있었다. 밖에 있는 저도 이렇게 추운데 차가운 물 속 송사리들은 다 얼어 죽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유나야-”


용이 아재가 돌다리 위에서 유나를 불렀다. 유나는 기다렸다는 듯 콩콩거리며 뛰어갔다.



그날 용이 아재와 함께 간 곳은 우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추운 날씨 때문에 큰 천막을 친 곳에 장이 섰는데, 유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소가 모여있는 걸 처음 봤다. 천막 안에는 반이 소였고 나머지 반이 사람이었다. 옛날엔 우시장에 아낙들은 들어오지 못했다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아니었다. 개개인들이 사고팔던 거래도 경매로 바뀌어 우시장 한쪽에서는 시끄러운 경매가 진행 중이었다. 소들은 큰 소, 중간 소, 송아지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고 유나와 용이 아재는 사람들이 덜 붐비는 곳 위주로 돌아보고 있었다.


“이짝 놈들은 인자 도살장으로 가는 겨”


“도살장이 뭐예요?”


“유나 고기 좋아허지? 니가 먹은 고기가 야들이잖여”


“……………”


유나는 곧바로 용이 아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홀로 남겨진 첫날 할머니가 말한 ‘니네 집’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과 비슷했다. 내가 먹은 고기가 야들이라고..?


“생일날 엄마가 불고기 해줬지? 그리구 명절에 먹은 산적, 갸들이 다 야들이여. 야들이 도살장에 끌려가믄 글케 고기가 되는 겨”


유나는 그동안 소를 떠올리며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맛있게 먹었던 그 불고기랑 산적이 이 착하게 생긴 누렁이들이었다니.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나 별로 안 먹었어요!”


유나는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왠지 나쁜 일을 한 기분이었다.


“누가 뭐랴. 클라믄 고기 많이 묵어야지. 그래야 쑥쑥..”


“이제 안 먹을 거야!”


생각해보니 엄마가 ‘소고기’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고기’의 ‘소’가 바로 이 소들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 뭔가 억울하기도 한 기분이었다.


“안 묵긴 왜 안묵어..”


사뭇 심각해진 유나의 표정을 살피던 용이 아재는 슬그머니 유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좀 더 작은 몸집의 소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아재는 여깄는 거나, 저짝에 송아지 하나 살라고 온 겨”


“소고기 먹을라구요?”


“아녀. 키워서 일 시킬 겨. 아재는 송아지 안 잡어묵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유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재는 주로 중간 소나 송아지들 사이를 서성거렸다. 유나는 아재를 따라다니면서도 한 번씩 마이크를 잡은 경매사 쪽으로 시선이 갔다. 좋은 소를 싸게 사려고 눈에 불을 켜고 경매 중인 사람들 가운데 이 상황이 뭔지 모를 소들은 그 크고 순박한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소들과 달리 경매사는 매서운 눈초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일 초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유나는 그 큰 소들이 애처롭고 불쌍해 보였다. 어떤 소는 마치 눈물이 고여있는 것처럼 슬퍼 보이기도 했다. 송아지들은 어려서 그런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한 번씩 벌떡벌떡 놀라기도 했다. 송아지라고 해도 유나보다 훨씬 컸지만, 유나 눈에 그곳에 있는 송아지들은 강아지처럼 작고 어린 아기들 같았다.


“아재, 나 눈 매워요”


천막에 들어와 언젠가부터 유나는 자꾸 눈을 비비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는데 마치 그 안의 공기에 고춧가루가 섞인 것처럼 매콤함이 느껴지더니 점점 눈을 똑바로 뜨기 힘들 정도로 따갑고 시렸다.


“에고 그랴? 어여 나가자 어여”


용이 아재는 유나를 번쩍 안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맑고 싸한 바깥 공기를 쐬자 매운 기가 좀 날아가는 것 같았다.


“워뗘? 아적 매워?” 


“쫌 괜찮아요”


아직 눈물을 닦고 있긴 했지만 시린 느낌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아재가 공기 안 좋은 데를 괜히 델꼬 왔네. 아적 애긴 디..”


어린 꼬맹이가 눈가가 벌게지도록 눈을 비벼대는 모습에 용이 아재는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자책하던 용이 아재가 자전거를 가지러 뛰어간 사이 유나는 맑은 공기에 시원하게 매운 기를 씻고 있었다. 막상 나와보니 천막 밖도 시끄럽고 정신없긴 마찬가지였다. 경매가 끝난 소를 차에 싣고 가려는 사람들과 타지 않으려는 소들이 한바탕 씨름을 하고 있기도 했고, 군데군데 모여 앉아 허연 김이 올라오는 국밥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시장은, 우는 사람은 없었으니 슬픈 장소가 아니었지만 우는 소들이 있는 걸 보면 여느 시장처럼 신나는 장소도 아닌 것 같았다. 용이 아재는 유나를 자전거 뒷자리에 잘 앉히고 그곳을 벗어나 울퉁불퉁한 흙길을 따라 달렸다. 우시장에서 멀어진 후 매운 기는 사라졌지만, 그곳의 풍경은 유나의 머릿속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유나야. 소도 유나처럼 눈물 난다”


담담하게 내뱉은 용이 아재의 말에 유나는 천막 안에서 언뜻 지나친 눈물 고인 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까 나도 봤어요”


“그려? 유나도 봤구나.. 아재도 어렸을 때 아부지 따라 우시장 갔다가 새끼랑 안 떨어질라고 눈물 뚝뚝 흘리는 어미 소 봤는데..”


“불쌍하다..” 


“불쌍허지.. 죽어라 일해주고 새끼 놔 놨더니 델꾸 가서 팔아먹기나 하고.. 참 나뻐 그자?”


아까 눈물이 났던 게 눈이 매워서였는지 소들이 불쌍해서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유나는 다시는 그런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우시장에 다녀온 후로 유나는 할머니 집에 있는 누렁이와 더 친해졌다. 물론 누렁이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유나의 마음은 확실히 전과 달랐다. 더는 누렁이 앞에 오면서 콧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지도 않았고 여물을 다 먹은 누렁이에게 제가 먹던 과자나 곶감을 던져주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더는 돼지라고 놀려대지 않았다.


어느새 밤은 점점 더 빨리 찾아왔다. 날짜를 세고 있지 않았지만 6시도 안 돼서 마을은 캄캄해지고 있었다. 누렇게 잘 구워진 아랫목은 이제 온종일 더운 기를 품고 있었다. 자기 전에는 얼마나 절절 끓는지 시커멓게 타지 않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나가 뜨끈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아재네서 가져온 어린이 잡지를 읽고 있으면 할머니는 구운 가래떡이나 고구마 같은 걸 들고 오셨다. 그리고 화로에 미리 올려둔 쇠 그릇에 물그스름 하게 녹은 조청을 듬뿍 찍어 유나 입에 넣어주셨다.


“할미 숙제 검사 안 혀?”


화로 옆에 놓인 작은 탁자를 유나 앞으로 옮겨 놓고 할머니는 자랑스럽게 노트를 펼쳤다. 일어나 앉는 유나의 표정은 어느새 깐깐한 선생님 모드로 전환됐다. 일상적인 업무를 보듯 유나는 탁자 위에 놓인 빨간 색연필 끄트머리를 손가락 세 개로 다소 건방지게 잡았다.

펼쳐놓은 노트엔 가, 나, 다, 라..부터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누렁이 같은 간단한 단어를 몇 번씩 따라 쓴 글씨가 보였다. 유나는 눈을 내리깔고 한눈에 봐도 정성스레 눌러 쓴 할머니 글씨에 어른들이 하듯 빠르게 동그라미를 치고 휘갈기듯 별표를 그려주었다. 빨간 별표를 받은 할머니 얼굴엔 함박웃음이 절로 피었다.


“홍 홍.. 할미가 그랴도 공부 머리가 있는가 벼. 오늘도 감사합니다 유나 선상니임-”


유나는 조청 그릇 안에 걸쳐놓았던 가래떡을 마저 집어 먹었다.


“선상님. 할미 글씨 하나 좀 갈켜 줘”


“뭐요?”


유나는 뜨거운 조청에 입이 데지 않게 한참이나 입으로 불고 한입 베어 물었다.


“고 봉 례”


“그게 뭐에요?”


“할미 이름”


뜨거운 아랫목의 열기 때문인지 할머니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들고 있던 가래떡을 입에 다 넣은 유나는 노트를 넘겨 빈 장 제일 위에 글씨를 썼다.


“고..봉..레..”


입으로 소리를 내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유나 옆에서 할머니도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되뇌었다.


고. 봉. 레


한글을 다 깨쳤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유나는 ‘ㅔ’와 ‘ㅖ“를 구별해 쓸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할머니 이름이 고봉레에요?”


“이.. 이게 내 이름이여..”


할머니는 손녀가 써준 자신의 이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유나가 쓴 글씨를 보며 한획 한획 그림을 그리듯 자신의 이름을 따라 적었다. 고개를 숙인 할머니의 뒤통수가 보였다. 당숙 할머니만큼 새하얗지는 않은 회색의 할머니 머리는 항상 짱짱하게 빗겨져 단정하게 비녀가 꽂혀있었다. 유나는 매일 아침 할머니가 처음 보는 작은 빗으로 정성스레 머리를 빗고 긴 끈을 입에 문 채 열심히 머리를 땋은 후 솜씨 좋게 땋은 머리를 감아 비녀를 꽂는 모습을 목격했다. 언젠가부터 유나는 할머니의 단정한 머리가 예뻐 보였다. 당숙 할머니는 머리가 짧은데도 부스스하고 지저분해 보였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잔머리 하나 내려오지 않게 깔끔했다. 


“나도 이거 하고 싶다”


유나는 할머니 뒤통수 아래에 꽂혀있는 비녀를 만지작거렸다.


“쪽지고 싶어? 우리 선상님이 하고 싶다는디, 할미가 해줘야지-”


할머니는 연필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건넌방으로 꺾어지는 벽 아래 놓인 오래된 문갑에서 실로 뜬 알록달록한 소쿠리를 꺼냈다. 그 안에는 금처럼 번쩍거리지는 않지만, 할머니 집에서 본 가장 화려한 색들의 것들이 들어있었다. 유나는 할머니 옆에 앉아 우와- 소리를 내며 안에 든 신기한 것들을 이것저것 들춰보았다. 


“젤 좋은 거 해줘야지 우리 유나”


할머니는 초록색 옥비녀를 집어 들었다. 아끼느라 잘 쓰지 않은 탓에 손때가 묻지 않아 매끈하고 맑았다. 유나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유나를 뒤로 돌려 앉히고 소쿠리에 들어있던 참빗을 꺼내 머리를 빗겨주었다. 쪽을 지기에 유나의 머리는 짧았다. 간신히 어깨에 닿을 정도라 머리가 잘 땋아지지도 않았지만, 할머니는 야무지게 유나의 머리를 땋고 돌려 결국 비녀를 꽂아주었다.


“아이고 우리 유나 새색시겄네-”


처음 해보는 헤어스타일에 유나도 입이 찢어져서 방문 옆 벽에 걸어둔 거울로 가 고개를 돌려가며 아슬아슬하게 달린 비녀를 비춰보았다.


“와 진짜 이쁘다”


유나는 거울 속 제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꼭 어른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유나를 보며 할머니는 계속해서 칭찬을 늘어놓았고 유나는 그 말에 기분 좋게 취해갔다. 유나와 할머니가 그렇게 아옹다옹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새 엄마 아빠가 도착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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