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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프씨 Apr 05. 2024

작고도 어린, 곤졸

(8)

곤졸에는 유적지처럼 취급되는 곳이 있었다. 할머니 집 앞길에서 당숙네로 이어지는 냇가 다리 반대편에, 논과 밭이 모여있는 땅으로 찔러 갈 수 있는 작은 길이 있었다. 원래 길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자주 다니면서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로 풀이 자라지 않고 흙이 드러나 길처럼 되어버린 곳이었다. 양옆으로 온갖 잡초와 돌보지 않은 풀들로 무성한 그 길 한편에 생뚱맞게도 정자 같기도 하고 사당 같기도 한 옛 건물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 주변은 어른 키 정도 되는 높이의 돌담으로 네모나게 둘러싸여 있었고 빛바랜 붉은빛의 작은 대문도 있었지만 잠겨있는 건지, 잠겼다고 생각하고 열어보지 않은 건지, 누구 하나 그곳을 들어가 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귀신이 사는 집이라고도 하고, 예전에 유배당한 정승이 내려와 지냈던 곳이라는 소문도 있다는데 정확하게 누가 살았는지, 왜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옛 건물에 대한 용이 아재의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정자가 보이는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아재는 길게 자란 잡초로 둘러싸인 그곳이 잘 보이도록 유나를 번쩍 들어 목말을 태워주었다.


“보인다-” 


어린 유나 눈에도 그곳은 사람들에게서 버려진 곳 같아 보였다. 아무렇게나 막 자라 있는 풀들은 마치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경계의 손사래를 치는 듯했다.


“아재도 안 들어갔어요?”


“저길 왜 드가 무섭게. 유나 니 들가 볼 텨?”


버릇처럼 장난기가 발동한 용이 아재는 정자에 다가갈 듯이 크게 몸을 움직였다.


“아 싫어 싫어. 나도 안 갈래-”


용이 아재 머리에 손을 얹고 있던 유나는 본능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아이고 알겄으- 머리 다 뽑히겄네. 살살 좀 잡어”


유나는 잡아 뽑을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를 조금 풀었다.


“저 가믄 클 나. 사람들 안 와서 이 동네 귀신들 죄 모여 있디야”


“어 뭐 있다-!” 


유나는 손에 힘을 주려다 말고 발을 구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 움직였죠?”


“아이고, 어디 뭐가 있다는 겨어-”


“쩌기- 쩌기 담 위에. 쩌기요오!” 


유나의 성화에 용이 아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다양한 색으로 쌓여있는 돌담이라 그 사이에서 뭔가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가리킨 곳을 자세히 보다 보니 유나 말대로 돌 말고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아재, 쫌만 가까이요!”


“아이고 이 아가씨 겁도 읎네. 니 귀신이믄 워쩔 겨?” 


“귀신 말고 뭐 있어요! 쫌만!”


“나는 몰러, 니가 가랬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용이 아재는 조심스레 정자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성한 풀들을 헤치며 두 사람은 조심조심 돌담으로 다가갔다.


“어 뱀이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둘의 시야에 돌담 위를 기어가고 있던 작은 뱀이 보였다. 뱀도 유나와 용이 아재를 보고 놀랐던지 가만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야 조용혀-”


용이 아재는 목소리를 낮췄다. 조심스러워하는 아재 행동에 유나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생전 처음 살아있는 뱀을 쳐다보았다.


“새낀가 봐요”


유나는 고개를 숙이고 귓속말하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재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티브이에서 말고, 책에서 말고, 동물원에서 말고 살아있는 뱀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할머니 말은 참말이었다. 그냥 유나를 겁주려고 했던 말이 아니었다.

돌담 위 뱀은 티브이에서 봤던 것들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아주 어린 새끼이거나 원래 크기가 작은 종류의 뱀 같았다. 전반적으로 붉은빛이었고 뱀 특유의 거뭇거뭇한 무늬들도 있었다. 


유나는 꽤 가까이에서 뱀과 마주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신기한지 뱀도 빤히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유나는 문득 뱀이 참 예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똑똑해 보이기까지 했다. 잠시 그렇게 유나와 용이 아재를 주시하던 뱀은 작은 혀를 낼름거리더니 스르르 돌과 돌 사이 작은 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야야 친구들 델러 갔나 부다. 언능 가자-”


아재는 얼른 수풀 사이에서 빠져나와 좁은 샛길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뱀이 있었네! 귀신이 아니라. 아재도 몰랐죠?”


“그르게. 유나 땜이 아재도 이제 알었네. 근디 니 뱀 안 무셔?”


“이뿌게 생겼더라. 똑똑할 거 같죠?”


“뭐어? 뱀이 이뻐?” 


용이 아재는 꼬마 아가씨 취향이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돌아오는 내내 유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뱀과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용이 아재네서 가져온 노트에 한 번씩 그림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그날은 꼭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뱀을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저녁을 먹고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운 유나는 노트를 펴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알록달록 칠한 뱀의 눈엔 공주의 눈에 붙여주었던 휘어지는 눈썹도 그려주었고 동글동글한 담장도 그렸다. 그림을 다 그린 유나는 입으로 말하며 밑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나는 오늘 아재랑 정자에 가따. 거기서 에쁜 뱀을 보아따"


옆에 앉아 바느질하고 있던 할머니는 작은 손으로 한 자 한 자 글씨를 써 내려가는 유나가 대견해 보였다.


“아이고, 우리 유나가 엄청 똑똑허네에- 글씨도 이르키 잘 쓰고”


“근데 할머니는 뱀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할머니도 정자에 가봤어요?”


“뭘 어트기 알어 기냥 아는 거지. 할미는 무셔워서 못가”


유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일기를 이어나갔다. 그런 유나를 가만히 보던 할머니가 쓱 옆으로 다가와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여...?”


할머니는 주름진 손가락으로 유나가 쓴 글씨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나는’” 


“이.. 그럼 이건 뭐여?”


“‘오늘’. 할머니 글씨 몰라요?”


“이. 할미 글씨 몰러. 유나가 좀 갈켜줄려?”


할머니는 짐짓 기대하는 얼굴로 유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혼자 깨쳤는데 할머니는 왜 공부를 안 했어요?”


유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르게 말여. 할미는 게을러서 글씨를 한 개도 못 깨쳤으. 할미 좀 갈켜 줄텨?”


“에효, 잠깐만요. 이거부터 다 쓰고요. 일기 쓰는 게 얼마나 힘든데”


유나는 턱을 쭉 빼고 눈을 내리깐 채 대단한 일이라도 하듯 마저 글씨를 써나갔다.


“그랴그랴. 얼른 혀. 할미도 얼른 꿰맬게-”


"뱀은 얼굴이 동그라코 눈도 동그래따. 그리고 나를 쳐다보아따…"


글씨를 쓰면서 유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이렇게 쉬운 글씨도 모르면서 저수지에 괴물이 있는 것도, 뱀이 있는 것도 어떻게 다 알까..? 그물도 만들 줄 알고 다 똑같아 보이는 나물 이름도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글씨만 모르는 걸까..? 유나의 궁금증도 모른 채 어린 스승을 내려다보는 할머니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기대에 차서이기도 했고 대견해 보여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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