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
스리랑카 바닷가
한국에서 잠시 떨어져 있어 보니 비로소 한국이 보였다. 한국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헬조선'이 아니었다. 동남아에서의 두 달, 한국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좋은 나라 vs 헬조선
막 체크인을 한 늦은 밤이었다. 저녁을 못 먹어서 시장했다. 마침 가방 안엔 선물 받은 컵라면이 하나 있었다. 캄보디아에서부터, 태국, 미얀마를 거쳐 말레이시아까지 무려 4개국을 동거동락한 애틋한? 컵라면이었다. 울퉁불퉁 찌그러진 볼품없는 모양새가 그 시간들을 짐작케 했다. 1층 로비로 내려갔다. 푸근한 인상의 직원이 보였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정수기를 찾아 물을 넣었다.
"여행 중이니?" 정수기까지 함께 와 준 직원이 물었다.
"네, 긴 여행 중이에요. 회사를 관뒀거든요."라고 말하고, 아차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의로 그만둔 것이 아니라 계약이 만료된 건데 이 여행 내내 나는 내가 회사를 관뒀다고 말하고 있었다. 개인의 문제가 사회 문제라는 말이 있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을 나는 내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걸까.
계약직과 정규직은 분명 다르다. 입사 경로가 다르고 하는 업무가 다르고 처우가 다르다. 계약직에겐 1차 서류전형, 2차 면접, 3차 임원진 면접이라는 관문이, 정규직에겐 그 보다 길고 복잡한 1차 서류전형, 2차 PC능력을 비롯 상식, 업무 수행 능력을 평가하는 지필고사, 3차 토론 및 실무진 면접, 4차 최종면접, 5차 신체검사가 펼쳐진다. 분명 그 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정정당당하게 그 자리를 쟁취한 건 인정받고, 또 칭찬받아야 한다.
하지만 저성장 기조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도 때도 없이 불거지는 채용 청탁 비리 뉴스에 나의 2년 계약직 경험이 버무려지니까 청년들의 구직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관심 가져야 사회 문제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2년 간 딱 두 번, 아니 무려 두 번이나 열심히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 열심히 하지 말라는 곳에서 열심히 하다가, 또는 열심히 하지 않다가 계약이 만료되는 이상한 나라가 내가 사는 한국이었다.
"어디를 여행했니?"
"베트남 하노이에서 시작해서 지금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이동하려고 해요."
"경비가 많이 들지 않니?"
"다행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어요. 대학 졸업하고 지금까지 계속 일 하면서 매달 세금을 납부했거든요. 그 세금의 일부 받는 거예요."
"얼마나 받는데?"
미리 산정해 본 액수를 대략적으로 말해 줬다.
그러자 그녀는 "우와, 한국 너무 좋구나. "라며 감탄을 했다.
호텔에서 25년째 근무 중이라는 그녀의 기본급은 1000링깃이었다. 여기에 야간 수당과 같은 것이 이것저것 더해져 급여로 2000링깃 정도를 수령한다고 했다.
그녀의 근사한 한국 경험은 이어졌다. 인도네시아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 친구는 한국에서 십 년을 일하고, 고향에 땅을 샀다고 했다. 부럽다고 했다. 한국어만 능통하게 구사한다면 한국에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꿈과 희망의 나라 한국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을 전달하려고 했을까. 나는 이슬람 국가(IS) 스파이로 한국에 입국한 근로자 얘기를 해 줬다. 공장에 위장 취업을 했는데, 그만 공장주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한국을 떠났다는 웃픈 이야기를 그 뒤에 헬조선이란 신조어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내 얘기들은 그녀에겐 그리 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녀, 손주가 CRAZY 하게 요즘 빠져 있다는 한국 문화를 얘기해줬다. 할리우드 영화는 안 찾아봐도 한국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 관람한다고 했다.
어느 순간, 한국이란 주제를 놓고 나는 온통 나쁜 얘기만 하고, 그녀는 온통 좋은 얘기만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한국이 내게 얼마나 많은 것을 제공해주고 있는 지를 몰랐다. 익숙해서 당연하다고 만 여겼지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호사, 광부를 수출하는 나라에서 수입하는 나라로
애들린의 눈물
애들린과 함께 찍은 사진
"똑똑똑"
새벽 이른 시각,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겠지’ 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근데 멈춰야 할 노크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짜증이 밀려왔다. ‘지금 이 도미토리엔 나만 투숙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문을 열었다. 눈물 흘리고 있는 에들린이 보였다.
한 시간 전, 나는 툭툭을 앞에 두고 그녀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그 툭툭을 타고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에서 콰타르행 비행기에 오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비자 승인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비자 승인을 대행하는 필리핀 에이젼시에서 필리피노 직원과 영어가 아닌 따갈로어로 업무를 봤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더 화가 나는 건 비자 문제로 비행기를 타지 못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두 번째라는 것. 한 번 비행기를 놓칠 때마다 항공권, 숙박비, 체류비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는 데, 그렇게 소비한 돈이 앞으로 받게 될 2달 치의 급여에 달한다고 했다.
새벽의 소란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아침 먹지 않을래?”
그녀는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했다. 나도 비행기를 놓쳐본 적이 있어서 그 허탈한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거 같았다.
방에서 나오니, 매니저가 있었다.
“애들린이 돌아왔어. 비자에 문제가 생겼대”
나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애들린의 상황을 공유했다.
안타까워하는 나와 달리 매니저의 반응은 담담했다.
“흔한 일이야.”
스리랑카 네곰보에서 종종 일어나는 그 일을 처음 본 나는 그의 침착함이 마냥 어색했다.
에들린의 사연은 이랬다. 필리핀에서 태어나 필리핀에서 정규 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그 후 세부에 지사를 둔 일본 기업에서 엔지니어로 근무를 했다. 하지만 집이 여유롭지 못했다. 아니, 경제력 없는 부모님과 여러 명의 동생들을 부양해야한다는 책임감이 결정적였다. 유일하게 대학 공부를 마친 그녀의 몫이라고 여겼다. 사실 전부터 벌이가 필리핀과 비교 자체가 안 되는 해외로 나가고 싶었지만 남자 친구의 반대가 있었고, 그 반대를 이겨가면서까진 해외 취업이 절절하진 않았다. 그런 이유로 맘에만 담아둔 해외 취업을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조금씩 실현 가능한 무엇으로 만들어갔다. 그리고 현재의 남자 친구는 전 남자 친구와 여러모로 달랐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쟁취할 수 있도록 곁에서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타입이었다. 그녀의 콰타르행에는 그렇게 많은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 콰타르에서 받게 될 월 급여는 200달러 수준, 숙소는 회사에서 무상 지원을 해 주니 3년만 알뜰살뜰하게 저축하면 필리핀에서의 집 장만은 거의 확실한 데, 그 장밋빛 미래가 손 앞에서 잡힐 듯 말 듯 그녀를 애태우고 있었다.
아침도 거르고, 어두운 방에서 누워만 있는 애들린이 안쓰러웠다. 한 마디만 하자고 했다.
"애들린, 다른 사람들은 비싼 돈 주고 이 곳에 와서 네곰보 비치를 즐겨. 근데 너는 방 안에만 있을 거니? 네가 비행기에 못 오른 건 이미 일어난 일이야. 그건 되돌릴 수 없어. 근데 지금 이 상황은 네 선택으로 많이 달라질 거야. 5년 후 네곰보를 떠올렸을 때 무엇을 기억하고 싶니? 화창한 날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웃던 널 기억할래 아니면 비행기 놓치고 어두운 방에서 혼자 누워 있던 널 회상할래?. "
비행기도 놓쳐 봤고, 돈 때문에 속상했던 적도 있고, 좀 더 오래 살았고, 적당히 아팠던 언니의 충고가 통했을까. 애들린이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우린 숙소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로 나갔다. 밝고 사교적인 그녀는 금세 러시아 커플과 친해졌다. 그녀 덕분에 나도 그들과 말문을 열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참 신기했다. 그들도 해외로 구직 중인 젊은이였다. 더 신기한 건 남자아이의 커리어가 애들린의 것과 꽤 유사한 것. 난 워낙 그쪽과 상관없는 경력이라 그들의 대화가 생소하기만 했는데, 그들은 겪하게 공감하며 쉼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애들린에 의하면 본인의 커리어가 남자의 것보다 더 전문적이라고 했다. 애들린은 나에게 그랬듯 그들에게도 콰타르에서 받게 될 급여와 조건을 자랑스럽게 밝혔다. 러시아 커플은 몹시나 애들린을 부러워했다.
해외 취업을 앞두고 있는 청년들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을까. 스리랑카 역시 한국으로 취업하고 싶어 하는 청년이 많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1960, 70년대, 독일로 떠났던 광부, 간호사들이 떠올랐다. 시체를 닦아야 했던 스물 초반의 여성과 탄광에서 탄가루를 먹다시피 열악한 상황에서 한 끼를 때우던 청년들이 콰타르에서 번 돈 80%를 필리핀으로 송금할 거라는 애들린과 함께 오버랩됐다.
취업난으로 해외로 취업의 눈을 돌린 젊은이가 많다고 하지만 그때의 파독 광부, 간호사만큼 절박할까 생각해봤다. 그들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게 될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스리랑카를 떠났어야 하는 애들린은 결국 내가 한국에 도착한 후에야 콰타르로 날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추신.
그 어려움을 먼저 경험한 선배 나라답게 지금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한국에 와 고생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조금 따뜻하게 바라보고, 대견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사실 동남아에서 한국 취업 비자 취득하려면 한국어 능력시험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통과해야하는 등 요건이 꽤 까다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