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하셨나요?
퇴직을 15여 일 남짓 남겨두고 상사가 면담을 청해왔다. '왜 지금이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퇴직을 결심하고 퇴직의사를 밝힌 지 보름이 막 지난 후였기 때문이다. 비록 퇴근 직전에 요청한 짧은 면담이긴 했지만, 확실하게 한 달 뒤 퇴직을 하겠다고 정확한 퇴직시기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진심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상사는 새로운 앞날을 응원하겠노라고 말했고, 퇴직이 받아들여진 것이라 이해했다. 퇴직이 확정된 후에는 보다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근무하며 앞으로 뭘 해야 하나 하는 고민으로 나날을 보내던 중 상사의 뒤늦은 면담 요청은 너무나 뜬금없어 가슴을 두방망이질하며 불안하게 만들었다.
처음 물어온 질문은 '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가 뭐야?'였다. 쉬고 싶다는 말속에는 미처 꺼내놓지 못한 무수한 말들이 있었으나, 지난한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서로가 알고 있으니 이야기해 무엇하나 하는 마음과, 어찌 되었든 간에 퇴사하겠다는 결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상대방도 내심 나의 퇴사를 말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쉬고 싶다'는 간편한 이유를 들어 퇴사의사를 밝혔었다. 그런데 이제서야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는지 묻다니, 지금에 와서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하는 허탈감마저 들었다.
A: 회사에서도 OO 씨가 일도 잘하는 데다가 매장 상황도 잘 알고 있으니 한번 붙잡아보라고 이야기를 해서..
평소 '좋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만두라', '말리지 않는다'라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어왔던 터라 황당하기도 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A: OO 씨 내가 아무 말 안 하니까 모르는 것 같지, 다 알고 있어.
라는 서두로 시작된 장황한 이야기로 그간에 있었던 여러 갈등과 문제를 풀어놓았다.
A: 나는 B도 C도 마음에 안 차, OO 씨가 그래도 제일 오래 같이 일을 했고 그중에서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거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나는 B도 필요하고 C도 필요하고 OO씨도 필요해.
"알고 있다면서, 알고 있었다면서. 당신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되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퇴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돈 지 두 해 만에 퇴직을 고하기 직전까지 힘드니 도와달라고 온몸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동료의 회피와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평가였다. 업무 부담의 과중을 토로한 것은 부담스러운 불평불만쯤으로 치부되었다. '어쩔 수 없어.'라는 면피성 답변 속에는 함께 당신의 짊을 나눠지겠다는 말은 없고 상황이 이러니 이때까지 해오던 데로 쭉 당신이 짐을 짊어지고 홀로 가라는 냉혹한 외면만 있었다. 더 이상 혼자는 못하겠다는 마음에 업무 분장을 하자는 요구는 '요즘 얘들이란' 따위의 비난과 맥이 상통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모든 일을 딱 잘라 니 일 내 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헛웃음마저 나왔다. '아 그래서 이때 것 니 일도 내 일이고, 내 일도 내 일인 채로 지내오지 않았는가.' 당신은 손가락으로 입으로 이래라저래라 말만 했을 뿐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기도 했다.
A: "내가 월급 더 많이 받는다고 더 많은 일을 해야 돼? 나는 나 편하자고 사람 쓰는 거야"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는 말이 있다. 상사의 말이 그랬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괜히 지레 찔려 내지른 상사의 말에는 스스로도 설득시키지 못한 질문이 있었다. 물론 일의 양을 정량화하기란 힘들다. 신체가 힘든 일도 있고 정신이 힘든 일도 있다. 어디에 더 많은 비중을 가져가냐에 따라 사람마다 업무의 강도는 천차만별이다. 또한 몸이 편한 일이라 해서 덜 힘든 일도 아니며, 몸이 힘든 일이라 해서 덜 중요하고 단순한 업무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 어떤 특성의 업무가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때문에 동료 간에 누가 더 많이 일을 했는가를 따지기란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사가 되어 더 많은 월급을 가져간다면, 그건 다른 동료보다 더 많은 책임을 진다는 것과 업무 과제를 해나갈 때 적극적으로 동료를 설득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앞장서 이끌어간다는 것에 값을 매긴 것이 아닐까 한다. 앞서 말한 맥락에서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더 많은 책임을 지고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나 편하자고 사람을 쓰는 거야'라는 말에서 내비치듯 함께 일하는 사람을 동료로 여기지 않고 본인이 더 편하게 일하기 위해 부리는 사람 정도로 여기는 태도에서, 상사가 원하는 직원은 '시키는 일을 군말 없이 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지난한 시간 동안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끝내는 무엇을 어떻게 말하든 서로를 고깝게 여기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만두기를 택했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조금의 싹도 남겨두지 않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A:OO 씨 지금처럼만 하면 돼.
'지금처럼'이라면 퇴직이 확실해지고 난 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라면 하라는 데로 움직였던 것을 말하는 거였다. 어떤 감정도 의견도 없이 지시하는 데로 움직이는 부속품 같은 삶. 언젠가 상사가 C를 두고 '나한테는 말대꾸하지 마'라던 게 떠올랐다. 머릿속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퇴직에 번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