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인간군상이 모이는 곳
백화점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연필을 굴려 뾰족한 연필심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걸어간 것과 다름없었다. 당시 타 지역으로 거주지를 이동하면서 새로 직장을 구해야 했는데, 여러 군데 이력서를 넣은 곳 중 하나가 백화점이었다. 이전까지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쭉 일해왔기에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직종은 낯설기도 했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행위 자체에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지원하고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내심 연락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얄궂게도 지원한 많은 곳 중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곳이 이곳이었다. 이사 후에 일을 구하기까지 붕 뜬 시간과 마음을 다잡을 곳이 필요했기에 빠르게 취직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또 면접을 본다 해서 일을 하리라는 보장도 없어서 떨리지만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당장 며칠 후 출근을 하라는 말에 새로운 직종에서 일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면접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한 통 왔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이력서를 제출했던 곳 중 하나였던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더니, 정말 딱 맞는 말이었다. 만약 카페에서 연락이 먼저 왔다면 분명 그곳에서 일했을 것이다.
백화점에서 근무를 해보니 카페에서 일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사람을 상대로 상품을 판매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방문하는 고객이 모두 구매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었다. 카페를 방문하는 고객은 상품을 권유하지 않더라도 식음료를 먹기 위한 목적으로 발걸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단 카페로 오게만 만든다면 판매까지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러나 백화점은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끌어 해당 장소로 오게끔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상품을 구매하게 만드는 것 또한 큰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새로운 만남과 놀이 장소로 백화점이 꼽힐 만큼, 이제는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구매한다기보다는 백화점에서 잘 기획한 이벤트, 콘텐츠를 즐기러 백화점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백화점을 갈 만큼 풍족한 형편이 아니여서도 있겠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백화점은 편하게 누구나 들러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돈이 없거나 물건을 살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그 문턱을 밟기도 송구스러워지는 부담스러운 장소였다. 지금은 청소년을 비롯하여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약속 장소로 백화점을 선택해 구경도 하고 커피도 마시며 사진도 찍어 올릴 수 있는 좋은 콘텐츠 제공 장소이자 사교의 장소로 바뀌었다.
그만큼 이전보다 다양한 연령층,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람들이 백화점으로 모인다. 그래서일까. 백화점에서 참 다양한 사람을 겪었다. 이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인간상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오전에 백화점을 떠도는 사람들은 유령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목적도 없이 할 일 없이 떠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요즘에는 구매가 목적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백화점 매장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개중에 살 것도 아니면서 괜스레 상품에 트집을 잡으며 드잡이를 해대는 통에 아침부터 시달렸던 직원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수도 없는 말은 "아침에 유령들을 조심해"라고 변주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사람에게 시달린 직원들이 서로를 격려하는 말이기도, 팍팍해진 마음을 풀어보고자 건네는 농담이기도 하다.
백화점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혼자서 마감업무를 하던 때였다. 마감을 삼십여분 앞두고 대부분의 고객이 떠나간 층은 조용했다. 그때 한 고객이 매장으로 들어왔다. 들어설 때부터 고객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징조였다. 마주한 첫마디가 '매니저 없어?'였다. 근무를 시작한 이레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매니저 어디 갔냐는 물음이었기에 크게 새로울 것은 없었다. 새로운 고객이 계속 유입되기보다는 매니저와 라포를 형성한 단골 고객을 위주로 판매가 이뤄지는 매장이었기 때문에 '매니저는 할인해 주던데' 혹은 '나 여기에서 정말 많이 샀는데 잘 좀 해줘 봐', '매니저 있을 때 사야겠다'라는 소리를 밥 먹듯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매니저랑 다 이야기된 거야'로 시작된 이야기는 *영수증을 교체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달받은 것이 없었기에 서둘러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부터 고객의 화가 시작되었다. 바쁜 사람 앞에 두고 빠르게 일처리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고객은 전화를 끊고 영수증을 찾아 재결제하기까지 매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 매니저한테 다 이야기해 놓았는데 너는 왜 모르는 것이며, 영수증 찾는 데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리고, 난 지금 바빠 죽겠는데 일처리 하나 똑바로 하지 못하냐고 윽박질렀다. 당황스럽고 황당하고,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러나 연신 죄송하다 말하며 일을 해야 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고객이 말했다. "미안해요 이렇게까지 할 건 아니었는데, 내가 오늘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고 와서 신경이 날카로웠어요." 말문이 막혔다. "괜찮습니다. 그러실 수 있죠. 신경 쓰이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인사말 뒤에 수치심과 자괴감이 밀려왔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고 얼굴에 붉은 기가 사라졌을 때, 별 사람 다 있다는 생각 하며 이상한 사람에게 된통 걸린 것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이 일은 앞으로 시작될 고난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물건을 사서 얼마간 사용하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반품해 달라는 사람부터, 구매한 지 일 년이 다 돼 가는 물건을 가져와 무조건 교환해 달라고 하는 사람, 매장 전시 제품을 깨뜨려 놓고 도망가는 사람, 반말을 호쾌하게 해대며 '이리 와', '저리 와' 하는 사람 등등.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모두 백화점에 근무하기 전에는 만나보지 못했던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세상에 별의별 사람 다 여기 모였네'
'백화점은 하나의 작은 사회다. 세상의 모든 인간군상이 여기에 모여있구나."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영수증교체: 주로 평일에 구매한 고객이 주말에 적용되는 사은행사 참여를 위해서 반품하고 재결제하는 것. 때로는 결제 수단 변경을 위해 재결제를 요청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