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현 Jan 10. 2023

펌프(pump) 이야기

   세상의 모든 기계, 오늘은 펌프(pump)에 대해 잡다한 이야기를 해보자.

   

   펌프의 역사는 농업, 그리고 집단생활의 역사와 함께 한다. 최초의 펌프는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했다고 잘못 알려진 스크루 펌프(screw pump)로서, 앞서의 글 나사에 관한 잡다한 고찰에서 설명한 바 있다. 줄잡아 5천년 동안 진화를 거듭해 온 펌프는 현재 산업 현장과 농업은 물론 일상 생활에까지 쓰이지 않는 곳이 없고 지구상에는 매일 수십억대의 펌프가 돌아가고 있다. 수십억대라는게 과장이 아닌게,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게 펌프의 작용이고 냉장고와 에어컨의 컴프레서도 펌프의 일종이다. 당신의 차에도 연료펌프가 있고 에어컨 컴프레서와 파워스티어링 펌프가 돌아간다. 운전자가 별로 의식을 못하지만 엔진에 붙어있는 워터펌프와 오일펌프도 차량의 중요 부품이다.


   펌프의 종류는 분류하기에 따라 다양하게 나열할 수 있지만 펌프 책을 펴면 대개는 첫 챕터에 원리에 따른 분류가 나온다. 이에 따르면 수천가지 종류의 펌프는 거의 다 원심식, 축류식, 아니면 용적식 중의 하나에 속한다. 용적식은 또 왕복식과 회전식으로 나누는데 얘기하다 보면 골치아프니 그냥 용적식이라고만 해 두자.

원심식(上), 축류식(左下) 및 용적식 중 피스톤펌프(右下)

   

   원심 펌프(centrifugal pump)는 유체를 케이싱 안에서 회전하는 임펠러(impeller)로 받아서 회전 원심력을 이용, 임펠러 밖으로 '뿌리는' 방식이다. 구조도 간단하고 수평, 수직, 다단(多段) 등 용도에 맞게 다채로운 설계가 가능하며 유량과 압력의 선택 폭이 넓어 산업현장과 관개, 상하수도 등에 광범위하게, 가장 많이 사용된다. 지하수 퍼올리는 자동펌프, 아파트 수도 부스터펌프가 99% 원심펌프다. 일반적으로 펌프라 하면 대충 이 원심펌프를 말한다.

   축류 펌프(axial-flow pump)는 임펠러가 프로펠러 형식이다. 물 속에서 프로펠러가 돌면 배가 앞으로 나가는데, 프로펠러를 고정시키면 물이 어떻게 될까? 바로 그렇게 프로펠러로 유체를 축방향으로 이송시키는 펌프다. 이것은 퍼올리는 높이 즉 양정(head)이 흡입과 토출 압력을 합해 최대 10m 정도로 아주 저압용이다. 그러나 비슷한 크기의 원심펌프보다 토출 유량이 훨씬 많고 가격도 저렴하다. 보통 보일러나 상하수도, 농업용수, 즉 유량이 많은 대신 바로 옆 수조에 넘기기만 하면 되는 곳에 많이 채택된다. 일반적으로는 보기 힘들고 플랜트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용적식 펌프(dischargement pump)는 유체를 받아서 그대로 밀어내는 방식이다. 물 들어오는 구멍과 나가는 구멍이 따로 되어있는 물총을 생각하면 쉽다. 용적식 중에 회전식은 물레방아를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 용적식 펌프는 보통 유량이 작은 대신 높은 토출 압력을 낼 수 있어 유압 펌프로 널리 사용되며 수많은 바리에이션이 있다


   간단한 퀴즈와 함께 글을 시작해보자. 다음 그림과 같이 토출구(outlet or discharge)에 배관이 접속된 펌프가 있다. 농업용으로 옮겨다니는 펌프가 아닌 이상 대개는 이렇게 설치될 것이다. 여기서, 토출구 밸브 A를 닫고(꼭 잠그고) 펌프를 가동하면 어떻게 될까?

   ① 펌프가 터진다.

   ② 토출 배관이 터진다.

   ③ 과부하가 걸려 모터가 소손된다.

   ④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도 퀴즈라고 냈나 하실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기계를 전공하고 현장에서 다년간 '굴렀'으면서도 오답을 내는 분들을 나는 종종 보았다. 스스로 쌓은 인식의 벽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두텁다.


   답은 펌프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원심펌프의 경우의 답은 [④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이다. 펌프 내부에서 임펠러(impeller)는 케이싱(casing)을 가득 채운 물 속에서 헛되이 회전할 뿐 아무 일도 없다. 아, 특이한 점이 있긴 하다. 축동력, 즉 모터에 투입되는 전류치가 뚝 떨어진다. 보다 적은 에너지로 임펠러를 돌릴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아무 일도 없는것보다 더 아무 일 없다. 원심펌프의 원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케이싱을 채운 물을 임펠러의 원심력으로 토출시키면 임펠러 중앙부가 공동(空洞)이 되어 압력이 낮아지고, 낮아진 압력은 흡입구로부터 유체를 빨아들이는게 원심펌프의 원리다. 만일 토출구가 막히면 공동이 생길 수가 없어 흡입구까지 막힌 효과가 된다. 다만, 밸브를 닫고 장시간 운전을 하면 유체의 점성저항으로 케이싱 내부 유체 온도가 올라가고 심하면 수증기까지 발생하므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이런 식으로 펌프를 돌릴 필요는 없다.   


   축류식, 다른 말로 프로펠러식 펌프의 경우 답은 [③ 과부하가 걸려 모터가 소손된다] 되겠다. 전기쟁이가 술에 취하지 않고 모터 배선을 했다면 모터가 타기 전에 과부하 차단기(breaker)가 내려갈 것이다. 축류펌프는 흡입방향과 토출 방향이 같고 프로펠러의 회전 양력(揚力, lift)으로 유체를 이송하는 원리로 돌아간다. 그래서 토출측이 막히면 프로펠러로 계속 공급되려 하는 흐름이 심각한 와류가 되고 이로 인해 프로펠러를 돌리는 동력이 올라간다. 이 과부하 현상은 펌프가 돌아가는 중에 토출밸브를 잠글 때의 얘기고, 밸브를 먼저 잠그고 펌프 스위치를 넣으면 처음부터 펌프가 가동되지 않는다. 단, 펌프 내부 압력이 턱없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 내부 압력이 상승하는건 사실이나 펌프 고유의 최대압력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않고 따라서 펌프가 터지지도 망가지지도 않는다. (유량 0에서 최대압력은 정격의 2배 정도다. 펌프 자체가 워낙 저압이라 2배라 해도 큰 압력이 아니다. 게다가 먼저 닫고 스위치를 넣으면 펌프가 아얘 돌아가지 않으니 최대압력이란 것도 무의미하다.)


   용적식 역시 답은 [③ 과부하가 걸려 모터가 소손된다]지만 규정보다 큰 마력의 모터를 쓰면 펌프나 배관이 손상될 수도 있다. 원심펌프의 진공압, 축류펌프의 양력과 달리 용적식 펌프의 원리는 밀어내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장 약한 부품인 펌프 내부 씰(seal)이 가장 먼저 찢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유압용 같은 고압 용적식 펌프 토출측에는 압력이 일정 이상 상승하면 토출 유체를 흡입측 탱크로 되돌리는 릴리프 밸브(relief valve)가 반드시 설치되어야 한다. 용적식 펌프의 원리에 대해서는 유압 잭(hydraulic jack)을 들어올리는데 쓰는 핸드펌프(hand pump)를 떠올리면 쉽다. 부하(load)가 한계에 오면 잭 손잡이를 아무리 눌러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역도 선수 출신이 과한 힘으로 작두질을 하면 핸들은 쑥 내려가는데 압력은 떨어지고, 그런 뒤로는 오일이 줄줄 새면서 펌프도 무슨 일인지 원래의 성능조차 안나오게 된다. 어쨌든 펌프나 배관이 터질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 원심펌프인데 스위치를 넣고 부리나케 달려가 밸브를 열고 "큰일날뻔 했네"라고 하는 명색 기계쟁이를 여럿 만났다. 그뿐인가? 이 글을 쓰기 전에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전공자들이 어느 펌프나 토출구가 막히면 펌프도 터지고 배관도 터진다고 믿고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말하는 기사시험 참고서와 대학 강의노트까지 보았다.


   매일 수십억대의 펌프가 돌아가는데, 토출구가 막혀 펌프가 터진다면 이 세상은 펌프 터지는 소리로 가득 찰 것이다. 아파트 모든 주민이 수도를 잠그면 부스터 펌프가 터져야 할 것 아닌가. 물론 압이 차면 작동을 멈추는 자동펌프지만 그 센서 역할을 하는 압력탱크는 주기적인 정비를 하지 않으면 감지능력이 떨어져 펌프가 계속 돌게 된다. 그럼에도 펌프 터졌다는 아파트는 본 적이 없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법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물이 가득 찬 양동이에 물고기를 한마리 넣었을 때, 죽은 물고기를 넣으면 물이 넘치는데 산 물고기는 물이 넘치지 않는다. 이 화두를 놓고 중세의 신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은 골똘이 연구하고 그들끼리 모이면 토론을 하고 토론의 마지막으로 인간의 지력(知力)으로 도달할 수 없는 신의 섭리를 찬양했다. 그런데 톡톡 튀는 당시의 MZ 학자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죽은 물고기와 산 물고기를 정말로 물에 빠뜨려 보았단다. 결과는, 물고기가 살았거나 죽었거나 물이 넘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어낸 것임에 분명한 이 이야기는 중세와 근대의 생각하는 법의 차이를 보여준다. 만물이 운행하는 원리가 신의 섭리라 보고 고개만 끄덕거리던 사람들이 생각이란 걸 하게 되면서 근대 과학이 태동한다. 그들은 신의 섭리도 자기 눈으로 본 뒤에야 받아들였고 신의 섭리를 숫자로 표현할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기하학과 미적분으로 컨버전한 섭리는 때로 공리공론과 충돌하기 일쑤였다. 뉴턴이 중력 법칙을 정리하기 이전에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으로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의 떨어지는 속도가 같다는 걸 논증한 갈릴레이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대중을 위해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야 했다.

   성경에 보지 않고도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요한복음 20:29) 했지만 남들이 입증한 자연의 원리를 믿지 못하겠거든 직접 실험을 해보면 될 일이다. 이공계에서는 믿는 자보다 스스로 납득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학교 교육에서 얻은 지식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세월이 지날수록 학교보다는 사회에서 습득한 지식이 점점 많아지는 반면 지금 나에게 대학 교재를 들이밀면 한문제도 풀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학교 교육이 불필요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생각하는 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닌 당신은 알게 모르게, 인정을 하든 안하든, 생각하는 뇌근육이 형성되었다. 우리가 배운 외국어와 수학, 국사와 전문교육이 지향하는 곳은 단 한 지점, '생각하는 법'이다. 때문에 사회에 나와 전공과는 동떨어진 직업을 갖게 되어도 시간만 주어지면 배워가면서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뇌근육도 때로 퇴화하는데, 주술적 환경에 장기간 노출되거나 종교, 이념 또는 괴상한 철학에 심취하다 보면, 아니면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습관이 들면 생각 기능이 빠르게 저하된다.

때때로 이런 책도 읽어야 한다.

  

   생각을 덜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내가 겪은 일화를 하나 말해볼까 한다.

   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골고루 다녀 봤다. 각각 장단점도 있고 어딜 가나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 중소기업의 경우 굉장히 많은 양아치들의 방문을 받는다. 기업 오너가 팔랑귀로 소문이 나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요컨대, 특별한 사업 아이템 또는 영업선을 갖고 있으니 돈을 달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것도 있지만 너무 우스워서 술안주로 삼기 딱 좋은 아이템도 많다. 중동 무슨 왕족 친구라는 분도 계셨고 열효율 400%인 보일러에 대해 너무나 진지한 프리젠테이션도 받았다. 한번은 관리담당 상무 연줄로 어느 신사분이 도면과 모형까지 제작해 와서 임직원들 앞에서 시연까지 보인 적이 있다. 나는 출장이라 못보고 나중에 PT 자료를 보았는데, 거대한 원통 주위로 강철 구(ball)가 나선을 그리면서 중력 낙하하는 시스템이었다. 나선으로 굴러 내려오면서 궤도에 있는 장치들을 건드려 발전(發電)을 하고 그 전력의 일부와 낙하의 관성이 합쳐져 볼을 다시 위로 올리는, 전형적인 제 1종 영구기관(perpetual motion machine)이었다. 지금이 중세인가! 내버려둘까 하다가 그 '연줄' 되시는 임원에게 이런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다고 말씀 드렸다. 그 때 그분이 하신 말씀이  "그건 이론이고.."


   팩트를 중시하고, 어떤 주장이나 진술이 근거가 미비하거나 내가 아는 것과 상충된다면 그 주장 또는 진술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검증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생각하는 법이다. 여기서 '비판적 사고'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인데, 인류가 축적해 온 보편적인 상식, 나아가 자연 법칙까지도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대화가 있다.

- 연료 소모량에 고위발열량을 곱해보면 그 장치가 낸다는 열량의 4분의 1밖에 안됩니다. 열효율 100%가 넘는 기관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 이론상으로는 그렇지요.


   이론이 아니고 법칙이라고! 이 사기꾼아. 물론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패러다임 체인지가 있을 수는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그랬고 갈릴레이가,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통념을 뛰어넘으며 인류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이렇게 배운 지식을 뒤집을만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려면 팩트를 수집하든 엄밀한 논리적 과정으로 논증하든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과 당신 주위 사람이 그만한 능력자일 리는 없지 않은가?


   펌프에 대한 또 하나의 퀴즈를 내 보자.

   펌프가 유체를 퍼올리는 높이를 양정, 영어로는 헤드(head)다. Head를 그대로 번역하여 수두(水頭)라 하기도 한다. 펌프가 수면보다 위에 있는, 아래 그림과 같은 경우 수면에서 펌프까지의 양수 높이가 흡입양정(suction head), 펌프 이후 쏘아올리는 높이가 토출양정(discharge head)다.

   문제 : 대기압(1 atm) 하에 노출된 수조(연못물이라 하든지)에서 원심펌프로 물(water)을 퍼올릴 때 흡입양정은 최대 몇 미터까지 가능할까?

   ① 약 5미터

   ② 약 10미터

   ③ 약 20미터

   ④ 높이에 제한이 없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문제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틀린다. 답은 [② 약 10미터]다. 여기서 '최대'라 함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은 이상적인 조건 즉,

- 증류수, 어쨌든 순수한 물

- 흡입 배관 내부를 완전 진공(perfect vaccum)으로 만들만큼 강력한 펌프

- 펌프 효율 100%

- 관로 손실 없음

- 유체 압력 저하로 증기 기포가 발생하는 캐비테이션(cavitation) 현상 없음

일때의 흡입 양정이다. 대기 1기압은 1013.25 hPa(헥토파스칼 = 100Pa)으로, 이 압력에서 이론상 최대 흡입 양정은 10.3미터다.


   이 문제는 중학교 때 배운 토리첼리의 실험을 기억에서 떠올려 보면 간단하다. 이탈리아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Evangelista Torricelli, 1608~1647)가 수은주를 이용해 기압을 측정한 것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험 중의 하나다.

토리첼리의 실험

   그림만 봐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누구나 아실 것이다. 기압은 수은주의 무게와 평형을 이루고 수은주 위쪽은 완전 진공이 형성된다. 만일 비중 13.6 kg/L인 수은이 아니고 1 kg/L인 물이라면 물기둥의 높이는 수은의 13.6배가 될 것이다. 진공보다 낮은 압력은 없으므로 그보다 높은 물기둥, 즉 흡입양정은 절대로 10.3미터를 초과할 수 없다. 고등학교 때 배운 물리학을 잊어먹지 않았다면 베르누이 방정식으로도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일 귀하의 회사 사장님이 팔랑귀고, 그래서 양아치들이 많이 꼬이는 편이라면 20층 옥상에서 호스만 내려뜨려 물을 퍼올리는 펌프 도면을 들고 오는 사람도 있을법하다. 팔랑귀 오너들은 일반적으로 내부인에게는 귀를 철저히 닫는지라 무슨 말씀을 드려도 안될것이고, 할수없이 사기꾼에게 직접 부딪힌다. 당신이 토리첼리의 실험이나 베르누이 방정식을 들먹이면서 그런 펌프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아마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론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 인류가 축적해 온 이론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실제 실현이 불가능한 경우는 수없이 많지만 이론상 가능하지 않은 법칙이 실현되는 일은 수만년의 역사가 지나도록 한 건도 없었다.


   참고로 흡입양정 10.3미터를 초과하는 깊은 우물물을 우물 위에서 퍼올리는 제트펌프(jet pump)라는 특수 펌프가 있다. 흡입 관로에 수증기나 공기, 물을 고압으로 분사하여 그 운동에너지로 흡입양정을 올리는 방식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장에서 펌프 설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수면보다 낮은 위치에 두는 게 정석이다. 펌프실이 괜히 지하에 있는게 아닌 것이다. 불가피한 경우라면 수직펌프를 채택해 흡입배관 없이 펌프 흡입구를 액체에 담그거나 아얘 수중펌프를 사용한다. 수중펌프는 휴대용도 많아(사실 휴대하기에는 좀 무겁다.) 하수처리시설이나 침수지역에서 비상 배수를 하는데 많이 이용된다. 수중펌프를 줄에 매달아 물에 담그는 걸 '펌프를 박는다'고 표현하는데, 처음 나는 무슨말인지 몰랐다.

물에 '박힌' 수중펌프

   

   수직 타입조차 쓰기 곤란한 불가피한 경우라면 할수 없이 수평형 펌프를 수면보다 위에 설치해야 한다. 농업용이나 생활용수가 이에 해당되지만 플랜트 현장에서도 이 외에는 노답인 경우가 허다하다. 수면이 펌프보다 10.3미터, 현실적으로 대략 7미터 이하로 가까우면 일반 원심펌프로 가능하나 그보다 깊은 우물이라면 전술한 제트펌프를 써야 한다. 다만 제트펌프라 해도 흡입양정은 대략 30미터가 한계이며 그보다 낮은 물은 무조건 펌프를 박는다.

   어쨌든 이렇게 수면보다 위에 설치된 펌프는 스위치를 넣기 전에 반드시 케이싱 위쪽에 있는 마개를 열고 마중물을 부어 주어야 한다. 케이싱과 흡입배관을 물로 채우면서 공기를 빼 주는 작업인데, 영어로 프라이밍(priming)이라 하며 왠일인지 우리말이 없다. 프라이밍 워터는 '마중물'이라는 고급스러운 우리말 용어를 현장에서도 널리 쓰는데 프라이밍은 '마중'도 아니고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프라이밍 작업은 50대 이상 한국인이라면 거의 다 어렸을 때 해보셨을 것이다. 작두라고도 했던 수동 지하수 펌프로 물을 풀 때의 이야기다.

프라이밍(priming)

   마중물을 붓고 펌프를 가동하다가 정지하면, 금세 재가동하면 상관 없지만 정지한 채로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 펌프로 공기가 새어 들어가 흡입배관이 다시 텅 비어버린다. 이러면 프라이밍을 다시 해줘야 하는데,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비가동 시간이 있는 수평형 원심펌프는 자흡식(self priming pump)을 많이 쓴다. 자흡식 펌프는 한번 프라이밍을 해주고 나면 정지시간이 길어져도 재가동시 공기를 스스로 배출하며 흡입배관에 물이 차도록 한 구조다. 그러나 개인적인 경험상 며칠에 한번 가동할 정도로 정지시간이 길어지면 자흡식도 별 수 없이 그때그때 프라이밍을 해줘야 한다.


   펌프에 대한 마지막 퀴즈. 이것은 기계나 물리 지식 하나도 없이 잠깐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아래 그림은 용적식 펌프중에 대표적인 기어 펌프(gear pump)의 단면도다. 잇수가 같고 맞물리는 한쌍의 기어로 유체를 이송하는 방식으로 구조가 간단하고 가격이 저렴하여 고압 저유량의 유압용 펌프로 애용되고 있다.

기어 펌프

   기어의 회전 방향이 위 그림과 같을 때(상부 기어는 시계방향, 하부 기어는 반시계방향) 유체의 이송 방향은 어느쪽일까?


   답은 ②다. 김성모 작가의 2002년 만화 [대털]에 나오는 세기의 명대사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용적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기어들이 어디에 유체를 싣고 돌아가는지 생각해보면 쉽다.

매거진의 이전글 베어링에 관한 잡다한 고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