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이병현 Dec 19. 2023

<신세계로부터>(2023) 시사회 후기

그렇게 종교가 된다

사이비 교주 '신택'과 함께 탈북한 '명선'은 남한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자리잡게 된다. '사람 10명이 모여 기도하면 죽은 이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화신교'의 가르침을 따라 죽은 아들을 부활시키려는 명선은 각종 알바를 전전하며 교주를 먹여살리는 한편, 시간이 날 때마다 포교용 전단지를 돌리며 10명의 신도를 모으기 위해 애쓴다. 텃세에 막혀 신도를 모으는데 애를 먹지만, 점차 죽은 이를 '부활'시키고 싶은 이들이 하나둘 모이며 화신교는 소소하게 세를 불려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 의식을 치르는 날이 다가온다. 신도들은 치성을 드리지만, 죽은 이는 부활하지 않는다. 신택이 사기꾼이라며 흥분한 사람들 틈에서, 명선은 혼란에 빠진다. 선천에서부터 신택을 쫓아왔다는 다른 탈북자 두 명은 신택이 선천에서도 부활 의식에 실패해 사기꾼으로 몰려 맞아 죽을 뻔한 바람에 여기로 도망온 거라는 말을 남긴 뒤, 신택의 가방을 훔쳐 달아난다.

신택을 추궁하는 명선에게, 신택은 이제 때가 됐다며 명선이 교주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영화는 탈북자를 소재로 삼은 영화 중에서는 매우 독특한 작품에 속한다. 일종의 패턴화된 캐릭터와 스토리를 통해 독립영화계에서 하나의 장르가 된 '탈북영화'의 전형에서 빗겨나는 아이디어가 눈에 띈다. 주요 탈북민 캐릭터에 사이비 교주라는 속성을 부여한 탈북 영화는 확실히 이제껏 우리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세팅 위에서 이 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영화는 노골적인 '실명 모티프'를 도입해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암전된 화면에서 시작해 다시 암흑 속에서 끝나는 이 영화는 주인공이 믿는 허접하고 터무니없는 사이비 종교와 그런 그를 적대시하는 남한의 열성 개신교 집단이 실은 '맹목적 믿음'이란 테마를 공유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두 집단이 서로 마주보고 포교하는 장면에서 화신교도와 개신교도를 비슷한 시선으로 교차하며 담아낸 연출을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은 부활했는데 왜 우리 아들은 부활하지 못하나요?"라는 주인공의 황당한 질문은, 결말에 이르러 암흑 속에서 들리는 작은 대답을 통해 메아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 소리가 암전된 화면에서 들려오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석은 진실 혹은 거짓으로 명확하게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믿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된다.


그런데 나는 영화가 이런 애매모호하고 중의적인 결론에 이르기 위해 충분한 단서를 깔아뒀는지 되묻게 된다. 마지막에 들린 그 목소리가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정하담 배우의 인상적인 연기 말고 다른 요소가 더 필요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우리가 목격한 두 번의 부활극 중 첫 번째 것은 실패하고 두 번째 것은 성공한 이유를 '논리적으로도' 설명할 수가 있다면 관객은 마지막 목소리를 심오하게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 "진정한 마음으로 기도한 10명이 모인 것이 아니라, 불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끼어있었기 때문에 10명을 채우지 못해 실패한 것이다!" 같은, 전형적인 사이비에서 할 법한 변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 영화는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메꾸기 힘든 서사적 공백이 너무나 큰 탓에 마지막 목소리를 '진실'로 해석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 믿음에 대해 다루는 영화라고 해도 관객은 믿음만으로는 스토리에 몰입할 수 없다.



출발은 흥미진진했고 중반부 몰입도는 나쁘지 않았으나, 다소 부족한 복선 탓에 마지막에 결말이 의도한 바가 충분히 달성되지 못해 아쉽다. 그러나 감독과 배우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이어가기엔 충분한 영화였다. 분명 매끈하진 않지만 중간중간 매력적인 구석이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부활 의식 장면은 두 배우의 열연과 영화가 끈질기게 이어온 충혈된 눈과 실명의 모티프가 결합되며 폭발력을 자아내는 힘이 있었다. 눈이 먼 듯 비틀거리며 담장에 몸을 기댄 명선이 곧장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장면은 논리적 고리 모조리 끊긴 상태에서도 그 자체로 내적인 설득력을 발휘할 만한 수준이었다. 또 나름대로 불과 물이라는 명확한 이미지적 대비를 활용하려 시도한 것도 몇몇 장면에서는 효과적이었다. 이런 인상적인 결합과 효과를 영화 전체에 유기적으로 엮어낼 수만 있다면 차기작은 훨씬 더 훌륭해질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