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도움이 되었지만 여전히 혼자 힘들어하던 저는 20대가 되어서야 겨우 성폭력상담소를 찾아서 연락을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는 어쩐지 그런 곳에 연락을 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검색창에 성폭력상담소를 치니 한국성폭력상담소(https://www.sisters.or.kr/)가 나왔습니다. 그곳에 전화를 하면서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저도 잘 몰랐습니다. 다만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었으면 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저는 한달에 한번 마지막주 수요일 저녁에 개최하는 성폭력 생존자 작은 말하기 모임을 안내받았습니다. 성폭력 생존자들이 모여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자조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해 7월 30일 모임이 있는 까페는 너무 밝고 환하고 공개적인 느낌이라 처음에는 기도 죽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이야기를 듣고 하면서 저는 어느새 모임의 분위기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많이 설명하지 않아도 같은 경험을 공유한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다른 이들보다는 몇배로 공감할 수 있었고, 서로 서로를 받아들여주고 있고 진심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어디 가서 이렇게 마음 편히 눈치 안 보고 이런 이야기를 남들 앞에서 입으로 소리내어 말 할 수 있을까요.
평온해 보이던 얼굴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예고도 없이 일그러지고 눈물이 터져나옵니다. 울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합니다. 몇번이나 이런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저또한 그랬습니다.
제차례가 되어 말을 하기 시작하자 저도 모르게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목소리가 떨리고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습니다. 어, 울기 싫은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든 말은 계속 했는데 목소리도 엉망진창 흐느끼면서 간신히 말을 멈췄습니다.
사건은 몇십년 전에 일어났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지옥은 바로 '지금 여기'가 되고 생생한 그 플래시백은 한번 작동되면 제몫을 다 보여줄 때까지 제 영혼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를 지지해주는, 나의 경험이 개인의 영혼에게 어떤 손상을 미치는지 너무도 잘 아는 동병상련의 여성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듣고, 또 내가 '소리내어 말하'는 그 시간은 분명히 무언가 달랐습니다.
그 증거로 그뒤에 저는 산송상처럼 지내지 않고 돌아다니고 밥도 먹고 에너지도 조금은 생겼습니다. 또한 제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딪혔던 여러가지 문제들이 나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라는 것을 알고 무척 안심이 되었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어떻게든 그런 나를 보듬고 조금씩 천천히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의지가 약하고 약해빠진 영혼이어서 그런줄 알았는데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하니 얼마나 좋았던지. 이유 없이 혹은 미량의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오는 갑작스런 불안과 무기력증, 감정의 오락가락, 심장이 마비되는 느낌,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마비 증상 등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_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너의 잘못이 아니다. 살아있어도 괜찮다. 이 말을 서로 몇번이고 반복한 것이 좋았습니다.
이 모임에 그뒤로도 몇 번을 더 나갔습니다. 이 모임이 나간 것이 저에게는 큰 변화의 지점이 되어서 앞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조모임에 나갔다고 해서 제 괴로움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혼자라고 생각했던 제게 나를 이해해주는 영혼의 자매들이 있다는 사실은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뒤로부터 소용이 없다고 혼자 미리 생각해버렸던 정신과치료나 상담치료를 받을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생존자 작은 말하기 모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침 이번주 수요일이 그날이네요. https://www.sisters.or.kr/notice/event/7565 이 링크로 가면 신청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서울에서만 한다는 것이 마음이 쓰입니다. 제가 오픈카톡 단톡방으로 친족성폭력생존자를 위한 방을 만들어 놓았으니 온라인으로라도 마음을 나누고 싶으신 분은 제게 이메일(xxeen@naver.com)을 보내주시면 링크를 드리겠습니다.
언제나 환영합니다. 여러분들의 평안을 빌며 오늘의 글을 마치겠습니다. 다음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