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우주 May 06. 2024

물고기에 대한 예의

취미를 위한 살생과 가책


바다를 보러 갈 때마다 낚시할 생각은 없어도 항구 앞 낚시점에는 들러보는 버릇이 있다. 그 항구에 남아있는 인심을 엿볼 수 있는 곳이어서일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얼굴과 피부에 늘러붙는 짜고 눅진한 공기는 늘 정겹고, 동서남해 어디서나 낚시점의 냄새는 같다. 그 안에선 보통 나이 지긋한 아저씨 서너 명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젊은 청년이 들뜬 표정으로 들어오면 처음에는 ‘그냥 신기해서 구경 온 거니’하며 눈길도 주지 않는다. 나도 그 무관심에 호응하듯 얼마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점포 안을 둘러보기만 한다. 그렇게 내 존재가 잊힐 때즈음, 넌지시 낚싯대를 보러 왔다고 말한다. 너무 초짜 같지 않게 “내항서 원투 좀 해보려 하는데” 하면서 운을 뗀다. 그러면 마침내 주인장 아저씨가 다가와 묻는다. “얼마짜리 생각하는데”


일주일짜리 여행에서도 낚시는 오래 해봐야 한나절이다. 하루이틀 던지다 말 테니 그냥 제일 싼 걸로 달라고 말한다. 그러면 보통 3만 원 안팎의 대를 내오는데 그냥 주면 될 것을 주인장은 어떻게든 인심을 쓴 티를 내려 안달이다. 강원 고성 봉포항 낚시점에선 대는 중국산인데 감는 건 특별히 국산으로 맞춰줬다며 몇 번씩이나 당부하며 낚싯대를 건넸다. 그러면 무슨 차이인지는 몰라도 감복한 얼굴을 해야 채비라도 하나 더 얹어주는 인심을 맛볼 수 있었다. 볼 일을 마친 뒤에도 낚시 다녀본 티를 내고 싶어 봉돌은 몇 호를 써야 하냐는 등, 요즘은 뭐가 올라오냐는 등 시답잖은 말을 굳이 뱉은 뒤에야 낚시점을 나선다. 이번에는 물때가 언제인지 예사롭게 물었다가 뒤통수에 “동해에 물때가 어딨느냐”는 호통을 맞고 말았다.


막상 물때보다도 바람이 문제였다. 눈을 똑바로 못 뜰 정도로 바닷바람이 거셌는데, 이 바람 탓에 물 밖으로 드러난 낚싯줄도 곧이곧대로 뻗지 못하고 휘어버렸다. 초릿대가 사방팔방 흔들려도 진동이 대물의 입질인지, 봉돌이 너울에 휩쓸린 건지, 바람이 잠시 잦아든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때문에 이곳에선 추를 먼바다로 힘껏 날린 뒤 줄을 팽팽하게 감고 입질을 기다리는 보통의 방식 대신 릴을 아주 천천히 감다가 갑자기 반바퀴를 휙 감아제끼며 낚싯바늘이 하필 그때 입질하던 물고기의 아가리를 꿰길 바라는 요행 어린 낚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는 그렇게 주먹 만한 복어도 잡았더랬다.


방파제를 따라 등대로 향하는 길, 흉측한 테트라포드 무더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오늘은 대물을 낚아야지, 설렘을 안고 지렁이를 바늘마다 한가득 물려 던졌다. 이날은 등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지 않고 앞바람을 맞은 탓에 봉돌이 멀리 나가지 못하고 금방 고꾸라졌다. 그래도 물빛이 짙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지점까지는 가 닿아서 굳이 릴을 되감지 않고, 바람에 풀린 만큼만 감아들여 난간에 기대두었다. 빈 낚싯바늘을 거둬들이고 다시 미끼를 물려 던지길 수십 번. 묵직한 해초가 올라와 실망한 적이 많았지만, 밑걸림에 채비가 아예 터져버린 일이 없었던 것만 해도 초짜 낚시꾼에겐 감사할 일이었다.


한 번은 줄이 팽팽해졌다가 풀렸다하는 게 평상시 움직임과는 달라 긴가민가하며 줄을 감아올렸다. 이리저리 당겨봐도 가벼운 것이 도무지 살아있는 물고기가 걸린 것은 아닌 듯싶어서 이번에도 못난 해초로구나, 체념할 때즈음 수면에 뜬 봉돌 밑에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걸려있는 게 보였다. 방파제 위로 올리니 손 한 뼘 만도 못한 길이의 새끼 광어였다. 끌려 올라올 때 힘을 다 썼는지 면장갑 낀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봐도 여간 반응이 없었다. 일단 손을 옆에 갖다댄 뒤 사진 한 방 찍고, 줄을 들어 광어를 얼굴 옆으로 갖다댄 뒤 한 방 찍고. 굳이 길이를 안 재봐도 잡아들여선 안 되는 치어 같아 그만 놓아주려 바늘을 찾는데.


‘어라?’


광어는 태어나고 일 년 동안 30cm 정도 성장한다고 한다. 세상물정 모르는 치어는 의심 없이 바늘마저 덥석 삼켰다.


몸통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입 안을 훑어봐도 바늘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늘은 내장 깊은 곳에 걸려있는 듯했다. 새끼손가락도 들어가지 않을 작은 입으로 어찌 그렇게 욕심을 부렸는지. 일단 급한 대로 코털 집게를 깊숙이 넣어 바늘 같은 걸 잡고 휘휘 돌려봤으나 갈고리 모양의 바늘이 살점을 단단히 파고든 게 쉽게 빠질 리 없었다. 물고기를 살리려면 바늘을 잡고 몸 안쪽으로 밀어넣어 갈고리를 뺀 뒤, 다시 끝이 걸리지 않게 천천히 당겨 바늘을 빼내야 했다. 하지만 작은 입을 통해 이 모든 걸 해내기엔 실력이 한참 부족했다. 그렇게 수 분 씨름하다가 도무지 못하겠다, 물고기도 이미 죽었겠다, 바닥에 팽개치는데 잠잠하던 새끼 광어가 갑자기 펄떡펄떡 날뛰기 시작했다. 제발 고통을 그만 끝내달라고 온몸으로 애원하는 듯했다.


손날로 내리쳐 기절이라도 시킬까 했지만 이미 체력을 다 써버린 이 놈한테는 그게 마지막 한 방이 될 것 같아 다시 수술을 해보기로 했다. 말라가는 몸통을 잡아들었지만 이번에도 이렇다 할 방법은 없었고, 집게에 걸리는 족족 힘껏 잡아당겨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삼킨 지렁이를 빼내는 것 외 수확은 없었고, 물고기는 완전히 숨이 끊어진 듯 작게 입을 벌린 채 잠잠했다. 아가미에서 선홍색 피가 스며나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뭐라도 해보는 게 맞다 생각해 낚싯줄을 검지 손가락에 몇 바퀴 감고 힘을 주어 당겼다. 마침내 살점과 바늘이 튀어나왔다. 얼른 광어를 집어 바다에 던졌으나 광어는 흰 배를 까뒤집어진 채 그대로 가라앉았다. 해초 위에 얹힌 물고기를 한참 내려다보며 반전을 바랐으나 그것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날은 여전히 밝았고, 바람은 잦아들었고, 미끼도 부족하지 않았으나 나는 곧장 채비를 챙겨 일어났다. 도무지 바늘에서 내장 조각을 빼내고, 그곳에 다시 미끼를 끼워 시체 위로 낚싯대를 휘두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 역시 수산시장 어항 속 물고기를 동정하는 기사를 보고 코웃음을 치던 쪽이었으나, 직접 두 손으로 간절한 생령의 불씨를 서서히 꺼트리는 경험은 한 인간성, 영혼이라 할 만한 것에 큰 가책을 안기는 것이었다. 그 시체를 앞두고서 물고기는 통각수용기가 없어 고통을 모른다는 학설이나, 죽어서도 영양분이 되어 바다를 이롭게 한다는 섭리 따위를 운운하며 손쉽게 죄책감을 털어내려 한 모진 감수성이 오히려 동정 받아 마땅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가책 역시 내장을 콱 물린 바늘처럼 쉽게 빠질 줄 몰랐다.


생계나 생존을 위한 낚시는 수천 년간 지속돼온 정당한 행위이고, 때에 따라선 숭고하기마저 한 것이라서 대문호들의 글감이 되기도 하지만, 취미를 위한 낚시란 ‘이 남자 제법 취향 있’라는, 돌아서면 잊힐 얇은 각인을 새기기 위해 낭비되고  뿐, 떠한 가치나 의미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무가치한 행위를 위해 비록 작더라도 한 생명을 고통에 몸부림치게 하고 끝내 죽여버리고마는  그의 마음에도 생채기를 내고 만다. 따라서 이번 일로 내가 배운 게 있다면 단순한 유희를 위해 낚시를 즐기려는 자는 반드시 잡은 물고기를, 비록 상처는 남을지라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상태로 자연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기술을 갖춰야 하며, 그것이 물고기에게 무의미한 고통을 안기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점이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 검색창에 ‘물고기 바늘’까지만 입력했는데 ‘빼는 법’이 자동완성됐다. 그런 가책에 괴로워한 게 나만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그 많은 사람들이 검색하며 자동완성 목록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물고기들이 배를 까뒤집으며 죽어나갔을까를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다시 아려왔다. 올라온 글과 영상들을 보니 바늘을 빼기 위한 도구들은 이미 많이 발명돼있으며, 방법만 안다면 나무젓가락으로도 안타까운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늘을 빼낼 수 있는 명의가 되기 전에는 낚싯대를 잡지 말자 다짐하면서도, 새끼 광어 찍은 사진을 올리는 욕구 참지 못하는 모순 역시 새삼  만한 일일 테지.

작가의 이전글 완벽한 휴가는 없을지 몰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