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 속 말

빛깔 없는 나비가 튀어 올랐어요.

by 엘리

폭풍처럼 거칠던 정원의 요동은

언제 그랬냐는 듯, 꿈처럼 사라졌어요.


하지만 엘리의 마음속엔

아직도 폭풍의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그녀는 굳이 손댈 필요 없는 일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바닥에 흩어진 자잘한 돌을 하나씩 주워 담고,

엉켜버린 풀을 조심스레 풀어내고,

바람에 꺾인 가지들을 품에 안아 모았어요.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생각들이 몰려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거든요.


움직일 때마다 머리는 지끈거렸고

가슴은 마치 불타오르듯

뜨겁고 답답했어요.


한편, 피코는

정원 여기저기에 마킹을 하며 순찰을 돌다가

Mr. GreenHand를 만났어요.


언제나처럼 말이 없었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죠.


쫙 펴져 있던 손이

이제는 가위 모양으로 바뀌어 있었거든요.


피코는 수상하다는 듯

앞발로 막대기를 툭툭 쳐보았어요.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죠.


이번엔 막대기 주변 흙을 파헤쳐보기도 했지만,

역시 무반응이었어요.


피코는 코를 씰룩이며 중얼거렸어요.

"흠... 저쪽에 뭔가 있다는 건가?”


그리곤 가리키는 방향으로

엉덩이를 실룩대며 걸음을 옮겼어요.


촘촘한 덩굴 아래,

낮게 드리운 나뭇가지 뒤로

수상한 작은 웅덩이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냈어요.


정원 구석구석을 훤히 꿰고 있는 피코조차

처음 보는 장소였어요.


피코는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웅덩이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어요.


"... 어?"

물속엔 피코가 아닌,

한 마리 말이 있었어요.


피코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서 있었어요.

그러다 조심스레 다가갔다가, 다시 휙 뒤로 물러섰어요.

한 걸음 내디뎠다가 또다시 물러서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죠.


웅덩이 속 말의 얼굴은

마치 날렵하게 깎아낸 조각처럼 선명했어요.

넓고 단단한 이마,

길게 뻗은 콧잔등,

다부진 입매,

그리고 귀는 쫑긋했어요.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던 피코는

갑자기 머리를 격하게 털더니

번개처럼 엘리에게로 달려갔어요.


"컹! 컹컹!"

놀란 엘리는 피코를 내려다봤어요.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피코는 그녀의 앞치마 자락을 입에 물고 당겼고,

곧바로 웅덩이 쪽으로 다시 뛰어갔어요.


엘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어요.


그리고 웅덩이를 본 순간,

숨이 멎을 뻔했어요.


물속에는,

한 마리 말이 있었어요.


엘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요.


물에 손을 대려다 멈추고는

그 신비로운 존재를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말의 깊은 눈동자엔

끝없이 많은 말들이 담겨 있는 듯했어요.

설명할 수 없지만,

무언가... 오래된 고백처럼 느껴졌어요.


뜨거운 눈물이

엘리의 뺨을 따라 흘러내렸고,

한 방울이

툭, 웅덩이 표면을 깨뜨렸어요.


그 순간,

잔잔한 물결이 원을 그리며 번지더니

말의 얼굴 옆으로

희미한 남자의 윤곽이 천천히 드러났어요.


요요가

웅덩이 위로 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냈어요.


"기억은 하나가 아니야.

너의 모든 조각들이 이 정원을 이루고 있어.”


엘리는 조용히 웅크려

자신의 어깨를 꼭 감싸 안았어요.

그리고는,

물속의 신비를 한참이나 바라보았어요.


그때

그녀의 팔목에서,

구릿빛 팔찌, 쉬쉬가

쨍하고 빛을 냈어요.


피코는 반짝이는 빛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고,

쉬쉬는 누가 보고 있나 슬쩍 둘러보더니

피코에게만 윙크를 보냈어요.


피코는 기분이 살짝 상한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내 코끝으로 팔찌를 툭 건드렸어요.


엘리는 피코를,

그리고 자신의 팔찌를 번갈아 바라보았어요.


“… 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피코는 엘리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쉬쉬의 빛은 더욱 또렷해졌고,

엘리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어요.


"그래. 나...

다음 기억을 보러 가고 싶어."


그 순간,

바람이 방향을 바꾸었고


웅덩이 위로

빛깔 없는 나비들이

툭 툭

곳곳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엘리의 결심을

몸짓으로 기뻐하는 듯이요.


쉬쉬는

빛의 고리를 그리며 엘리 앞에 섰고,

피코는 말없이,

그녀 곁에 바짝 붙었어요.


엘리는 조용히 속삭였어요.

"같이 가자.”


피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엘리는 그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EP.7 정원 끝, 작은 대화


피코: “내가… 말이었다고? 진짜로?”

요요: “응. 말이기도 했고, 개이기도 했고, 고양이였던 적도 있고... 가끔은 말미잘이기도 했지."

피코: “말미잘은 좀 심한데…”

요요:(싱긋 웃으며)"하지만 네가 뭘로 있든, 넌 언제나 엘리 곁에 있었단다."

7화삽화 진짜.png 웅덩이 속 말